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마말레이드님(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눈을 부릅뜨면님(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이동진: <베오울프>는 <반지의 제왕>의 깊이에 가장 근접한 판타지영화에요. 김혜리: 10대 남성영화 같기도 했지만 스토리와 캐릭터가 예상보다 훨씬 볼만 했어요.
마말레이드님의 말(이하 마말): 눈 부릅뜨고 자나보다. 아이, 무셔라.
눈을 부릅뜨면님의 말(이하 부릅): 아니 뭐, 재패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이 마침 개봉하기에 직업적 습관을 반영해 지어봤습니다. -_-# 오늘은 <베오울프> <스카우트> <세븐데이즈> <이브닝> 순서로 이야기를 해보죠. 먼저 선배가 평소 신화에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아는데 <베오울프>의 설화에 대한 발제부터 부탁드립니다. 늑대인간과 혼동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마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원작인 6세기의 서사시 내용을 대체적으로 따랐는데 영화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변주를 했더군요. 바로 그 지점이 영화의 스토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었죠.
부릅: 원래는 영웅 베오울프가 위기에 처한 호르트가드의 왕국을 괴물 그렌델과 그 어미로부터 구하고 왕이 된다. 그리고 50년 뒤 용도 무찌른다. 이런 직선적 무용담이죠?
마말: :그런데 영화에선 그렌델이 호르트가드왕(앤서니 홉킨스)과 물의 마녀(안젤리나 졸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정을 넣었고 마녀를 죽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죠.
부릅: 그리고 다시 마녀는, 아들을 빼앗아간 베오울프(레이 윈스턴)로부터 새로운 아들을 얻죠. 이런 순환이 반복되며 권력과 부를 미끼로 왕들을 유혹합니다. *.*
마말: ‘가족’영화로 변주한 고대 영웅담이랄까.^.~
부릅: 오랜 신화를 상당히 현대화, 세련화한 셈이군요. 인간의 근본적 결함, 권력자가 짊어지고 가는 원죄에 대한 그럴싸한 은유가 됐으니까요.
마말: 신화적인 측면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살부(殺父)의 모티브 대신 ‘살자’(殺子, 이거 말이 되나요? -.-)의 모티브가 쓰였다는 거죠. 신화도 그렇고, 신화를 차용한 영화도 그렇고 ‘아버지 죽이기’의 모티브는 상당히 많이 등장하지만, ‘아들 죽이기’의 모티브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베오울프>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차마 죽이지 못하는 대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고통에 찬 자신의 업을 완성하죠.
부릅: <베오울프>에서 ‘아들’은 말하자면 아버지가 과거에 저지른 오류와 어리석음의 알레고리예요. 네가 누구냐는 베오울프의 물음에 용은 “네가 과거에 남기고 온 것”이라고 말하잖아요.
마말: 그렇죠. 그 모티브만 가지고도 한참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제 오늘 대화명이 바로 거기서 왔습죠. 오늘 이야기할 영화의 대부분이 과거 자신의 삶을 회한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들이잖아요? 저는 그런 주제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마말레이드의 70년대 히트곡 <리플렉션스 오브 마이 라이프>가 생각나서리….^0^ (눈을 부릅뜨면님이 대화창을 흔들었습니다.)
마말: 아니 왜 흔드세요? *.* 따블로 저를 피박시키실 건가요? +_+
부릅: 끄덕거린 건데…. 죄송. -_-# 예고편을 보고 애니메이션이냐 실사냐 헷갈린 관객도 있을 텐데요. 기술적인 면에서도 <베오울프>는 퍼포먼스 캡처 기술의 원조인 <폴라 익스프레스>로부터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마말: 애니메이션인지 실사인지 혼동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영화사도 민감한 듯하더군요.
부릅: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보일까봐요?
마말: 그렇죠. 보도자료에 이 영화의 장르를 뭐라고 부를 것인가를 한참 기술해놓았더라고요. 영화사의 주장은 제3의 장르라는 거죠. ^^
부릅: 퍼포먼스 캡처가 미래영화의 청사진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장르 하나를 개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마말: 맞아요. 가야 할 길이라는 게 아니라 가고 있는 길 중 하나라는 거죠. 사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90년대 이후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 사이를, 바늘땀이 보이지 않게 기워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잖아요? 바로 그 지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결과를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죠.
부릅: 퍼포먼스 캡처는 아예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화학적 융합이죠. 배우가 연기를 한 다음에야 촬영이 비로소 시작되는, 말하자면 후반작업에 중심을 둔 디지털영화 만들기의 현재 극단이고요.
