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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먼저 만나요
2001-10-31

<고양이를 부탁해>의 포스터 사진 이재용, 디자인 이관용

이관용 <고양이를 부탁해>의 디자인

이 영화는 참 이상한 영화다. 가뜩이나 경계가 불분명한 나의 일에 ‘장소 섭외’까지 천연덕스럽게 끼워놓았다. 그런데도 난 별 군말이 없다. 이것 저것 쌓이고 쌓여 끝이 보이지 않는 일도 언젠가는 끝이 날 걸 알고 있어설까? ‘디자이너’라고 명함에 박힌 고상한 이름씨 뒤엔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일이 있다. 특히 잔손이 가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그 대표적인 일이 자막처리다. 외국으로 나가는 작품들은 특히 자막에 공을 들인다. 외국인들이 우리말 자막을 읽을 리 없다. 그렇지만 손님에게 대접하는 심정으로 한자 한자 예쁘게(?) 새겨 넣는다.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을 <고양이…>에 다 쏟아부었다. 처음에 감독은, “아이들이 주고받는 휴대폰 문자를 화면에 띄우는 게 어때?” 하고 운만 띄웠다. 실력을 발휘할 때라 생각했다. 사용되는 이모티콘(emoticon)과 최대한 비슷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몇번을 다시 쓰고 지웠다. 문자가 들어갈 부분을 두고 감독과 여러 번 상의했다. 드디어 말간 버스 창 너머로 글자들이 떠오른다. 태희가 톡톡톡 타자기를 두드리는 장면에선 아래 화면에 글자들이 퐁퐁퐁 솟는다. 두개의 같은 문장이 거울에 반사된 모양으로 떠오르는 것도 이 몸의 아이디어(음하하).

이재용 <고양이를 부탁해>의 포스터<고양이를 부탁해>의 포스터를 찍기로 하고선 제일 먼저 한 일은 시나리오 읽기. 대체로 시나리오를 읽다보면 영감이 떠오른다. 대사보단 지문 같은 데 밑줄 쳐놓고 꼼꼼히 반복해서 입 속으로 굴리다보면 ‘아! 얜 이런 애구나’ 감이 온다. <고양이…>의 경우엔 여자애들이 밤중에 소복 입고 옥상에 올라가 입에 칼을 문 채 미래의 남편을 보려 했던 장면이 내내 떠올랐다. 엉뚱하고 귀엽고, 그러면서도 예민한 작은 마녀들 같았다. 그 생각은 그대로 포스터로 이어져, 감추어진 듯한 그들의 세상에서 작은 사건들을 끊임없이 모의하는 마녀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주요 색감은 붉은 톤과 노란 톤이었지만, 배우들에게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혀 전체적으로 퀼트 같은 느낌을 주게 했다. 따뜻하고 밝지만, 결코 한 가지 색깔일 수 없는 스무살 여자애들은 아마 퀼트 같은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 영화를 보고 와선, 영화는 어두운데, 포스터는 너무 밝은 게 아니냐고, 또 영화 속 아이들은 새파랗게 얼어붙어 있고, 때론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데, 포스터 속 아이들은 잘 닦아놓은 보석처럼 반짝반짝하다고 얘기하면, 그게 스무살이고 또 그게 고양이의 모습이라고 대답한다.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는 아이들. 그게 바로 고양이 같은 태희와 지영과 혜주가 아닐까.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freechal.com

이관용

1972년생.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90학번

<아라비아 로렌스> <나라야마 부시코> <로리타> 등의 외화 포스터 제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킬리만자로> <해변으로 가다> <하루> <고양이를 부탁해> 디자인 담당

현재 <복수는 나의 것> <화산고> 디자인 활동중

나 스무살 때: 만화서클 <네모라미>에서 박명천(CF감독), 홍승우(<비빔툰> 작가), 이우일(<우일우화> 작가) 등과 작품활동중

이재용

1970년생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90학번

97∼99 프랑스와 벨기에 등지에서 사진전을 열며, 순수사진 활동에 매진

이관용의 제안으로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 합류

<무사> <봄날은 간다>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 사진

현재 <복수는 나의 것> 촬영중

나 스무살 때: 이과생이었던 까닭에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