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는 아홉살이 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존 부어맨의 <서바이벌 게임>을 봤다. 아홉살에 그 영화를 본다고 누구나 타란티노가 되는 건 아니지만, 타란티노가 아홉살에 그 영화를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악동 역시 태어나지 못했을 거다(혹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잘 알려진 걸작 <서바이벌 게임>이 부어맨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는 사실 거장이라는 멋들어진 칭호를 화려하게 받아본 적은 없는 남자고, 특정한 영화적 경향이나 지리적 특징으로 묶어서 읽기도 난감하다.
물론 그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는 존재한다. 자연과 인간의 투쟁, 현대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미국의 신화에 대한 철저한 해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한번도 포기해본 적이 없는 현재진행형의 작가라는 사실이다. <포인트 블랭크>(1967), <서바이벌 게임>(1972) 같은 걸작들을 낳으며 전도유망하게 할리우드에 진출한 부어맨은 <자도즈>(1974)와 <엑소시스트2>(1977)의 당연한 비평적, 흥행적 실패로 매장당했으나 <엑스칼리버>(1981)와 <희망과 영광>(1987)으로 재기했고, <마음이 있는 곳>(Where The Heart Is, 1990)과 <비욘드 랭군>(1995)으로 힘없이 내려앉은 다음에는 <제너럴>(1998)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1933년생인 이 늙은 감독은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인류학적인 집요함을 거둘 생각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다.
아쉽게도 존 부어맨은 한국에 오지 않는다. 오는 10월25일부터 11월2일까지 열리는 ‘충무로영화제’의 회고전과 마스터즈 프로그램에 참석하려던 그는 신작 촬영 스케줄 변동으로 막판에 방한을 취소했다. 물론 <포인트 블랭크> <태평양의 지옥> <서바이벌 게임> <엑스칼리버> 등 그의 지난 걸작들을 필름으로 감식할 기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얼굴을 맞대고 역사를 증언받을 수 없다는 건 꽤나 아쉬운 노릇이다. 서면으로 서른개 남짓한 질문지를 급하게 보냈더니, 바로 다음날 “만약 그 질문들에 모두 다 답을 한다면 또 다른 책을 한권 더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넉살과 콕 찍어서 작성한 사려 깊은 답변 몇개가 날아왔다. 또 다른 책을 쓸 만큼의 답변이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한국에서 회고전을 개최하게 되는 소감은 어떤가. =직접 영화제에 참가해 얼굴을 마주보며 인터뷰를 하지 못하는게 정말 아쉽다. 하지만 충무로영화제에서 내 회고전이 열린다는 사실에는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 사실 지난 50년대 한국전쟁에 징집된 이후로 한국이란 국가에 큰 흥미를 가져왔다. 직접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내가 맡은 직책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 전쟁의 기원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후 발전과정, 그것이 어떻게 한국영화에 표현되는지를 그간 흥미롭게 지켜봐왔다. 그래서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게 더 비통하다.
-<BBC>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영화계에 뛰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이야기를 조금 해줄 수 있나. =1955년 편집 어시스턴트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냉전이 한창이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핵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매우 허무주의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60년대 초 <BBC>를 위해 인물 관련 다큐멘터리들을 만들면서 나는 영국사회가 점점 헤도니스틱(?)한 방향으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더이상은 핵미사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국인들 역시 (나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여지는) 자신들의 변화된 모습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결과적으로 내 다큐멘터리들 역시 유명세를 얻었다. 내가 극영화을 연출할 기회를 잡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당신의 영화들에는 공통적으로 신화적인 테마들이 있다. 특히 아서왕 전설에 대한 당신의 집념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첫 번째 연출작인 <Catch Us if You Can>(1965)의 영화적인 구조에서도 아서왕 전설을 읽을 수 있을 거다. 사실 아서왕 전설은 나의 모든 영화들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런던 대공습 시절을 배경으로 한 <희망과 영광>은 나의 유년기에 대한 자전적 영화로, 주인공 소년은 극중에서 마법사 멀린과 아서왕의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와 사랑에 빠졌던 내 엄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왜 아서, 귀네비아, 랜슬롯의 삼각관계에 그토록 매력을 느끼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다.
-<서바이벌 게임> <태평양의 지옥> <에메랄드 포레스트> 등 대부분의 당신 영화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격전을 다루고 있다. 왜 당신은 이 같은 주제에 그토록 매달리나. =인간과 자연 사이의 투쟁, 그것 역시 유년 시절로부터 기인한다. 전쟁이 포효하고 폭탄이 떨어지고 화약이 작렬했던 그 시절에는 생존이야말로 가장 원대한 목표였다. 그저 살아남는 것 말이다. 이후에 내 가족은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했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템스강 어귀의 전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 탓에 나는 자연이 위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복수를 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서바이벌 게임>은 그것을 표현한 영화다.
-70년대에는 <반지의 제왕>의 영화화를 추진하다가 좌절하고 말았다. 뭐가 가장 큰 문제였나. 피터 잭슨의 영화에는 만족하나. =<반지의 제왕>은 아서왕 전설과 스칸디바니아 전설 등이 혼합된 책이라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당시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와 함께 여러 달 동안 각본을 작업했다. 그러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는 <반지의 제왕>이 지나치게 비싼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CGI도 없었으니까. 비록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결정에 대단히 실망하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게 기쁘다. 내가 먼저 손을 댔더라면 피터 잭슨이 현대영화의 위대한 걸작 중 하나를 절대 만들 수 없었을 테니까.
-<엑스칼리버>는 지금 다시 보아도 영상의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영화를 위한 가장 적절한 효과와 로케이션을 찾는 데 본능적인 재능을 지닌 것 같다. =<엑스칼리버>는 CGI가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며, <반지의 제왕>을 기획하면서 조사해놓았던 모든 구식 특수효과 기법을 사용했다. 모든 특수효과들은 실제로 카메라 앞에서 만들어진 ‘진짜’다. 또 <엑소시스트2>(1977)를 만들면서 알버트 위틀록에게서 많은 구식 특수효과 기법들을 배웠다. CGI는 현대 관객을 냉소적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사람들은 “그건 컴퓨터로 만든 거죠”라고 쉽게들 말한다. 거의 본능적으로 속았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영화는 냉랭하게도 점점 더 애니메이션에 가까워지고 있다.
-에메랄드 숲은 지금도 끝없이 파괴되고 있으며 인류는 그로 인한 재난들로 고통받고 있다. 환경주의자로서 당신은 현존하는 지구의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에메랄드 포레스트>(1985)는 아마존 우림을 구호하자는 나의 청원이었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간 수천 그루의 나무들을 심어왔고 그들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왔다. 나는 오랫동안 인간이 자연에 침입해서 저지른 파괴행위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자연이 원하기만 한다면 인간이라는 기생충들을 얼마든지 뿌리쳐버릴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또다시 <서바이벌 게임>의 은유에 도달한다. 우리는 과연 현재를 바꿀 만한 의지가 있는가? 우리가 직면한 모든 거대한 문제들에 답변하기 위해서 나의 후기 영화들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변해간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장편소설인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영화화한다고 들었다. 이 작품은 로마제국의 오현제 중 한명인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회상을 담고 있는 소설 아닌가. 그의 삶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주인공인 하드리아누는 조화(調和), 발언의 자유, 종교, 행복의 추구를 기반으로 한 제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던 몽상가였다. 그중에서도 그는 특별히 조화로 이루어진 사회를 염원했다. 영화는 그의 목표가 어떻게 현실 정치나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인간의 본능과 격돌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세상은 그때로부터 변한 것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