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관객 수가 좀체 떨어질 줄 모르는 <추격자>의 흥행기세로, 제작자인 김수진 영화사 비단길 대표는 축하전화를 받기 바쁘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제작자로 걸고 만든 영화는 최근 <음란서생>(2006)과 <추격자> 두편이지만, 그에게 축하전화를 해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김수진 대표가 지난 20년간 영화계에 몸담고 지내면서 알아온 지인들이거나 사업 파트너들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영화일을 시작한 김수진 대표는 당시 하명중영화제작소, 신도필름 등을 거쳐 20대 초반에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회사를 꾸릴 만큼 이미 당찬 사업가였다. 그는 <꽃잎> <나쁜 영화> 등 한국영화 기획에 참여했고 <레옹> <퐁네프의 연인들>과 같은 영화를 수입해 흥행시켜서, 한국에 짧게 프랑스 예술영화 수입 바람이 일기도 했다. 올해로 영화일을 한 지 꼭 20년이 된 그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충무로 원로”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듣지만, 6년여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이제 본격적인 제작에 뛰어든 신인 제작자이기도 하다. 1966년생. 이제 한창 일할 때인 젊은 여성제작자로서 김수진 대표를 두고 주변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뭘 해도 할 사람”이라는 것.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분명한 불같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의 주변 사람들도 호불호로 갈리가 한다는 김수진 대표를 만나기 전, 다소 두려운 맘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햇볕 좋은 홍대 부근의 작은 카페에 들어앉아 호랑이 한 마리를 기다리는 심정이었으나, 그곳에 나타난 건 경쾌한 초록색 스웨터에 트레이닝 점퍼 차림을 한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오늘은 머리도 감고 빗질도 하고 왔다”며 카메라 앞에서 수줍게 머릿결을 매만지던 김수진 대표는, <추격자> 제작과정을 비롯해 길고 곡절 많은 개인사를 세 시간 동안 빠르게 쏟아놓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뭘 쉽게 얻을 운은 아닌가봐요. 그런 행운은 나한테 없는 것 같아. 편안한 걸 할 팔자가 아닌 거지.”
-오늘(2월27일) <추격자>가 200만명을 넘었다. 무엇보다도 평일 관객이 많은 분위기다. =어제도 하루 동안 12만명이 들었다고 그러더라. 지난주 화요일엔 10만명이었으니까 늘어난 셈이다.
-어떤 기사에선 벌써 본전 다 뽑았다고 그러던데. =이제 시작이다. 아직 손익분기점도 못 넘었는데.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순제작비가 정확하게 37억5천만원 들었고, P&A비용이 20억원 정도 들 것 같다. 프린트 수가 계속 늘고 있어서.
-현재 스크린 수가 몇개나 되나. =450개다. 개봉할 땐 400개로 했다.
-처음부터 개봉 규모가 작진 않았다. =쇼박스에서, 우리가 이 영화는 책임지고 벌여주겠다고, 그렇게 믿고 기다려준 팀이 감사하고. 그동안 투자사들한테 얼마나 까였는지. 그거 다 얘기 하려면… 진짜 할 말 많다. (웃음)
-어떻게 <추격자>를 만들게 됐는지 그 얘기부터 하자. =2005년 여름 <음란서생> 촬영 직전에 <완벽한 도미요리>를 봤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받은 그 영화. 그걸 보고 (갑자기 저돌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찌르며) “저 감독 무조건 잡아와! 무조건 잡아!” 그랬는데 마침 <음란서생> 제작실장이 그 영화 PD를 해준 거라. 그래서 운 좋게 얼른 잡아올 수 있었다. (웃음) 나홍진 감독에게 뭘 준비할 거냐 그랬더니 그전에도 다른 아이템들로 여러 제작사와 계약을 했는데 다 잘 안 됐다며 나 감독이 풀이 죽어 있더라. 김선일이나 유영철을 소재로 얘기하면서 자주 만나다가 <음란서생> 개봉 직전에 감독이 초고라며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자기가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골방에서 오랫동안 혼자 썼다고. 그걸 저녁을 시켜놓고 읽는데, 읽다가 토할 뻔했다. 숨이 막히고 너무 세고 잔인하고. 문자화된 걸 읽는데도 긴장감이 넘쳤고. 그래서 결국 그 밥을 못 먹고 전화했다. 이거 하자.
