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콘티의 영화에는 고립된 남자의 절망적인 외로움이 있다. 밝은 태양을 거부하고 마치 커다란 무덤 속에 갇힌 듯 그들은 스스로 어둡고 구석진 장소로 몸을 숨긴다. 젊은이는 알랭 들롱의 모습으로, 중년 이후는 버트 랭커스터의 모습으로 각인돼 있는 비스콘티의 남자들은 아무리 웃고 떠들고 있어도 운명 같은 쓸쓸함을 숨기지 못한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리도 허무한지, 그들은 당장 내일 죽을 듯 허무의 상념 속에 젖어드는 것이다.
‘위대한 고립’의 당당한 외로움
이런 데카당스 미학의 남자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보여준 거대 서사가 바로 <레오파드>(1963)이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배경으로, 시대의 변화에 역행하는 시칠리아의 어느 왕자(버트 랭커스터)의 삶을 다룬다. 세상은 부르주아가 주도권을 잡았고, 이런 변화에 맞춰 정치권력은 입헌공화국의 체제 속으로 재편성되는 중이다. 그런데 왕자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기득권을 쳐다보지도 않고, 스스로 격리된 어둠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왕권체제를 무너뜨린 부르주아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생각하는데, 이 왕자는 그들을 천박한 하이에나에 비유한다. 졸지에 벌어들인 돈으로 권력을 매수한 소인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기품을 잃지 않은 ‘표범(레오파드)’이라고 말한다. 극중에서 버트 랭커스터가 이 대사를 읊조릴 때, 많은 관객은 곧바로 루키노 비스콘티의 초상을 떠올렸다. 표류하는 시대의 이해관계에 초연한 듯 보이는 비스콘티의 ‘위대한 고립’이 랭커스터에 의해 탁월하게 표현됐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가 발표됐을 때 일부 관객은 비스콘티가 귀족의 거만한 이데올로기를 찬양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비스콘티가 영화의 원작인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동명소설에서 발견한 매력은 불리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고수하는 한 남자의 외로운 비장함이지 귀족적이고 반동적인 고상함은 결코 아니었다.
3시간짜리 영화의 마지막 1시간 동안 진행되는 춤추는 파티장면은 시대에 맞서는 이 늙은 노인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청춘의 생명들은 지칠 줄 모르고 춤을 추는 가운데, 혼자 남은 노인은 자신의 죽음이 곁에 다가왔음을 깨닫고 눈물짓는다. 파티가 끝난 새벽, 어두운 골목길 ‘저쪽’으로 혼자 걸어가는 랭커스터의 모습은 죽음에 대해 명상 중인 감독의 분신에 다름없다. <레오파드>로 랭커스터는 비스콘티의 영원한 분신으로 각인된다.
감독 데뷔 무렵, 통렬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냈던 코뮤니스트 비스콘티가 ‘죽음’이라는 테마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때가 바로 <레오파드>를 발표한 뒤부터다. 어느덧 그의 이름 앞에는 ‘좌파’ 혹은 ‘리얼리즘’ 대신에 ‘데카당스’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데카당스의 진면목을 보여준 게 이른바 ‘독일 삼부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이다. <저주 받은 자들>(1969)은 이중 첫 번째 작품이며, 뒤이어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루드비히>(1973)가 공개된다.
<저주 받은 자들>은 영어제목이고, 원래 제목은 <신들의 황혼>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중 마지막 작품의 제목에서 따왔다. 오페라처럼 신과 같은 인물들이 모두 파멸하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나치가 막 정권을 장악해가던 1930년대 초반 독일이다. 제철(製鐵) 재벌의 집안 파티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날 밤 후계자를 지목한 재벌 총수는 권력욕에 눈이 먼 며느리의 애인(더크 보가드)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된다. 그 애인은 살인하는 행위가 무서워 벌벌 떨고, 그 살인을 조종한 며느리(잉그리드 툴린)는 오히려 과감하다. 이들 뒤에는 새로 국가권력을 잡은 나치의 장교가 있다. 명백하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모티브를 이용하고 있는데, 결국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처럼 이들도 파멸할 것이다.
