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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범] 열혈청년, 지금부턴 하나씩 비우며 간다
정재혁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8-02-01

의외다. 한바탕 코미디가 벌어지는 스튜디오 밖에서 류승범은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리는 웃음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고함도 없었다. <라듸오 데이즈>에서 PD 로이드를 연기한 류승범은 여느 때와 달리 온도가 낮다. <주먹이 운다>의 괴력의 몸부림이나 <품행제로>의 코믹한 제스처가 없다. 2006년 <사생결단>을 끝내고 2년. <가족의 탄생>과 <만남의 광장>에 카메오로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작품 활동을 잠시 쉬었던 그는 말수가 줄어서 돌아왔다.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류승범은 매일 웃겨줄 것 같고, 폭발할 것 같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로이드란 캐릭터는 나른한 게 매력이다. 나도 거기에 꽂힌 거고. 어쩌면 이 영화가 심심해 보인다는 말이 나에겐 칭찬일지도 모른다.”

류승범의 영화는 항상 캐릭터가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캐릭터의 성장이 드라마의 성장과 연결되는” 이야기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환, <피도 눈물도 없이>의 민수, <품행제로>의 중필, 드라마 <고독>의 영우, <사생결단>의 상도. 류승범은 언제나 영화가 던져준 상황 안에서 몸을 던져 과제를 해결하듯 인물을 만들어왔다. “캐릭터의 디테일, 연기에 대한 세밀한 상황들을 연구”하며 영화를 마주했다. 1999년 20살에 연기를 시작해 매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동반”되는 캐릭터를 만나 “정신없이 20대를 보냈다”. 하지만 로이드는 다르다. “외롭고, 어딘가 겉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PD란 직업에서 알 수 있듯 “한발 물러선 위치”의 이 남자는 류승범이 그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어떤 사건도 큰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온도 변화가 거의 없는” 인물. “24시간 배우인 척하거나 24시간 배우로 사는 건 싫다”고 내뱉던 류승범이 내심 바라고 있던, 여유를 품은 인간이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에 허상이 많다. 그게 예전엔 눈에 잘 안 보였는데 이제는 조금씩 보이고 느껴진다. 세상에 보여지는 이미지, 매스컴이 말하는 류승범. 진짜와 가짜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는 것 같다.”

류승범은 2006년 겨울 무렵 산을 찾았다. 일종의 영성프로그램을 하는 곳에서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디서 오셨습니까’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받았다. 모태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예전엔 단지 교회만 다녔”던 그는 2년여 전부터 “믿는 사람”이 되었고,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종교의 질문을 통해 진솔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코미디와 깊은 굴곡의 드라마 사이로 보이지 않았던 “인간 류승범”이 “배우 류승범”의 이미지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보였다. “배우를 하면서 배신하게 되는 기본적인 덕목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인간 류승범”에게 투자해야겠다고 다짐한 뒤다. 그는 <라듸오 데이즈> 제작보고회 자리에서 “갈수록 영화 홍보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고, 어느 인터뷰에선 “때로는 한국말을 못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고 털어놨다. 근래 <매트릭스>를 자주 보며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이 대중 앞에 서니 빈답으로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에게 있던 장막들이 싹 거둬졌으면 좋겠다.” 긴 머리와 조금 더 진해진 수염. 최근의 류승범은 확실히 과장된 웃음과 열기를 버렸다.

“새벽에 휴대폰 보면 그런 생각 들지 않나? 200명 넘게 저장되어 있는데 전화 한통 안 오고, 연락할 사람도 없고. 내가 이 사람들을 무슨 의미로 저장한 걸까. 나름 그룹을 정해서, 명단을 가려서 저장한 건데…. 그 순간 내가 딱 싫어지더라. 역겹고. 그래서 없애봤다.”

류승범은 최근 차를 팔았고, 집도 좁은 곳으로 옮겼다. 패션에 유독 관심이 많다고 알려졌지만 쇼핑도 줄였다. “별다른 의미없다. 그냥 불필요하니까 없앤 거다.” 예전엔 다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불필요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좋은 집, 멋진 차, 많은 옷들이 더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열심히, 꾸역꾸역 담기에 바빴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둘씩 버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시작한 다이어트도 “가벼워지고 싶어서”다. 뜨겁고 치열해서 터질 것 같았던 “배우 류승범”의 무게를 조금은 덜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 류승범의 삶을 대신 넓혔다. 2007년 겨울엔 클럽 블러에서 디제잉을 했고, 올해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해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아이다호>를 추천작으로 내놓았다. 영화 홍보가 끝나면 재즈댄스, 악기 하나, 영어를 배울 계획이다. “화장실에 가는 느낌”으로 그동안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비울 예정이다. “스스로 정화되고 건강해지는 느낌”이랄까.

휴식을 지나온 만큼 2008년의 류승범은 바빠질 거다. 김민희와 함께 출연하기로 결정된 영화 <민조이야기> 외에도 출연을 고려하고 있는 작품이 몇개 더 있다. “아침형 인간”으로, “하루를 꽉 차게, 학생처럼 움직이고 싶다”는 게 류승범의 새해 다짐. 예전처럼 화통한 웃음은 없지만 진솔한 질문에 솔직히 다가선 류승범, 그의 제2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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