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의 세계대전, 현대의 비합리성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 나치즘, 분단과 통일과 그로 인한 후유증까지 이어지는 냉전과 탈냉전의 상처…. 이 정도면 서구사회가 걸어온 근현대의 모든 그늘이 독일에 집중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10월10일부터 14일까지 필름포럼에서 열리는 ‘독일 다큐멘터리 특별전: 과거를 바라보며’의 의도는 그 이름만큼 명확하다. 지구 반대편의 동시대 관객으로서는 교과서와 신문에서 간간이 접했던 그들의 육성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며, 그들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로서는 영화가 역사와 시대를 이야기하는 방법의 다양성과 가능성에 대한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주한독일문화원과 필름포럼 등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올해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같은 제목으로 상영된 특별전을 고스란히 옮겨온 결과물. 대부분 2000년 이후 만들어진 총 10편의 영화가 세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관객을 만난다. 각각의 섹션을 연대별로 살피자면, 나치즘과 2차대전 자체에 대한 ‘전쟁의 기억과 기록’, 2차대전 이후 분단독일을 고찰한 ‘동서 독일 전후사를 다시 묻다’,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구동독의 기억을 묻는 ‘동독의 흔적’으로 나열할 수 있다.
개막작인 <장벽>(1989∼90, 위르겐 뵈처)은 베를린 장벽 마지막 나날의 풍경을 명상한다. 기록이 아닌 명상? 그렇다. 여전히 베를린 전역 기념품 가게를 장식하고 있는 베를린 장벽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 모여든 ‘장벽 딱따구리’ 등 장벽 주변의 다양한 인물군의 모습을 비롯하여 장벽 이전의 모습 등 흥미로운 기록 영상까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각종 다큐멘터리영화상을 수상한 수작이라고. 역사에 대한 ‘영화적 고찰’로 따지자면, <영원한 아름다움>(2003, 마르셀 슈베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독일, 2차대전 당시의 이른바 ‘나치영화’의 은밀한 매력과 치명적인 미학을 명쾌하게 해설한 슈베린 감독은 정치학과 사회학, 사진학을 공부한 바 있다. 직접 만나면 한없이 평온하고 친절한 독일인이 두번의 세계대전과 나치즘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가장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독일인에게 민족성이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민감한 주제다. 독일인 대부분이 나치즘에 기꺼이 합류했다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과거를 반추하는 <겨울 아이들>(2005, 옌스 산체)은 그 민감한 소재를 조심스럽게 들춰낸다. ‘독일인의 절반은 자신의 가족이 나치즘에 반대했다고 믿는다’는 2002년 여론조사 결과에서 시작된 이 영화의 감독은 1971년생이며 주인공은 70살 노파다. 우리로서는 과거 청산의 모범처럼 여겨지는 그들에게도 과거를 덮고 싶은 무의식이 있으며, 뿌리깊은 무의식까지 청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반드시 이뤄져야 할 과제임이 일상적인 화법을 통해 밝혀진다. 구동독 정치수감자 4인의 가족들의 현재를 담담하게 추적한 <누구나 타인에 대해 침묵한다>(2006, 마크 바우더·되르테 프랑케)는 독일인의 그러한 무의식을 좀더 집요하게 언급한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혹은 과거를 알아서 뭘 어쩌겠냐는 서로 다른 이유로 자신들에게 중요한 과거에 냉담한 3세대의 모습은 전세계에 만연한 위험한 역사인식의 단면을 혼란스럽게 드러낸다. 모든 영화가 이처럼 음울한 것은 아니다. 서독에 비해 월등하게 ‘진보적’이었던 동독인의 성문화를 보여주는 <동독인의 성생활>(2006, 안드레 마이어)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으며, 동독의 국가안보원이었고,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을 이끌었으며, 유대인과 흑인 프랑스 여인을 사랑했고, 서독 극우파 테러리스트의 사상적 지도자였던 인물의 행적을 쫓는 <반역자>(2006, 얀 페터)처럼 모순투성이의 인물을 내세운 영화들도 눈에 띈다. 영화제 기간 중에는 <장벽>을 비롯한 상영작 5편의 감독들이 한국을 찾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텍스트보다 컨텍스트에 대한 호기심이 만연할 법한 상영작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질문을 던지고 진솔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행사의 영문 제목은 ‘Facing the Past’. 베를린 곳곳에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각종 기념비가 눈에 띈다. 과거를 단지 바라보는 것이라면 눈에 보이는 기념비로도 충분하겠지만, 마주하기(facing)는 그처럼 간단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열편의 다큐멘터리들이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근대사를 완성하는 것도 요원해 보이는 우리로서는, 이런 기회가 이제야 생겼다는 것조차 의아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