<저주 받은 자들>, 썩은 재벌로 비유된 이탈리아
이런 친족살해의 권력다툼도 잔인했는데, 더욱 도발적인 내용은 며느리의 아들(헬무트 버거), 곧 죽은 재벌의 손자에 의한 근친상간과 모친살해이다. 어린 손자는 얼떨결에 재벌의 계승자가 됐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그의 애인의 명령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점점 청년이 되어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치의 잔인한 기계로 변해간다. 이 집안, 곧 이들 세명의 가족이 보여주는 질병 같은 퇴폐와 부패가 이 드라마를 압도한다. 어머니는 애인과 사랑에 탐닉하고 있고, 아들은 그 관계를 질투하며 저주한다. 드디어 재벌의 권력을 모두 수중에 넣은 아들은 나치의 이름으로, 타락한 어머니를 처벌한다.
영화사에 영원히 남을 스캔들한 장면, 곧 아들은 어머니를 강간한 뒤, 그녀와 그녀의 애인에게 독약을 선물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다. 돈과 권력을 한손에 다 쥐고 있던 제철 재벌 집안이 한순간에 썩은 냄새를 풍기며 무너져 가는 것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전속 배우로 유명한 잉그리드 툴린과 신예 헬무트 버거가 보여준 충격적인 장면은 지금 봐도 놀랍고, 이탈리아의 동시대 문제를 나치와 결탁한 썩은 재벌의 세상으로 은유한 대목은 좌파 모럴리스트 비스콘티의 입장이 얼마나 단호한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비스콘티는 당시의 이탈리아 우파정부를 여전히 파시즘에 비유했다. 그가 <레오파드>를 발표하며 예술가로서 절정의 품격을 드러낼 때인 1963년이다. 이탈리아는 총선을 맞아 정치적 긴장이 한층 높았다. 좌파는 그동안 쌓아온 신뢰마저 잃고 나락으로 치달을 조짐을 보였다. 50년대 후반 일어난 옛 소련 정부의 헝가리혁명에 대한 강압적 진압과 스탈린 공포정치의 내막이 알려진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민중을 위한다는 정부가 그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선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좌파 유명인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우왕좌왕했다. 이때 루키노 비스콘티가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공산당에 투표하겠다. 이번 총선이 갖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파시즘에 승리한 지 이제 겨우 20년이 됐다. 이때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공산당에 투표하겠다. 나는 파시즘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스콘티는 이처럼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좌파지지 선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눈치만 보고 있을 때인데 말이다. 비스콘티는 불리할 때나 유리할 때나, 평생 좌파들의 친구이자 동료로 남았다. <레오파드>의 왕자가 그냥 탄생한 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리얼리즘부터 데카당스까지
비스콘티는 원래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으로 출발한 감독이다. 특히 <흔들리는 대지>(1948)는 피억압자의 계급의식을 고양하는 매우 정치적인 작품이다. 그의 정치적인 입장이 너무나 강렬한 때문인지 사실 <흔들리는 대지> 이후 비스콘티는 함께 일할 제작자를 만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비스콘티가 영화감독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큰 전환점을 마련한 작품이 바로 <벨리시마>(1951)이다. 제목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뜻하며, 영화에서는 아역배우 콘테스트의 우승자를 말한다. 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네오리얼리즘의 아이콘인 안나 마냐니가 주연을 맡았다. 비스콘티도 스타시스템의 유리함을 받아들인 것이다. <흔들리는 대지>의 경우 스타는커녕 단 한명의 전문배우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 한편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혹독한 경험을 한 비스콘티의 고민이 내재돼 있는 작품이다. 일종의 영화에 대한 영화인데, 화려하게 보이는 영화계가 사실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허무한 세상임을 그려내고 있다. 안나 마냐니는 파트타임 간호사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뿐인 예쁜 딸은 자기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 남들로부터 좀 존경도 받고, 먹는 걱정 덜하며 살게 하고 싶다.
그녀는 딸을 아역배우로 키울 참이다. 없는 돈에 연기과외, 발레과외까지 시킨다. 딸의 장래를 위해 어머니는 너무나 헌신적이다. 어느덧 이탈리아에도 미국영화가 압도적으로 수입되고,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할리우드영화들이 그녀의 비현실적인 꿈을 더욱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하워드 혹스의 <붉은 강>을 보며, 존 웨인이나 몽고메리 클리프트 같은 화려한 스타의 생활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꿈이 전혀 딸의 미래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향>(2006)에 삽입돼 다시 주목받기도 한 작품이다.