-<추격자>와 같은 아이템을 하자고 감독에게 먼저 얘기 건넸던 건가. =감독이 그런 얘길 쓰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초고를 보고 같이 하자 얘기했던 거다. 어쨌든 시나리오는 많이 고쳐야겠다, 어렵겠지만 나를 믿고 같이 해보자 그랬다. 그날 우리 회사에서는 모두가 다 반대하는 거야. 영화가 너무 세고 잔혹하고, 유영철 얘기도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모두가 다 안 된다고 그러더라. 나는 유영철이 누군질 몰랐다. 그 시기에 미국에 있었으니까. 그게 뭐냐? 유영철을 왜 반대하는 거야? 인터넷 쳐봤더니 극악무도하더만. (웃음) 반감을 가질 것 같더라. 그래도 나는 (또 손가락을 찌르며) “고!” 했지. 그날부터 나 감독과 같이 신 바이 신, 지문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서 이게 과연 최선의 선택이냐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일년 내내 회의했다. 중간에 물론 각색자도 붙였다.
-뭘 고쳐야 했나. =초고의 느낌이 지금 영화로 보여지는 것과 근간은 다르지 않은데, 중요한 네개의 포인트가 크게 바뀌었다. 나 감독의 초고는 규모가 작은 하드코어 잔혹스릴러였다. 사적인 느낌이 컸고. 거기에 사회적인 이슈들도 찾아넣고 심리적으로도 사이즈가 큰 영화로 보일 수 있게,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로 넓힌 거다. 그 과정에 일년이 걸린 거지. 나는 몰랐는데, 최근에 누가 나한테 그러기를, 진짜 옆에서 보기 질릴 정도로 물고 늘어졌더라고 하더라. 저러다 말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집요했다고. (웃음) 나는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인 메시지는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가. =출장안마사 얘기는 기본적으로 사회 밑바닥 얘기다. 남들이 별로 관심 안 갖는 그런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 이유를 설명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희생자들이 죽어간 이유는 결국 모두가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경찰도 안일했고 하다못해 개미슈퍼 아줌마도 안일했다. 그런 걸 사회적으로 이슈화하지 않으면 영화는 작은 스릴러가 되고 만다. 유영철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화가 났던 게, 그 여자들이 죽어가던 당시 아무도 제대로 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건 그들이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이 다른 계층에 속했으면 경찰도 사건을 더 파고들었을 거고 사회도 더 관심을 가졌을 것 같다. 고작 출장안마산데 뭐, 이러면서 무시하고 넘어간 게 아닌가 싶더라.
-투자사들한테는 왜 그렇게 ‘까였다’고 생각하나. =연쇄살인마, 출장안마사, 영화 90%가 밤신, 60%가 비신. (웃음) 투자받으러 다니던 2006년 그해가 한국영화 수익률이 바닥을 쳤을 때여서 더 어려웠다. 그때, 알고 지내던 김선용 이사가 밴티지 홀딩스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맘에 줬더니 얼른 하겠다더라. 갓 만들어진 투자사라 유연한 장점이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42억원 정도는 갖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선 30억원이면 찍겠다는 거야. 줄이고 줄여도 31억5천만원인데. 그래서 이건 무조건 오버다, 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캐스팅은 그 이후에 된 건가. =캐스팅이 먼저 됐다. 그게 2007년 1월인데, 당연히 캐스팅도 잘 안 됐지. (웃음) 만날 그 고민에 살다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그전에 심엔터테인먼트에서 자기네 배우들 사진이 있는 달력을 준 게 있었는데, 눈을 딱 뜨니까 눈앞에서 김윤석씨가 활짝 웃고 있는 거다. (웃음) 김윤석씨 생일이 1월이거든. 그 사람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저거다, 됐다, 싶더라. 미진 역은 초고 때부터 서영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고, 영민 역으로는 하정우를 하고 싶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너무 좋았고, 굉장히 큰 배우가 될 거라고도 생각했고. 근데 투자사에서 하정우는 죽어도 안 된다는 거라. 스타를 써야 한다는 거였다. 두달을 밀고 당기다가 투자사에서 자기네가 다른 스타 캐스팅을 해오겠다고 통보해왔다. 그날 나는 난리를 치면서 전화기 집어던지고 (집어던지는 시늉) 당장 투자 빼라 그랬다. 그랬더니 이젠 거기가 뒤집어진 거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고 황당해했지. 요새같이 어려울 때 투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도 다른 투자사들한테 다 퇴짜 맞고 왔으니 그쪽에서 투자 빼면 대안이 없거든. (웃음) 일주일 있다 연락이 왔다. 그냥 하정우 하세요. 투자사가 양보해줬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하정우도 이 배경을 알고 있나. =촬영 50%쯤 지났을 때, 김윤석씨랑 하정우씨랑 같이 술 마시는데 갑자기 하정우씨가, “저 이전에 영민을 누구 생각하셨어요?” 하고 갑자기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걸 왜 물어보냐 그랬더니 항상 궁금했는데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더라. 자기가 제일 늦게 합류했으니까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았던 거다. 그래서 그 얘길 해줬다. 그랬더니 정우씨가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웃음) 내가 더 고맙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고집 부려서 정우씨를 캐스팅했는데 정우씨 연기 꽝이었으면 나 완전히 바보 되고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영민이 망원지구대에 끌려가서 진술서 쓰다가, 여자들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 할 때 그 장면 보고 모든 걱정을 놨지.
