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영화를 지키고 있다. 영화전문가들의 비판으로부터 영화를 보호하려던 일부 <디 워> 팬들의 과격한 방어만이 사례가 아니다. 현재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광장 네티즌 청원란에는 스크린 감소와 교차상영의 상황에 놓인 <기담>과 <리턴>의 장기상영을 촉구하는 관객의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관객의 영화지키기 운동이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이들의 관객운동은 이전의 관객운동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들은 ‘이런 영화를 봐야 한다’고 다른 이에게 강조하기보다는 ‘우리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8월17일, <기담>을 제작한 영화사 도로시 사무실에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슬’이라는 실명을 밝힌 발신자는 “<기담>의 극장상영을 유지해달라는 글을 포털 사이트에 올렸다”며 “영화사에서 직접 나서서 <기담>의 장기상영을 추진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에 올라온 그의 글은 “영화 제작사, 배급사가 영화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요구하고 볼 수 있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200여명의 사람들이 <기담>의 장기상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8월20일에는 <리턴>의 상영관을 줄이지 말아달라는 서명운동이 같은 곳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지난 8월 한달 동안 <디 워>와 <화려한 휴가>가 1천개 이상의 스크린을 점령하면서 나머지 영화들의 상영기회를 잠식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개봉 당시 전국 201개 스크린에서 상영됐던 <기담>은 둘쨋주에 175개, 셋쨋주에는 59개로 감소하더니 8월23일 현재는 전국 29개 스크린에서만 상영되고 있다. 지난 8월8일 개봉해 전국 244개 스크린에서 출발했던 <리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개봉 3주차까지 208개였던 <리턴>의 스크린 수는 8월22일, 다른 영화들의 개봉과 함께 전국 46개로 급격히 감소했다. <리턴>의 제작사인 아름다운 영화사의 강성규 대표는 “극장들이 박스오피스 1, 2위 영화를 빼놓고는 모두 교차상영이나 반차상영을 하기 때문에 스크린 수가 별 의미가 없다”며 “교차상영을 하면서도 좋은 시간대는 다 뺏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좋은 영화래서 갔더니 새벽 1시 상영뿐
관객이 <기담>과 <리턴>의 서명운동에 참여한 이유도 이러한 극장들의 무리한 교차상영으로 인해 겪은 불편 때문이다. 현재까지 400여명 이상의 네티즌이 참여하고 있는 <기담>과 <리턴>의 서명운동 페이지에는 많은 관객의 불편사례들이 접수되고 있다. “조조로 <기담>을 보고 싶어서 갔더니 새벽 1시, 딱 한 타임 있더이다 -_-;;”(백곰JJ), “지난 주말에 보러갔다가 오후 8시 이후의 상영만 있어서 낭패를 봤었습니다”(민족중흥), “이번 일요일에 <리턴> 보러갔더니만 5회인 오후 6시40분부터 한다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only yon). 도로시의 김창아 마케팅 실장은 “공포영화 동호회 같은 몇몇 카페에서 <기담>을 보면서 모임을 가지려 했더니, 상영회차가 줄어서 볼 수 없다는 항의전화가 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관객이 나서서 영화의 장기상영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볼 때, <기담>과 <리턴>의 사례는 지난 2001년에 있었던 ‘와라나고’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와라나고 운동은 2001년 10월부터 잇따라 개봉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등의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자, 열성 관객이 먼저 나서서 상영공간 확보를 목표로 관람운동을 벌였던 사례다. 당시의 노력으로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화의 주무대인 인천에서 재개봉됐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연장상영에 들어갔다. 영화상영 혹은 관람운동은 와라나고 이외에도 많았다. 지난 2002년에는 영화 <남자 태어나다>가 일부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개봉 하루 만에 간판을 내리자 ‘남자태어나기 살리기 본부’가 조직돼 멀티플렉스 불매운동, 연장상영 등을 추진했고 이듬해인 2003년에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개봉 2주 만에 극장에서 퇴출당하면서 팬 카페인 ‘지구수호대’를 중심으로 재상영운동이 펼쳐졌다.
