시네마테크 부산에서는 3월14일부터 4월16일까지 ‘월드시네마5’를 개최한다. ‘월드시네마’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이번 상영회에서는 하나의 사조나 장르, 감독이 아니라 불쑥 사건처럼 솟아올라 세계 영화사를 풍요롭게 했던 24편의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1931년작인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에서부터 1993년작인 허우샤오시엔의 <희몽인생>까지 60년이 넘는 시간적 두께와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쿠바, 대만, 일본 등까지 전세계를 횡단하는, 일명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세계영화 일주’라 할 만하다.
먼저 필름누아르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성공의 신화 뒤에 겹겹이 숨겨진 실패의 흔적이 아이러니한 세계관을 내비치는 프리츠 랑의 <빅히트>와 치명적 매혹의 덫에 빠졌던 ‘과거로부터’ 잉태된 운명적 삶을 빛과 어둠의 시어로 표현한 자크 투르뇌르의 <과거로부터>를 만날 수 있는 축복의 순간이 기다린다. 또한 이들 영화보다 가벼운 터치의 스릴러영화지만 <오명>(미상영작)의 잉그리드 버그만의 매력에 빠졌던 이들이라면, 이를 예고하는 듯한 그녀의 연기가 인상적인 조지 쿠커의 <가스등>은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일 것이고, 여성 총잡이(조앤 크로퍼드)를 내세워 전통 웨스턴영화의 도덕적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내는 니콜라스 레이의 <자니 기타>, 통속적 이야기를 과장된 미장센의 자기 반영적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전환해 미국사회를 알레고리화하는 더글러스 서크의 <슬픔은 그대 가슴에>의 매력도 만만치 않다.
이번 상영회에서는 60, 70년대 유럽과 미국, 남미 등지에서 등장해 세계 영화계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뉴웨이브영화 역시 다채롭다. 과거와 현재, 픽션과 논픽션을 충돌시키는 변증법적 양식으로 혁명 이후 제3세계 국가의 정체성 혼란과 딜레마를 표현하며 라틴아메리카 뉴웨이브를 태동시킨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의 <저개발의 기억>, 낯선 스위스영화로 혁명의 신념이 조금씩 깨어지는 순간순간이 가슴 아프지만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아마도 선지자란 의미에서일) 요나(Jonah)라 칭하며 희망을 속삭이는 알랭 태너의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문을 연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 그리고 응당 <이지 라이더> 옆에 위치해야 했건만 오랜 시간 잊혀졌던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 등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로드무비인 <자유의 이차선>은 빌려온 장르의 드라마 구조를 다림질한 것처럼 평평하게 처리하는 몬테 헬만의 장기가 돋보이는 그의 대표작으로 60, 70년대 미국사회의 부유하는 정체성을 쓸쓸한 톤으로 묘사하고 있다.
끝으로 개인적인 이유에서 몇편의 영화를 더 추천하자면, 비극적 운명의 가혹함을 발레리나의 손동작처럼 아름답고도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으로, 나 아닌 누군가가 스크린으로 이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질투나게 부러운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분홍신>, 20대 시절 ‘멋모르고’ 비판했지만 볼 때마다 ‘조심스럽게’ 감탄하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 그리고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을 소나타>를 말하고 싶다. 만약 이들 중 한편만 택해야 하는 비극적 순간이 강요된다면, 난 <가을 소나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