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희망의 싹마저 스러지는 날
KBS 독립영화관 1 <망종> 9월23(일) 밤12시30분 | KBS1 | 감독 장률 | 출연 류연희, 김 박, 주광현
보리를 베고 벼를 심어야 하는 계절, 씨뿌리기 좋은 시간. ‘망종’은 어쨌든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다. 지난 계절의 수확이 아무리 형편없을지라도, 다시 한번 생명을 간절히 기다리는 때, 그러니까 절망의 끝에서일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런 때. 하지만 장률 감독의 <망종>은 끝까지 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절망 끝에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현실은 그렇게 무자비하다. 최순희는 중국의 작은 마을, 거리 한 모퉁이에서 김치를 파는 조선족 여인이다. 감옥에 있는 남편 때문에 고향을 떠난 뒤, 그녀는 타지에서 아들 창호와 가난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그녀 주위를 맴돌던 조선족 김씨는 순희와의 관계가 아내에게 들키자, 그녀를 창녀라고 둘러댄다. 순희는 김씨의 아내에 의해 공안국에 고발되고, 그동안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던 공안원 왕씨는 본심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불행의 시작이었을 뿐, 집으로 돌아온 순희는 더 큰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
<망종>의 순희는 삶이 한 여인에게 줄 수 있을 거의 모든 비극을 홀로 떠안은 자이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군데에서도 빛은 들어오지 않는다. 이 가난한 조선족 여인은 홀로 아들을 책임져야 하며,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고 결국에는 농락하는 남자들을 견뎌야 한다. 이처럼 벼랑 끝에 서 있는 여자가 끝까지 삶을 버티는 길은 차가운 돌처럼 더러운 순간들을 받아들이며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순희의 무표정한 얼굴은 감정을 잃은 듯, 좀체 울지 않는다. 영화 역시 그녀의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밀착하거나 신을 잘게 나누어 극적이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조립하지 않는다. 순희가 자기 앞에 불어닥친 시련 앞에서 부서져가는 자신의 영혼과 몸을 응시하면서도 쉽게 움직이려고 하지 않듯, 카메라도 언제나 멀찍이 떨어져 그녀를 지켜볼 뿐이다. 우리는 이 침묵하는 영화의 시간과 무거운 그녀의 뒷모습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창호가 순희에게 “우리는 언제 고향에 돌아가나요?”라고 물은 뒤, “그러면 언제 다시 여기로 돌아오죠?”라고 말할 때, 영화는 끈질긴 삶의 쳇바퀴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설사 그녀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김치에 독을 타서 이 삶에 복수를 감행하는 순희의 마지막 선택은 잔혹하기보다는 처절하게 슬프다. 모든 것을 잃은 순간, 그녀는 다시 시작하려고 결연하게 다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끝까지 버티고자 했던 벼랑 끝에서 하염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닫히기 전, 정처없이 앞으로, 마치 꿈속의 길을 걷듯 휩쓸려가는 순희. 카메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감정에 동요되어 흔들린다. 그녀는 현실의 다른 어딘가에서 희망과 위안을 찾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 아예 이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 삶의 끈을 놓아버린 자의 몽롱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체념의 형상화는 보는 이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길 위의 남자, 어디로 가는가
<브로큰 플라워> 9월23일(일) 오후 2시 20분 | EBS | 감독 짐 자무시 | 출연 빌 머레이, 샤론 스톤, 제시카 랭
어느 날, 당신에게 들려온 난데없는 소식. 사실, 당신에게는 숨겨진 아들이 있답니다. 이 난감한 소식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무엇일까? 화려한 시절은 가버린 지 오래고 당신에게 남은 건 노쇠한 몸과 풀어야 할 과거의 비밀. 흥미롭게도 빔 벤더스(<돈컴노킹>)와 짐 자무시(<브로큰 플라워>)는 거의 비슷한 시작에 서 있다. <돈컴노킹>에서 무책임한 남자 하워드 스펜서는 30년 만에 만난 어머니로부터 자기 아들의 존재에 대해 듣게 된다. 도피로 시작된 여행이었지만, 벤더스는 하워드가 결국 그 길에서 과거의 무게를 대면하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그러나 짐 자무시는 다르다. <브로큰 플라워>에서 발신지를 알 수 없는 편지를 받은 돈 존스턴은 그저 무표정하게 과거의 여인들을 찾아나선다. 더이상 그의 흔적을 그리워하지 않는 여인들의 삶을 스쳐가거나 하루 정도 공유하면서, 의례적인 인사나 의미없는 농담만 나누면서 그는 도무지 19살이 된 아들의 존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는 도대체 왜 떠났던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그때, 다시 돌아온 것일까? 아들이라고 짐작할 만한 청년들이 그를 스쳐가지만 아무도 답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목적없는, 아니, 목적을 끊임없이 지워버리며 삶의 짐을 털어내고 또 털어내고픈, 알고 보면 삶이 무척이나 고단한 어느 중년 남자의 텅 빈 시간 여행.