마말: 예전부터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가 야심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니 확실한 것 같더라고요. 아예 매체의 역사를 새로 쓰는 일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는 듯. ^^
부릅: 루카스, 저메키스, 어째 이름들도 과학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_+
마말: 게다가 이름도 로봇이잖아. 로버트. ^^
부릅: T-T 헉, 제가 틈을 보였나봅니다.
마말: 아주 어릴 때 전 로버트 테일러가 로봇인 줄 알았어요. 이거 진짜야. 밝히면 창피하지만…. -..-
부릅: +_+ 퍼포먼스 캡처라는 테크놀로지가 관객에게 발휘하는 즉각적 효과가 무엇일까 짐작해봤습니다. 먼저 <베오울프>의 영상은, 이야기 평면의 현실감 자체를 희석시켜요. 만약 실사로 인간이 이처럼 사지를 찢는 폭력을 연기하고 전신 누드를 보여준다면 지금처럼 미국의 PG-13등급이나 한국의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지 못했겠죠. 안전하게, 고도의 자극을 제공하는 셈이죠.
마말: 저는 이 기술이 적어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미래에는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봐요. 작게만 생각해도 액션과 러브신에서 무한한 활용가치가 있죠. 미래엔 할리우드 스타가 등장하는 포르노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특급 스타는 용납하지 않겠지만 2급 스타 정도라면 자신이 직접 포르노를 찍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적당한 연기로 자료를 제공한 뒤 용인하는 형식으로 출연할 수 있다는 거죠.
부릅: 몸만 빌려주는 배우, 연기만 제공하는 배우도 생기겠죠. 그 점과 관련해 퍼포먼스 캡처가 제기하는 중대한 의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방식의 영화는, 궁극적으로 영화를 현실과 유리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봐요. 실사영화는 아무리 오락영화라도 우리에게 현실 혹은 대안적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때문에, 영화에서 행해지는 인간 행위가 빚는 결과의 무게를 잊긴 어려워요. 예컨대 사람 팔이 떨어지면 그 고통을 반사적으로 상상한다는 거죠. 그러나 퍼포먼스 캡처 영화라면 얘기가 다르죠.
마말: 그건 1995년에 최초의 디지털 장편영화 <토이 스토리>가 나올 때부터 제기된 문제였을 거예요. 현실의 관객은 어두운 욕망을 영화에서 충족시킬 때 확실히 일종의‘심리적인 명분’을 원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서 폭력의 쾌감을 만끽하고 싶은데 그 대상이 실제의 사람이라면 저항감이 생기죠.
부릅: 그렇죠. 그게 영화가 지닌 마지노선 같은 것이고요.
마말: 그런데 <스타쉽 트루퍼스> 같은 영화를 보면 폭력과 살육의 대상을 곤충 같은 거대한 괴물의 모습으로 상정함으로써 맘껏 죽이고 찌르는 쾌감을 즐겨도 괜찮을 거라는 ‘명분’을 주잖아요. 미래에는 그런 대상이 이제 인간의 형상을 한 디지털 캐릭터로 대체될 수 있다는 거죠. 분명히 윤리적인 논란을 미래에 낳을 수 있는 기술이에요.
부릅: 한마디 보태자면, <베오울프>에서는 퍼포먼스 캡처에 힘입은 누드, 폭력 등 노골적 표현이 오락성뿐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한 부분이 있어요. 예컨대 늙은 베오울프 왕이 용과 벌이는 사투에서, 자기 팔을 칼로 끊어내고 아들인 용의 심장을 쥐어뜯어야만 업이 해소되는 내용은 실사로는 그만큼 선연히 표현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마말: 그렇네요. 이 영화가 완전히 성인용이라는 사실도 인상적이었어요.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이라거나 할리우드의 경우 최소한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다는 통념이 있는데 그 관념에서 완전히 탈피했죠. <사우스파크> 같은 지독한 애니메이션도 최소한 캐릭터의 모습을 아이로 그려내잖아요. ^^
부릅: 15세 관람가라고 수입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 선정적 농담과 액션으로 빚어진 <베오울프>의 초반은 완전히 10대 남성 영화로 보이더군요. 마치 WWF 프로레슬링 선수들의 기싸움 같았어요. 만나자마자 첫인사가 “내가 널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혀라!”잖아요. 참 예의 바르기도 하지. -..-
마말: ^^ 처음엔 ‘이거, 왜들 이러시나’ 싶기도 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니 전반부의 그런 마초적이고 유아적인 묘사들까지 다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기본적으로 기대보다 훨씬 흥미롭게 이 영화를 봤어요. <반지의 제왕> 이후 허다하게 많은 판타지영화가 나왔는데 그 양감과 질감과 깊이에서 <반지의 제왕> 성과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토퍼 램버트 주연의 <전사 베오울프> 같은 영화와는 비교도 안 되죠.
