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형이었는데 검사해보니까 A형이래요.” <행복>의 임수정은 말한다. “원래는 활발했는데 그거 알고 나니까 소심해졌다”고. 물론 극중 은희의 대사다. 하지만 <행복>은 은연중에 임수정을 의식한다. “이래 보여도 나이가 많”고, “봐줄 사람이 없단”다. 임수정은 영화 <장화, 홍련> <…ing>,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으로 빚어놓은 다소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행복>의 은희를 빌려 부정한다. 몸빼를 입고, 건강 체조를 하며, 끝없이 주는 사랑에 눈물을 쏟는다. 보이지 않았던 은희의 얼굴이 임수정의 혈액형을 부정하는 순간이다. 특히 은희는 현실에서 한발 떨어져 신나게 놀다온 영군(<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직후다. 그녀는 자신을 포장해온 고독과 상처, 두려움의 끝에서 무엇을 본 걸까. <행복>을 보는 내내 임수정이 흥미진진해졌다.
-기술시사 때 영화를 보러 왔던데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와 느낌이 어떻게 달랐나. =촬영이 2006년 12월에 끝났다. 거의 8개월이 지난 뒤에 영화를 보니 객관적으로 대하게 되더라. 내가 출연했지만 모처럼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시나리오보다 더 풍부해진 것 같고 글 아래 숨어 있던 감정들이 느껴졌다.
-은희는 폐에 질병을 앓고 있는 여자다. 어떤 부분에 이끌려 출연을 결정했나. =음…. 뭐랄까.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것과는 다른 인물이다. 전에는 나보다 어린, 정확히 말하면 표면적으로 어린 친구들을 연기했다. 하지만 은희는 자연인 임수정이 가지고 있는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다. 극중 나이도 27, 28살이고. 현재 내가 가진 것을 투영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은희가 극중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요양원 스탭인 줄 알았다. 영수와 달리 은희의 과거사는 많은 부분 생략되어 있는데. =시나리오상에서도 은희가 왜 요양원에 왔는지, 가족사나 개인사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대사 속에 이곳에 온 지 8년이 됐다고 나온다. 요양하러 와서 왜 요양원 일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물론 처음에는 은희에게 다가가면서 상상을 하려 했지만 연기를 하면서 어느 순간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물이고 미래나 과거는 사실 별게 아닐 수도 있다는. 그냥 이 순간 그녀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극중에서 은희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에 간다. 그리고 그때마다 항상 창밖을 바라본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있던 설정인가. =아니다. 버스 안의 장면은 현장에서 만들어진 거다. 은희가 유일하게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고 공간이라 감독님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 현장에 충실하면서 은희가 혼자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를 여러 가지로 시도해봤다.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났을 수도 있고, 아픈 것에 대해 생각했을 수도 있고, 영수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계속 창밖을 바라보던 은희는 영수와 데이트를 위해 버스를 탔을 때야 비로소 처음으로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다. 은희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할 때도 그녀는 요양원에 도착하는 영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은희라는 여자에게 있어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쳐다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라고 생각했나. =일단 은희가 영수를 바라보는 건 시골마을에 도시적인 냄새를 풍기는 낯선 남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약간의 호기심과 경계랄까.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는 전혀 다른 곳의 사람을 만났을 때 누구나 가질 법한 감정들이다. 하지만 은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더 충실한 인물이다. 물론 그녀가 주변 인물들을 많이 도와주고 그들의 삶에 개입되어 있지만 이는 그들의 삶을 지켜본다기보다 그 삶을 자기 중심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 시선은 물론 거짓이 아닌 진심이지만 본인도 아프고, 자신의 삶이 무거우니까.
-반면 영화에는 은희가 거울을 보는 장면들도 있다. 영수를 처음 봤을 때와 영수와 처음으로 함께 밤을 지새기 전. 자신의 모습을 돌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웃음) 현장에서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만들어낸 설정이다. 은희에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무언가로 거울을 떠올렸다. 처음에 영수를 봤을 때도 은희는 싫은 척하면서 옆에 가서 거울을 몰래 본다. 나를 다시 한번 본다는 것, 내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한다는 것. 자연스럽게 설레는 감정이 보였고 은희도 어쩔 수 없이 여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이 좋다.