신명나는 뮤지컬로 영화를 사유한다
<삼거리극장> 9월25일(화) 오전 11시50분 | KBS2 | 감독 전계수 | 출연 천호진, 김꽃비, 박준면
오늘도 극장으로 여행간 당신은 어둠 속에서 어떤 세계를 발견하셨습니까? 여기, 뮤지컬을 영화 안에 부활시켜 쓰러질 듯 오래된 극장을 하나의 세계로 창조한 영화가 있다. 활동사진을 보러간 할머니를 찾으러 간 소녀 소단은 삼거리극장을 찾는다. 오래된 삼류극장, ‘삼거리극장’. 낮에는 손님이 없어 먼지만 풀풀 날리는 정지된 공간이지만, 밤이 되면 화려한 음악과 춤으로 들썩이는, 극장 전체가 한편의 영화가 되는 장소다. 극장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유령인지 인간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극장 직원들은 우울증에 빠진 사장을 대신해서 작당을 한다.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이라는 무성영화 필름을 복원 상영해서 관객을 끌어들이자는 계획. 미노타우로스와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뒤섞은 듯한 이 오래된 영화는 “근대 농업을 위해 유전공학으로 만들어진 미노수”의 가슴 아픈 로맨스다. 그런데! 이 로맨스에 몰입하던 관객 앞에 미노수가 스크린을 뚫고 나온 것이다. 죽어가던 극장의 시간이, 과거에 멈춰 있던 삼거리극장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순간, 극장에는 다시 뜨거운 공기의 빛줄기가 흐른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죽음과 실재, 스크린과 객석의 경계를 넘나들며 극장을, 나아가 영화를 사유하는 방식이 흥미진진하다. 영화라는 환상은 결국 시간의 예술이라는 사실과 영화적 체험의 본질을 가장 ‘영화적’으로 형상화해낸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의 아픔
<여름이 가기 전에> 9월24일(월) 오전 11시50분 | KBS2 | 감독 성지혜 | 출연 이현우, 김보경, 권민
(사랑을 수량화할 수 있다면) 이기적인 그 남자는 부와 명예로 90을 채우고 나머지 10에 사랑의 자리를 내준다. 이타적인 그 여자는 사랑만으로 채워진 100을 남자의 그 10과 기꺼이 교환한다. <여름이 가기 전에>는 결코 평등해질 수 없는 이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린다. 우리는 둘이 서로 똑같이 주고받는 사랑을 가장 이상적인 사랑으로 꿈꾸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언제나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 사랑 때문에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듯 더 많이 포기하고 더 많이 희생하는 자가 있을 때에만 사랑의 흐름이 평탄해진다는 진실. 물론 성자가 아닌 이상, 더 많이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는 피고름이 맺힌다. 그러니까 그 피고름을 견디는 인내 혹은 그것을 사랑이라는 낭만과 환상으로 끊임없이 치환할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사랑은 유지된다. 파리에서 유학 중인 소연(김보경)은 잠시 한국에 나와 파리에서 열렬히 연애했던 이혼남 외교관(이현우)를 다시 만난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상태에서 사랑도 가지려고 할 뿐이지만, 그런 그 앞에서 소연은 끝없이 무너지는 자신의 자존심을 대면해야 한다. 남자의 부름에 응하는 순간, 한국에서 맞이한 그녀의 바캉스는 고난의 여정이 되어버린다. 그는 매번 말끔한 언어로 소연의 기대를 미끄러뜨리며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포장하고 그녀는 매번 실망하면서도 그의 간교함을 망각하고 또 망각한다. 영화가 마른 잎사귀처럼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여자를 그녀의 무념(無念)한 표정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에서는 에릭 로메르의 향취가 배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멜로이기 전에, 연인의 집에서도, 여관에서도 새우처럼 웅크리며 선잠을 자고 거리를 부유하며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여인의 쓸쓸한 방랑기다.
세상의 편견에 근사한 엎어치기를!
<천하장사 마돈나> 9월25일(화) 밤 9시30분 | KBS2 | 감독 이해준, 이해영 | 출연 류덕환, 백윤식, 이언
변신의 여왕 마돈나가 되고 싶은 오동구(류덕환)는 남자다. 얼굴은 지극히 사춘기 소년처럼 보이고 몸매는 날씬하기는커녕 둔탁하다. 게다가 소년의 아버지는 보수적이며 가난하다. 여자가 되고 싶은 이 소년에게는 환경도, 외모도 모두 극복해야만 하는 짐이다. 그래서 소년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스스로 돈을 벌어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다. 살을 빼기 전에, 먼저 그 무거운 몸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그는 힘센 남자들의 운동인 씨름부에 가입하고 두터운 남자들 틈에서 씨름이라는 또 다른 꿈을 키운다. 영화는 한 소년의 지독히도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사이사이에 배치한 코미디를 통해 유연하게 넘어간다. 이러한 방식이 날카로운 현실의 가시를 재미로 환원하는 처사라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적어도 트랜스젠더라는 민감한 이슈를 다루면서 재현의 과정에서 자신 역시 또 다른 편견을 생산하거나 재전유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두 감독은 동구의 슬픔을 울분으로 토해내는 대신, 동구가 몽정을 한 뒤 속옷을 빨며 흐느끼는 장면에서처럼 그의 아픔을 묘사하고 전달하며 궁극에는 보듬어 안는다. 무엇보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동구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을 하나의 태도로 단순화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열어둠으로써 동구의 미래에 절망 혹은 희망의 문이 아닌, 또 다른 삶의 문도 가능함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