대작 아니면 상업영화래도 밀려나는 형편
하지만 이전의 관객운동과 <기담> <리턴>의 관객이 벌이는 서명운동에는 눈여겨볼 만한 차이가 있다. 와라나고를 비롯한 이전의 관객운동이 보호대상으로 삼은 영화들은 처음부터 극장을 잡는 데 애를 먹었던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기담>과 <리턴>은 상업영화의 메커니즘으로 제작되어 대규모 배급망을 탈 수 있었던 영화들이다. 이전의 관객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하루아침에 극장에서 잘려나간 영화들을 부활시키려 했다면, <기담>과 <리턴>의 관객은 교차상영과 부분상영을 하면서도 스크린을 남겨주었다는 생색을 내고 있는 극장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흥행대작들과 맞붙는 시기에 개봉한 영화들의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들의 불만이 가볍지가 않다. 보고 싶은 영화도 볼 수 없게 만드는 극장의 경영논리에 대한 불만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면, 7개 이상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에서 한두편의 영화만 상영해 관객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은 예전부터 묵혀 있던 불만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지금의 관객은 예술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를 볼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담>의 장기상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린 뒤, 2천여개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다른 이의 참여를 도모한 이슬씨는 “기껏 영화를 선택해서 극장을 찾아가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 황당해서 시작한 것”이라며 “마치 내가 영화를 선택한다기보다는 제작사와 배급사의 돈벌이에 이용당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관객의 힘으로 살려내긴 했지만…
현재 <기담>은 이러한 관객의 서명운동에 힘입어 8월 27일부터는 스폰지하우스 시네코아·압구정점과 필름포럼에서 추가상영이 결정됐다. 김창아 실장은 “원래 장기상영공간을 찾아보려 했는데, 이런 반응 덕분에 힘을 얻었다”며 “극장쪽에 요청을 할 때도 관객의 반응이 이렇다고 보여줄 수 있는 명백한 자료가 될 수 있어서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관객이 자신의 볼 권리를 소리높여 주장했고 그것이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기담>의 사례는 이후의 또 다른 관객운동에 힘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영화지키기 운동이 상업영화에까지 옮겨갔다는 것은 현 흥행작들에게만 스크린이 몰리는 현 극장상영 환경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또 관객운동 할지도”
<기담>의 장기상영 서명운동을 추진한 이슬(닉네임 ‘제제’)씨.
-<기담>의 장기상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영화가 좋았다. 공포영화인데도 슬픈 정서를 공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2주 뒤에 다시 보려고 했더니, 극장도 줄어들고 회차도 반으로 줄었더라. 나는 다른 극장을 찾아가서 봤지만, 더 많은 관객이 같은 불편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다음에 글을 올렸다.
-제작사까지 연락을 했다더라. =<기담>의 리뷰가 올라온 페이지를 비롯해 2천여개의 사이트를 돌며 서명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홍보했다. 어떤 이들은 제작사 아르바이트가 아니냐고 무시하기도 했다. (웃음) 하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하기에는 힘에 부쳐서 제작사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평소 멀티플렉스 극장의 상영방식에 대해 느꼈던 불만이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대박이 나지 않더라도 좋은 입소문이 있는 영화들은 서두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특히 올해는 <스파이더맨 3>를 시작으로 대작들이 계속 개봉하면서 다른 좋은 영화들한테까지 피해를 주고 있는 것 같다. 최근 3개월 동안에는 동네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이 3, 4편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극장의 입장에서는 흥행도 중요하겠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이런 형태의 관객운동을 주도해볼 생각이 있나. =왠지 내가 주동자가 된 느낌이다. (웃음) 내용이 신선하고 잘 만든 영화인데도 시스템적인 문제 때문에 관객과 통하기 힘든 작품이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말이 쉬울 뿐이지 요즘처럼 영화들이 관성적으로 만들어지는 분위기 속에서는 그런 영화를 발견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