-미진 역은 왜 처음부터 서영희였나. =예전부터 서영희씨 눈빛이 되게 슬프고 불행해 보인다고 느껴왔다. <마파도> 보고 그걸 느꼈다. 참 운이 없구나. 불행하고 억울한 느낌. 그런 사람이 미진 역할을 하면 사람들이 연민도 많이 느낄 것 같았다. 영희씨도 처음엔 걱정하긴 했는데 무조건 하겠다고 하더라. 사실 여자배우들은 되게 몸 사리잖아. 근데 영희씨는 몸 사리는 게 없더라고. 힘들어서 도망갈 줄 알았더니 안 도망가데. (웃음)
-촬영기간 동안 나홍진 감독은 제작자에게 자기가 헛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중간 편집본을 가져갈 때도 최종편집본처럼 편집이니 색보정에 공을 들였다던데. =나는 이 영화 찍는 동안 매일 아침 텔레시네 보는 재미로 일찍 출근했다. 텔레시네는 편집은 고사하고 사운드고 뭐고 하나도 안 된 거잖아. 그것만 보는데도 내가 생각하는 그림 그대로 다 찍혔다는 느낌을 받았다. 텔레시네 본 지 사흘쯤 됐을 때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더라.
-걱정했던 부분이 뭐였나. =밤신이 너무 많고, 감독이고 촬영감독이 모두 신인이라 너무 실험적이거나 스타일적으로 과도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정말 클래식한 앵글에 공식 그대로 찍어왔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액션과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감독은 어떻게 숏을 찍고 붙여서 관객의 반응을 끌어낼 것인지 정말 잘 아는 사람이다. <완벽한 도미요리>를 보고 좋아한 것도 그 점이었다. 숏을 찍어서 붙이는 감각이 정말 뛰어나다. 미드 세대라 그런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70년대생 이후의 영상세대라고 할 만하다. 그 이전 세대엔 없었던 컷 감각인 것 같다. 김선민 편집기사가 잘해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 감독이 그렇게 되게끔 찍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됐나. =제목도 없는 시나리오를 나 감독이 가져와서, 제목은 지어주세요, 했다. (웃음) 제목 갖고도 진짜 말이 많았다. 고전적으로 힘있는 제목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중호의 마음을 담고 싶었고. 그래서 어느 날 ‘추격자’로 정했더니 또 모두가 반대하고…. (웃음) 나 감독도 추격과 추적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자기가 일주일만 고민해보겠다 그래서 내가 그냥 ‘추격자’로 가, 오늘부터 제목 갖고 얘기하지 마. (웃음)
-프로덕션의 면면에 있어서 영화 그 자체로 승부하고 돌파하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정공법. =처음부터 그랬다. 스타 캐스팅 가지 말고 연기자로서 적역 캐스팅으로 가서 캐스팅 비용 들어갈 거 영화에 더 쓰고, 정통적으로 홍보하고 마케팅하고. 하다못해 우리는 연예프로에서도 다 까였다. 쇼프로 같은 거, 우린 나간다고 하는데도 그쪽에서 배우들이 너무 약하다고 안 내보내주더라. (웃음) 그래서 그쪽으로는 홍보도 하나도 못했다. 영화 제목도 장난 안 치고, 무식하지만 촌스럽게 가자. 모든 과정이 다 그랬던 것 같다. 편집할 때까지도 나 감독과 논쟁을 많이 했거든.
-감독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대. (웃음) =고집스럽고, 자기 확신이 정말 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충돌했을 때 그를 설득시킬 수 있으려면 내가 감독보다 시나리오 더 많이 보고 콘티 더 많이 보고 고민도 더 많이 해서 논리로 승부해야지. 그 사람은 감독인데 얼마나 고민했겠어. 이미 머릿속에 확고한 그림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 감독은 편집실 뛰쳐나가고, 나는 달래서 데려오고, 중간에서 김선민 기사는 어쩔 줄 모르고.