부릅: 실은 <베오울프>의 스토리와 캐릭터는 예상보다 훨씬 볼 만해서 오히려 스펙터클 감상용인 3D 아이맥스로 구경하면 집중에 방해가 될 것도 같아요. ^^; <베오울프>는 컴퓨터로 이미지를 가필하고 배경을 그려넣어 새로운 비주얼을 만들어낸 <300>과 비교도 해볼 만하죠. 아무래도 인간적인 동일시는 실사인 <300>이 쉽겠지만. 이야기는 이쪽이 한수 위라고 해야겠죠?
마말: 기술적으로 혁신적인 측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깊이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베오울프>가 보여줬으니, <300>이 좀더 볼품없게 느껴지더라고요.
부릅: <베오울프>를 보면서 약간 현기증을 느꼈는데요. 보통 영화는 흔히 설정 숏으로 시작해 쪼개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세부에서 시작해서 인물이나 소품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카메라가 돌더군요. 그래서 전체 공간의 넓이와 인물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든 대신, 동세가 강했어요. 물론 이런 형식엔 3D 버전에 대한 고려가 한층 깔려 있겠죠?
마말: 3D 상영을 고려한 카메라 움직임이 많긴 했죠. 그래도 액션의 디테일이나 상상력이 상당히 훌륭했어요.
부릅: 그나저나 왜 베오울프는 싸울 때마다 홀랑 벗는지? 전설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아님 애니메이터 수고를 덜어주려는 건지 궁금했답니다. -_-괴물 그렌델도 성기가 없다고 베오울프가 꼭 집어 지적하고 말이죠. -_-#
마말: 성기 없는 괴물 그렌델과 다 벗고서 여차하면 성기가 보일 것 같은 베오울프가 싸우는데 그걸 보면서, ‘저거 다 나오면 어쩌나’ 싶어서 조마조마한 나는 뭐냐고요. -.- 어차피 안 그리면 안 나오는 게 애니메이션인 걸 뻔히 알면서, 참. 괴물 그렌델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였어요. 거의 햄릿 같더라고요.
부릅: 디자인도 독특하죠. <할로우맨>에서 피부가 안 씌워진 단계의 투명인간 같기도 하고. 말투는 자자 빙크스에, 행동은 골룸. ^_^
마말: 그나저나 저는 2007년이 21세기 들어서 할리우드에 가장 중요한 한해가 될 것 같아요. <300>이나 <트랜스포머> <베오울프>처럼 테크놀로지 측면에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칠 작품들이 연이어 나온 한편, <본 얼티메이텀>이나 <다이하드4.0>처럼 영화의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기술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작품들도 나왔으니 흡사 백가쟁명(百家爭鳴) 같다는 거죠. 앗, 또 사자성어. 자나깨나 논술. ^^
부릅: <300>이 테크놀로지 면에서 전환점이 될 만하다고까지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국내 반응만 봐도 분명 이른바 “전대미문의 신기한 비주얼”에 대한 열광은 강력했죠. 그래서 <베오울프>에 대한 반응이 더욱 궁금하고요.
마말: <300>이나 <트랜스포머>는 전세계적으로 흥행했지만 특히 한국에서 좀더 성공을 거뒀죠. 관객의 평가도 특히 더 좋았고요.
부릅: ‘첨단’과 부가가치 높은 기술에 대한 열광이 유난히 강하죠.
마말: 돈 되는 기획이 결국 돈을 크게 버는 것을 볼 때 일종의 대리만족 같은 심리도 생기는 것 같고요. 좀 이상한 일이죠.
부릅: 요컨대 <베오울프>의 퍼포먼스 캡처가 미래영화의 주류적 형식이 될 거라고 예상하는 건 섣부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캡처를 정교하게 한들, 실제 인간과 자연이 지닌 영화적 아름다움과는 겨룰 수 없겠죠. 단, 앞으로 영화시장이 <베오울프>식의 3D 상영이 가능한 이벤트영화와 아트하우스영화로 양극화할 가능성은 상상하게 되더군요. 그 중간 영역은 지금 약진하고 있는 TV드라마들이 흡수하고 말이죠.
마말: 뭐, 일단은 ‘할리우드 액션블록버스터 장르’에 그 직접적 영향을 국한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