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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하정우’란 인간을 완벽하게 버릴 수 있었다
주성철 사진 이혜정 2008-02-19

<추격자>의 쫓기는 연쇄살인마 하정우

이 인간 정말 지긋지긋하다. 자신의 죄에 대해 반성하라는 말은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왜 망치를 이용해 사람을 죽였냐’는 질문에 “목도 졸라보고, 칼로도 해봤는데, 애들이 되게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러다 돼지 잡는 걸 보고 그랬어요”라고 말할 정도니 말 그대로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내추럴 본 킬러’다. 게다가 여자 형사를 향해 ‘생리하시나 봐요. 냄새가 비린 게’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이미 여성영화제 ‘최악의 대사’ 부문을 선점한 것은 물론, 사람을 질려버리게 할 정도로 치가 떨린다. 하지만 유아적인 모습의 반대편에서 “아킬레스건을 따야 피가 빠지잖아요. 안 그럼 무거워서 못 들어요”라고 말하는 걸 보면 숙련된 도살자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중호(김윤석)가 그토록 잡고자 하는 영민(하정우)은 그렇게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 그 어딘가에서 애매모호하게 서 있다. 그런데 그 애매모호함이 바로 지영민이라는 캐릭터를 가장 독창적으로 만들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나 그를 지켜보는 관객 모두 그를 분석하려고 안달이 나겠지만,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인물이건 간에 어딘가에서 계속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로 단숨에 충무로의 가장 가능성있는 배우로 떠올랐던 하정우는 지난 2, 3년간 꽤 의미있는 길을 걸어왔다. TV시리즈 <히트>를 통해 ‘인지도’ 역시 높게 끌어올렸고 김기덕 감독의 <시간>(2006), 김진아 감독의 <두번째 사랑>(2007)에서도 꽤 믿음직한 인상을 남겼다. 반면에 ‘아트필름 배우’라는 인상을 깊이 각인한 것도 사실이다. <추격자>는 바로 하정우라는 배우의 넓은 스펙트럼, 그리고 배우로서의 집요함과 영리함 모두를 보여준다. 배우라면 누구나 매혹을 느낄 법한 ‘연쇄살인마’라는 캐릭터 앞에서 그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의 한국영화를 되짚어보건대 그는 더하기보다 오히려 덜어내면서 가장 ‘쿨’한 연쇄살인마를 완성했다. <추격자>는 바로 그를 향한 우리의 지지의 시선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당신의 수많은 여성팬들을 떠올려보자. <추격자>의 지영민은 완전히 그에 반하는 캐릭터다. =특정 캐릭터에 대한 인상은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영민이라는 캐릭터에 꽂혔던 것과 별개로 물론 그런 식의 우려를 전혀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결국 사람들은 내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잘하냐 못하냐를 따질 거라고 봤다.

-영화사를 통틀어 ‘연쇄살인마’라는 캐릭터는 여러 유형들이 넘쳐난다. 애초에 어떤 생각을 갖고 접근했나. =유아적이면서도 단순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죄책감을 안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거의 취미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사회성도 없지만 자신이 한번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프로페셔널이 되려고 하는 놈이다. 반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는 대처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본능적으로 ‘쿨’하지만 철저하게 방치된 인물이다. 가장 가깝게 생각한 건 <로드 투 퍼디션>의 주드 로 같은 모습이었다. 검색엔진식으로 얘기하자면 ‘한 핏줄 인물’이라 부를 수 있을 거다. (웃음)

-그래도 자기 식의 색깔을 만들고 싶었을 것 같다. =물론. <양들의 침묵>의 앤서니 홉킨스가 지적인 면모,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이 섹시한 면모를 풍긴다면 영민의 생명력은 바로 건강함이라고 생각했다. 아수라장인 경찰서 지구대와 기수대(기동수사대) 안에서도 그는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 영화 제목 <추격자>처럼 늘 뛰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영화에서 영민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이 두번 있는데 모두 리듬감이 있다. 하나는 집에 찾아온 노부부를 쫓아내려고 계단을 내려왔다 올라가는 장면, 그리고 경찰서에서 풀려나와 계단을 경쾌하게 내려오는 장면이다. 좀 비유를 하자면, 피자 시킨 게 도착해서 막 먹으려고 하는 찰나에 경찰서에 들어간 거다. 그래서 경찰서 있는 내내 그 피자만 생각하다 풀려났다고나 할까. 그것도 계속 다이어트하다가 딱 하루 마음껏 먹기로 한 날에 말이다.