-그래도 한편쯤은 더 같이 해야 하지 않나. =애초에 세편 계약했는데 안 할지도 몰라. (웃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편집할 때까지 징그럽게 싸워서. 내 생각은 이렇다. 신인감독이 영화 잘 만들어서 500만명 들고 대성하면 메이저 투자사들이 돈 덥석 주고 데려간다. 크리에이티브 자유 다 줄게, 돈 다 줄게, 하면서. 그러면 두 번째 작품 가서 깨진다. 영화는 제약과 조절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돈 다 주고 자유 다 주고, 그렇게 해서는 영화가 될 수가 없다. 편집하는 2주 동안 그래서 진짜 괴로웠다.
-편집을 2주 했나. =모든 후반작업을 한달 만에 했다. 처음에 개봉일 얘기할 땐 쇼박스에 내가 우리 영화는 개봉을 무조건 구정으로 가야 한다, 1월30일로 하자고 했는데 촬영이 지연됐잖아. 다시 찾아가서 2주만 늦춰달라 그랬는데도 후반작업할 시간이 한달밖에 안 남은 거다. 그러니 나 감독은 이가 갈리지. (웃음) 자기는 한달 내내 밤새고 나는 옆에서 안 떨어지고.
-첫 제작영화인 <음란서생>도 성공작이었다. =평 좋았고, 관객도 267만명 들었고. 근데 아직도 수익금이 안 들어왔다. 그게 일본에 120만달러에 팔렸는데, 그 수익이 영화가 개봉해야 들어오는 거다. 근데 영화가 아직 개봉을 안 했다. 3년 내내 빚지고 산 거지. 그래서 <추격자> 잘돼서 빚이라도 갚았으면 좋겠다. (웃음) <음란서생>은 국내극장 수입으로는 제작비 똔똔했다.
-<추격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들 것 같은가. =그건 잘 모르겠고, 순전히 개인적인 바람인데 500만명은 넘어줬으면 좋겠다. 500만명은 넘어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남들 다 안 된다고 했던 영화가 이렇게 나와서 500만명은 넘어줘야 지금의 한국영화 투자환경이 바뀌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400만명도 좋고 300만명도 좋지만, 이상하게 500만명이 안 넘으면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쉽게 잊혀지는 것 같더라. 오래 기억에 남고 투자 마인드도 바꾸려면 500만명은 넘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500만명이 넘어야 연말에 상도 탈 거 같아. (웃음) 윤석씨, 정우씨 다 상 받았으면 좋겠고 나 감독님도 받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나는 빚 갚으면 좋을 것 같고. 한쪽에선 부담도 된다. 주위의 기대가 너무 커져서 다음 작품은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 그래서 <작전>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계는. =시나리오 고치는 중이다. 똑같다. 신인감독이고 스타 캐스팅 안 할 거다. 이번에도 매니지먼트사에서 달력 꼭 줘야 돼. (웃음)
-어떤 내용인지. =주식 갖고 사기치는 사람들 얘기다. 무지하게 재미있다. 대한민국에서 요즘 펀드 안 갖고 있는 사람 없잖아. 나는 주식을 한번도 안 해봐서 아는 게 전혀 없지만 공부는 안 하고 있다. 나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밌어야 하니까.
-일찍부터 영화계에서 일했다. 90년대 중반에 본인이 대표로 운영했던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곳은 채윤희 대표의 올댓시네마와 함께 홍보마케팅의 양대산맥이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웃음) 그러다 1999년 AFI(미국영화학회)로 유학을 떠났는데, 무엇을 배우러 간 것이었나. =인생이… 이런 얘길 다 해야 하나. (웃음) 철없을 때 결혼했던 남편이 부도를 내고 도망갔다. 당시 6억5천만원이었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수입해서 번 돈, <레옹> 수입해서 번 돈, <나쁜 영화> <꽃잎> 이런 영화들 기획, 제작해서 번 돈으로 그 빚을 다 갚고 나니까 인생이 너무 허망하더라. 공부라기보다, 이젠 남을 위해 살지 말고 나 자신에게 투자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무작정 갔다.