-다시 버스장면을 이야기하면, 영수와 안 좋은 일이 있은 뒤에 버스에 탄 은희는 이제 창밖도 보지 않는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이 순간 은희가 가장 불행하게 보였다. =사실 은희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적극적인 여자다. 같이 살래요, 라고 먼저 고백한 것도 은희고. 영수에게 많은 기대를 한 건 아니겠지만 서운한 부분도 있었을 거고 무언가 확 밀려온 자신의 현실이 아프게 느껴졌을 거다. 하지만 서럽게 펑펑 울진 않는다. 은희는 의외로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니까.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그건 그녀의 본능이다.
-나중에 은희는 영수에게 매달리며 떠나지 말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여자로서 거부감이 드는 장면일 수도 있는데. =시나리오상에는 그냥 매달린다는 정도의 표현만 있었다. 빌거나 이런 건 현장에서 나온 거다. 나도 처음엔 그 부분을 보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여자로서 자존심도 상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장에 갔더니 그냥 그렇게 되더라. (웃음) 정말 마음 같아서는 무릎 꿇고 넙죽 엎드려서 발목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는데 무슨 짓이든 못하겠나. 은희에겐 정말 마지막, 극한의 표현이었다.
-요양원 생활은 정말 행복해 보이더라. =실제 요양원의 현실을 최대한 많이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건강 체조도 실제로 요양원에서 하는 거다. 물론 내가 하면서 좀 촐싹대는 걸로 되었지만. (웃음)
-산소 호흡기를 끼고 무언가를 뱉어내는 장면은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것 같다. =은희는 폐농양을 앓고 있다. 폐에 농이 쌓여서 그게 차오르면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는 질병이다. 실제로 그 병을 앓고 있는 분의 영상을 봤는데 매일 그렇게 인위적으로 빼내더라.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그분들에겐 일상이다. 하지만 연기로 하자니 힘들었다. 나는 기침소리를 내도 에헤헤 정도인데 그분들은 폐암 걸린 사람이 재채기할 때 나오는 둔중한 소리가 난다. 원하는 만큼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들어보니 나쁜 것 같진 않아 다행이다.
-시나리오에서 많은 부분들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일단 결말을 열어놓고 갔다. 찍으면서 감정의 흐름에 맞춰서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들과 의논을 많이했다. 특별히 힘든 건 없었지만 허진호 감독님이 현장에서 쉽게 오케이를 내지 않는 분이다. 기본적으로 몇십 테이크를 생각하고, 호흡도 긴 편이다. 한컷을 가지고 감정의 극과 극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었다.
-예전 인터뷰를 보니 첫 테이크를 선호한다고 하던데 그럼 이번엔 조금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연기를 어느덧 5, 6년 하고 있는데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지금도 물론 첫 테이크의 감정이 신선하고 가장 좋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후반에서 느껴지는 게 있더라. 가끔은 첫 테이크가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걸 통해 배우로서 배우는 것 같다.
-처음으로 영화에서 몸뻬 차림을 했다. 물론 이전에도 여배우들이 멋을 포기하고 연기를, 코미디를 택한 사례는 많이 있지만 이번에는 임수정이 몸뻬를 입을 용기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몸뻬가 기존의 임수정 이미지를 이겨낼 수 있느냐의 문제로 보였다. 아까 언급했던 ‘자연인 임수정’이란 표현과 맞물려 부담은 없었나. =여러 인물을 연기하다보면 나조차 몰랐던 걸 알아가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걸 하나씩 벗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내가 가진 걸 벗는 느낌이었다. 청바지, 치마 위에 몸뻬를 입은 게 아니라 입고 있던 바지, 치마를 벗고 몸뻬를 입은 거다. (웃음) 내 안에는 은희와 닮은 구석도, 전혀 다른 구석도 있다. 아니 오히려 개인적인 성향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은 수연(공효진)에 가깝다. 그리고 효진씨가 은희 같은 구석이 많다. (웃음) 하지만 은희를 만나면서 자연인 임수정의 감성을, 20대 후반 여성의 감성을 투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동안 임수정이 보여준 캐릭터의 최대치란 느낌이 컸다. 신비스러움, 비현실감, 거리감들이 극대화되어 있다. 이전 영화의 캐릭터들도 무언가 하나의 막을 가진 인물들이다.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상처나 고독이 막을 두르고 있다. 반면 은희는 현실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아까 벗었다는 표현을 썼는데 <행복>은 그런 의미에서 임수정이란 이미지의 막을 벗겨낸 느낌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배우로서 해내야 할 숙제가 있다고 느낀 건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끝내고 <행복> 촬영에 들어간 게 일주일 안의 일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새 작품을 시작한 거다. 그래서 <행복> 초반부를 보면 자꾸 영군이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너무 답답했다. 영군은 천하무적, 은희는 천생 여자. 이를 어쩌면 좋나. (웃음) 박찬욱 감독님과 허진호 감독님도 매우 다른 스타일이고. 다행히도 빨리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지만 그게 나에겐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걸 해내고 싶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현실적인 인물들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은 내가 비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할 때 더 빛이 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배우가 계속 비현실적인 인물만을 연기할 순 없지 않나. 끌어내려서 현실에 붙여야 한다. 하늘에 떠 있기보다 땅에 발을 딛는 게 앞으로의 숙제 같다.