<백야>(1957)는 <벨리시마>에 비해 좀더 부드러워진 리얼리즘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원작을 각색했는데, 인공적으로 만든 세트, 물과 안개에 휩싸인 신비한 밤풍경, 그리고 쓸쓸한 분위기 등 마치 1930년대 프랑스의 시적리얼리즘 같은 영화다. 외로운 남자(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의 3박4일에 걸친 실연 이야기로, 남자는 우연히 만난 어느 순진한 여성(마리아 셀)을 사랑한다. 그녀는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기고 1년 전에 떠난 남자 하숙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여성은 처음과는 달리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마지막날 밤, 그 하숙인(장 마레)이 돌아오자, 여성은 며칠간의 감정은 순식간에 잊고 다시 옛 남자에게 돌아가고 만다. 매번 조연만 하던 마스트로이안니가 드디어 주연배우로 등장한 작품이고, 장 콕토의 애인이었던 조각처럼 잘생긴 남자 장 마레가 출연해 화제가 됐다.
이런 리얼리즘 계열 작품의 절정이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이다. 비스콘티가 좋아했던 토마스 만의 소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제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남북문제(경제적 격차)를 배경으로, 남부 출신의 가난한 가족들이 밀라노라는 북부의 대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그린 멜로드라마다. 소설이 이스라엘과 아랍의 다른 문화를 비교하듯, 영화도 남쪽과 북쪽의 문화적 차이를 드러낸다.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 형제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하는 게 권투다. 로코(알랭 들롱)와 그의 형 시모네(레나토 살바토리)가 보여준 권투의 아름다움이 눈부시게 담겨 있기도 하다. 밀라노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를 흘리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도 이탈리아인들은 눈물을 쏟는다. 이들 대부분은 로코처럼 고향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전투하듯 살아오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혼자 죽어가는 고립된 사람들
이번 특별전의 작품들은 우연히도 리얼리즘 계열 작품 셋, 데카당스 계열 작품 셋으로 구성돼 있는데, <가족의 초상>(1974)은 말년에 발표된 대표적인 데카당스 작품이다. 노인이 된 비스콘티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처럼 자전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압도한다. <레오파드>를 통해 이미 비스콘티의 분신 역할을 연기했던 버트 랭커스터가 이번에도 감독의 분신으로 나온다. 그는 은퇴한 교수로 넓은 아파트에 하녀와 단둘이 산다. 한눈에 봐도 노인의 무력감과 고독감이 건물 내부를 지배하고 있다. 혼자 사는 교수의 방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족초상화들이 빽빽이 걸려 있다.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이곳에 하숙인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귀부인(실바나 망가노), 젊은 여자와 남자 둘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젊은 남자 중 금발(헬무트 버거, 비스콘티의 애인이었던 버거는 이 영화를 찍은 뒤 비스콘티와 헤어졌다)은 아들이 아니라 귀부인의 애인이다. 교수는 당황한다. 점잖은 부인이 새파란 젊은이를 애인으로 두고 있고, 딸은 자유롭다 못해 방종에 가까운 성적 취향을 보인다. 당장에 이들을 쫓아내고 싶다. 복층 아파트의 위층을 이들이 사용하는데, 이들의 실내는 현대식으로 장식돼 있고, 교수의 방은 바로크식으로 장식돼 있는 사실에서도 두 세계의 이질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죽음을 앞둔 고립된 노인이 도무지 섞일 것 같지 않은 다른 문화의 사람들로부터 역설적이게도 가족의 관계를 느껴가기 시작한다. 평생 독신이었으며, 실제로 로마에서 혼자 살던 노인 비스콘티의 외로움이 저절로 연상되는 설정이었다.
비스콘티는 17편의 장·단편을 발표했다. 12월 7일부터 16일까지 필름포럼에서 열리는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에서는 <레오파드> 등의 6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6편의 작품으로 그의 ‘특별전’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좀 모자라 보인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최근 이런저런 영화제를 통해 볼 수 있었으니 그렇다고 치고, 비스콘티의 작품세계를 알기에는 필수작인 <센소>(1954)와 <루드비히>가 빠진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