-조엘 실버가 운영하는 실버프로덕션에서도 일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인턴을 잡으려고 팩스를 1천 군데 정도 넣었다. 전화가 한통도 안 왔다. 근데 실버네가 전화했다. 지금 바로 와줄 수 있냐 그러더라. 우리 너무 급하다고. 오케이, 바로 가겠다, 하고 갔는데 처음 두달은 복사만 했다. (웃음) 한국에서 영화 제작하고 기획하던 사람이 만날 매니지먼트사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있으니까 자존심이 되게 상하더라. 고생도 많았고. 그래서 어느 날은 막 울었다. 그랬더니 그 회사의 높은 사람이 와서 너 왜 울고 있냐, 한국에서 제작도 하고 그랬는데 이런 일 하니까 화가 나서 울고 있지? 너 여기 일 그만 하고 자기랑 같이 제작일 하자 그러더라. 그래서 난 일을 좀더 배워야 될 것 같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워너의 월드와이드프로덕션 부서, 그러니까 제작·투자·판권구매 부서로 나를 소개시켜줬다. 거기에서 일년 반을 근무했는데 그때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시나리오들을 다 본 것 같다. 하루에 200권씩 받아서 처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감당이 안 되지. 열 장으로 해결해야 돼. 앞부분 열장, 뒷부분 열장, 그래도 미심쩍으면 중간 몇 페이지. 하루에 최대 12권까지 영어 시나리오를 읽어봤다. 나중엔 몇장만 봐도 감이 온다. 지문 몇줄, 대사 몇줄 보고 던져, 던져, 던져. 그렇게 1년 반을 일하면서 시나리오를 보고 나니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배운 것 같다. 그러다 2004년 여름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십년도 넘게 알고 지낸 김대우 감독이 같이 영화하자고 꼬셔서 그 말 한마디에 짐 싸들고 돌아온 거다.
-비단길의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회사 이름을 한국말로 짓고 싶었고, 실크로드가 한국어로 뭐지? 하다가 비단길, 좋다 싶어서 무조건 등록하자 그랬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름대로 큰 뜻을 담아, 동양과 서양을 잇는 그런 제목이면 좋겠다 싶어 생각한 거다. (웃음) 그걸로도 놀림 많이 당했다. 비단길이 가시밭길 되는 거 아니냐 뭐 그런….
-모교인 이대에서 영화동아리 누에가 만들어졌을 때, 본인은 85학번 신입생으로 들어가서 82, 83학번의 대선배들과 함께 앞장서서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학년이. (웃음) 기지촌 여성들을 담은 다큐도 만들었다. 직접 생활도 같이 했다고. =아니 그런 얘기까지. (웃음) 근데 생각해보니 그때도 내가 그랬던 거 같아. 선배들은 다 말렸는데 내 생각엔 그렇게 찍지 않으면 다큐가 안 나올 거 같더라고. 민들레회라고 수녀님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돌봐주는 곳이 있었는데 혼자 들어가기는 무서워서 친구를 꼬여서 들어갔다. 매일 밤 죽음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후배가 신경안정제를 사줬는데 그걸 먹고 이틀 밤을 울고 불고 했다. 그 다큐 만들어서 KBS 토크쇼도 나갔고 베를린영화제 영포럼상도 타고 상금도 당시 300만원 받고, 이대 총학에서 500만원 지원해줬고 여성학 교수님들이 돈도 주셨고, 그 당시 돈을 무지하게 벌었다. (웃음) 그땐 또 전국 대학에서 데모를 했기 때문에 데모를 하는 동안 틀어놓을 영화가 없어서 우리 영화를 다 가져갔다. 그래서 그 당시 몇천만원을 벌었다. 돈이 너무 많은 거야. 근데 영화는 너무 후진 거지. 난 감독에 재능이 없구나. 돈은 버는데. 그래서 나는 뭘 하면 좋겠냐고 선배한테 물으니까 기획이나 제작하라 그러더라.
-1989년에 처음 영화일을 할 때, 시작은 어디였나. =선배가 하명중영화제작소를 소개시켜줬다. 2년 있다가 나와서 회사를 차렸다. 만 스물세살이었지. 그 해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기획해서 번돈 500만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영화보러 갔다가 영어, 불어 한마디도 못하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사와서 16억원 벌었다. 근데 지방 배급업자한테 사기당해서 다 날리고 다시 시작했다.
-어떤 영화를 앞으로 하고 싶은지.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 좋게 패키지로 꾸려진 영화들,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재미가 없다. 남들이 잘 쳐다보지 않는 것, 새로운 것, 그런 것들에 도전해보고 싶다.
-<작전> 외에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는가. =방은진 감독과 한편 하게 될 것 같고, 그 다음엔 큰 액션영화를 한편 하고 싶다.
-방은진 감독과 하는 영화 장르는 뭔지.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주인공은 여자인가. =아니, 남자다. 나도 여자주인공인 영화 해보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안 하게 된다. 시나리오 고치고 있다 보면 액션이 되고(웃음)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말랑말랑한 게 나랑 안 어울리나.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산 인생이라서 그런가보다.
-취향 문제일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아.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