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오는 5월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열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27번째는 남양주종합촬영소 소품센터 김호길씨가 기증한 영화노트입니다.
까만 교복에 앳된 얼굴을 한 김호길씨가 코미디 명콤비 ‘뚱뚱이와 홀쭉이’와 함께 나란히 찍은 사진으로 시작하는 이 노트는 1959년의 영화풍경이 녹아 있는 영화 마니아의 기록이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공주에서 서울로 상경한 청년 김호길은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밤을 새워 이 노트를 채웠다. <映畵世界> <스크린> <영화·연극>(映畵·演劇) <新映畵> 등의 당시 영화잡지의 제호를 오려붙이고 영화스타들의 목록과 사진, 개봉작들을 꼼꼼히 정리했다. <Screenland> <MOVIE LIFE> 같은 외국잡지는 미군부대 주변에서 구했다. 세계 영화사, 한국 영화사, 영화기술, 심지어 영화용어 사전까지 펜촉으로 일일이 잉크를 묻혀 필사했다. ‘걸작영화자막’이라는 부분에서는 <자이안트> <목노>(酒店) 같은 당시 외화들의 타이틀 장면을 모아 스크랩했다. 외국 배우들에 대한 정리를 보면 캐리커처를 직접 그리고 평점을 매겨놓았다. 소피아 로렌은 ‘용모 80, 개성 95, 연기 50, 성적 매력 90’이고, 말론 브랜도는 ‘용모 70, 개성 95, 연기 95, 성적 매력 90’이다. 영화제목이 한 글자로 된 <꿈> <곰> <돈> <정>(情) <처>(妻)(이상 한국영화), <산> <길>(이상 외화)과 가장 긴 제목인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14자)를 뽑은 것도 재미있다.
김호길은 대학 2년을 마치고 영화판에 무작정 뛰어든다. 어떻게든 현장에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성스튜디오의 세트맨 김용화에게 술을 사주며 충무로 제작진을 소개받는다. 연출부 수업 6년을 받은 뒤 임권택 감독의 1968년 작품 <돌아온 왼손잡이>에서 처음으로 소품을 맡았다. 소품 경력 40년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 <개벽>에서는 500명의 횃불을 유지하기 위해 뜨거운 기름통을 들고 다녔는데 너무 힘이 들어 못 마시는 소주를 들이켜며 버텼다. 1993년 체력은 한계를 드러냈고 <서편제>를 마친 뒤 심장수술을 하면서 ‘영화인생은 끝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술 뒤 다시 일어나 대작 <태백산맥>을 맡았고 현재도 활동 중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양미희를 사랑했던 영화광 김호길에게 가장 특별한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다. 그의 200번째 작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