-캐릭터를 통해 배운다는 말을 자주 하더라.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영화를 하면서 내가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갖춰야 할 지식, 깨달음, 덕목, 마음가짐을 연기하면서 배운다. 마치 철학, 심리, 교양책을 하나씩 읽는 것 같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본래 임수정’이란 무엇인가. =연기에 나를 많이 투영하는 편이다. 여러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새로 배우는 것도 있지만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아, 나에게도 이게 있었구나. 그게 하나씩 쌓이면서 나의 개인적인 모습도 다양해진다. 지금까지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다 내 안에서 발견한 거다. 그걸 다시 닫을 순 없다. 안고가야 한다. 물론 아직 발견하지 못한 부분도 있을 거다.
-김지운 감독은 예전 인터뷰에서 임수정에게 페쇄성이 있다고 하더라. 나쁜 의미라기보다 일종의 거리감의 표현일 텐데. 그게 지금은 많이 열렸다고 보나. =많이 열렸다. 하지만 아직도 있다. 그건 심지어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표현되기도 한다. 단 예전엔 내가 만인에게 폐쇄적이었다면(웃음) 지금은 많이 열려고 노력한다는 것.
-버리고 싶지는 않은가. =버리고 싶지는 않다. 좋다고 할 순 없지만 그건 나니까. 숨기고 싶지도 않다. 그런 부분으로 인해 내가 상처받고 오해받더라도 다 드러내고 싶다.
-지금 말을 들으니 학창 시절이 궁금해진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내성적이었다. <…ing>의 민아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모범적이진 않았고. 방황도 많이 했다. 부모님 속도 많이 썩였고 어른들이 나쁜 친구라고 말하는 아이들과도 만났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친구들이 너무 소중했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의 심각한 폐쇄성 때문에(웃음) 학창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배우는 폐쇄적이라기보단 개방적인 직업이지 않나. =그렇다. 내 성격과는 정반대다. 사실 내 본질 깊숙이 들어가면 나는 이 일을 하면 안 된다.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야 한다. (웃음) 하지만 고등학생 때 우연히 연극을 보면서 피가 발끝에서 머리까지 솟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내가 저 위에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고 싶다가 아니라 그냥 저게 내가 해야 할 일 같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거다. 나의 본질과 배우라는 직업 사이의 거리는 앞으로도 고민하며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좁힌다기보다는 조절? =그 거리감은 앞으로 더 커질 거다. 왜냐하면 나는 배우로서 욕심이 더 많기 때문에. 배우 임수정은 더 나아가고 더 올라가려 할 테고, 내 본질은 땅 깊숙이 붙어 있으니까. 사실 그 거리를 줄일 순 없다. 잘 조절하고, 내 본질도 지키면서 배우로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의 관심사는 뭔가. =관심사? (웃음) 너무 사방팔방 다 말하고 다녀서 큰일났네. 얼마 전부터 어쿠스틱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브릿팝, 영국 밴드를 좋아한다. 기타는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고, 좋은 친구를 만난 느낌이다. 이제 웬만큼 왼손에 굳은살도 박였고. 최근의 관심사라면 어떻게 하면 기타를 더 잘 칠 수 있을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