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소설가 엔젤 데브럴(로몰라 가레이)이 사랑한 건 오직 자기 자신이다. 단 하나의 혈육인 어머니조차 있는 그대로 사랑한 적이 없으면서 운명적인 사랑을 소재로 삼고, 비루한 소도시에서 식료품집 딸로 태어나 영국을 벗어난 적도 없으면서 베니스를 배경으로 택하는 그녀는, 베갯머리에서 읽힌 뒤 바로 잊혀지는, 말하자면 하이틴 로맨스를 쓴다. 책을 읽은 적도 없고 현실에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이 상상의 세계에서만 글을 쓰는 엔젤은 자신의 저택 ‘파라다이스’를 세상의 유행과 전혀 무관한 빅토리아풍으로 꾸미고,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먼저 청혼하여 사랑을 쟁취하며, 온 세계가 자유수호의 대의를 내건 1차대전 와중에도 사랑하는 남편 에스메(마이클 파스빈더)를 앗아간 전쟁을 무조건 반대한다.
그런데 잠깐. 세계를 일주하는 엔젤 부부의 신혼여행을 고전적인 매트촬영으로 묘사하며 갑자기 타임머신에라도 올라탄 듯 시치미를 떼는 이 영화는 다름 아닌 오종의 신작이다. 한때 악취미로 무장한 천재로 불렸던, 그 프랑수아 오종 말이다. 일찍이 그가 파스빈더에게 경의를 표했고, 파스빈더는 더글러스 서크로부터 멜로드라마를 배웠음을 떠올릴 때, 오종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풍의 1930년대 영화를 고의로 베낄 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엔젤>의 원작은 20세기 초 실존했던 로맨스 작가 마리 코렐리의 생애를 다룬 1957년작 동명 소설이다. 능력 하나로 신분상승을 이뤘지만 변혁의 시대를 거치면서 잊혀진 여류작가의 초상을 통해 오종이 자신의 화두 중 하나인 ‘여성의 욕망’을 포착하려던 포석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포석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면, 또한 그처럼 ‘싱겁게’ 읽힌다면, 이건 문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장르를 패러디하는 오종 특유의 신경질적인 유머가 없다면, 화려한 의상에 둘러싸여 2시간 동안 공허하게 지속되는 단조로운 시대극”의 존재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굳이 따진다면, 짓궂은 신랄함의 부재라는 면에서 <엔젤>은 <사랑의 추억>에 이어 죽음을 고찰하며 희망을 덧붙인 <타임 투 리브>에 가까워 보인다. 아마도 오종 자신은 저마다의 욕망과 매력을 간직한 기이한 여성을 다룬 영화(<8명의 여인들> <스위밍 풀>) 곁에 <엔젤>을 놓고 싶었겠지만. 그러나, 파라다이스(천국)에 사는 엔젤(천사)이라니. 본심을 짐작할 수 없도록 지루한 순진함이 그가 원한 풍자의 결론이라고 믿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