-중호도 그렇지만 영민이라는 인물의 배경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대저택에 혼자 살지만 부모는 어디 있는지, 학생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정보를 주지 않는다. 본인은 어떻게 파악했나. =감독님과 나 역시 정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충청도 사람이라 생각했고 과거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집에서 도망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살인을 하기 전까지는 친구들과 절도를 했던 경험이 있을 거고, 산이나 물이 전혀 없는 벌판에서 살아온 남자라 생각했다.

-영화에서 영민은 연쇄살인마임에도 튀지 않는다. 오버하는 일도 별로 없고, 무척 평범하고 자연스럽다. 그래서 더 공포스럽다. =맞다. 자연스러움이 최우선이었다. ‘나는 연쇄살인마다’ 하는 생각을 버리려 했다. 뭔가를 인위적으로 덧붙이거나 하지 않으면서 그 캐릭터를 파고들려고 했다.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정도로 길면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짧게 잘랐고, 원래 좀 곱슬머리라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폈다. 그냥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래도 석재소에서 일했던 남자니까 러닝 자국이 보이게 5개월 정도 선탠을 했다. 그렇게 일하면 자연스레 근육도 붙고 날렵해 보이니까 적당히 근육도 다듬는 가운데 방치하기도 하고. 너무 매끄러운 복근은 이상하니까. 경찰서에서도 영민은 평범하다. 의자에 눕기도 하고 얘기도 건성으로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진술서를 쓸 때도 마치 아이들이 필기하는 것처럼 한다. 절대 악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접근했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열어놓고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자고 생각했다.

-영민은 내내 흔들림이 없지만 분석관을 만나 동요의 모습을 보인다. 그 장면의 촬영은 어땠나. =3번째 촬영에서야 끝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전체 일정으로는 후반부에 촬영했는데 처음에는 감기몸살에다 맞춰놓은 연기톤이 맞지 않아 양해를 구하고 미뤘고, 두 번째도 정말 감정이 살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죄송하게도 다음에 해야겠다고 또 미뤘다. 그러다 세 번째는 거의 4, 5시간 가까이 리허설을 하면서 끝내려 했다. 그런데 그러니까 정말 사람이 지치더라. 그 지친 모습 그대로 영민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래서 세번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촬영 내내 감독님, 윤석 형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내가 지금껏 영화 촬영하면서 이처럼 감독과 많은 얘기를 나눈 영화는 처음이지 싶다. 촬영 중에 비가 오면 또 천막 안에 들어가 계속 얘기를 나눴으니까. 오히려 올 여름의 게릴라성 호우와 이상기후가 더 많은 대화의 기회를 준 셈이다. (웃음)

-촬영이 끝나고 난 다음,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을지가 의심스럽다. =일단 담배가 늘었고 1주일에 5일 이상 밤샘을 하니 정말 내 생활이 없었다. 일반적인 스케줄이 다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올 여름 내내 일기예보가 다 틀려서 변수도 많았다. 내 눈이 밖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안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5개월 내내 촬영에 임했다. 계속 하정우가 아닌 지영민으로 살고 싶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영화가 끝나고서도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살인마 영민의 느낌, 습성, 패턴이 그대로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란다. 실제로 나 역시 기독교 신자라 교회를 다니는데 영민이라는 사람에 치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어 <비스티 보이즈>를 함께하고 있는 윤종빈과 <추격자>의 나홍진, 두 젊은 감독을 비교해보면 어떤가. =두분이 참 비슷한 면이 있다.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 솔직하고, 어떤 캐릭터를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배짱에서 비슷하다. 정말 배우로서 나를 키워준 분들이라 생각한다.

-<추격자>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으면 좋겠나. =고백하건대 이전까지 출연한 영화들은 캐릭터보다 하정우라는 사람이 먼저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지영민이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정우라는 인간이 전혀 보이지 않고 완전히 이야기 속에 묻어가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구미호 가족>이 그런 욕심으로 접근했던 영화인데 그때는 뭐 중심인물들도 많았으니까 이번이 더 난이도가 높은 것 같다. 지구대나 기수대 내에서 괜히 튀지 말고 때론 소심하게 보이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 같다. <추격자>는 그렇게 하정우라는 인간을 완전히 배제하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 홀가분하다, 일을 끝냈다, 하는 느낌 그 이상의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었다.

-<추격자> 이후에도 이미 많은 영화들을 예약해둔 상태다. =<비스티 보이즈>는 마지막 2회차 촬영 정도 남겨둔 상태고 전도연 선배와 함께하는 <멋진 하루>도 이미 찍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추격자>를 시작으로 <비스티 보이즈>와 <멋진 하루>까지를 ‘서울 3부작’이라 부르고 있다. (웃음) 지금 시점에서 뭐라 더 설명하긴 그렇고, 그 3부작을 끝내고 난 다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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