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촌에서 열린 <화려한 휴가>의 일반 시사회. 관객은 상영 직후 김상경과 함께 무대인사에 나온 박철민을 감독이라고 넘겨짚었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 출연작 때문에 콧수염까지 길러 붙였으니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라도 쉽사리 분간이 어려웠다. 관객 또한 불과 몇분 전까지 총알 빗발치는 정글에서 예비군 통지서를 돌렸다는 전설의 월남방위 인봉이의 주접세례에 웃음보를 터트렸으면서도 폭소를 안긴 주인공을 선뜻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개사료를 영양제 삼아 투지를 불사르던 <목포는 항구다>의 가오리로 얼굴을 알리고, <불멸의 이순신>의 김완 역으로 팬층을 두텁게 했지만, 여전히 얼굴을 찬찬히 훑고 나서야 ‘아∼’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배우. 박철민은 <부활의 노래>(1990) 이후 최근까지 40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워낙 출연 분량이 적은 탓에 그동안 ‘잠깐 배우’로 인식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의 넉살좋은 시민군 인봉이 덕분에 그는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줄 좀더 많은 지지자들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시사회장에서 김상경이 마이크를 넘기자 관객이 뒤늦게 쏟아낸 박수와 환호로만 보면 추측이 틀리진 않을 것이다. 1980년 5월, 헌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광주를 짓밟은 군홧발의 폭력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전라도 깽깽이 배우 박철민을 제헌절에 깽깽이 기자가 만났다(참고로 깽깽이 말을 허벌나게 쓰고 싶었으나 아직도 상존하는 지역감정 및 각주로 인한 지면 포화 상태를 우려해 자제했다).
-어제(7월16일) 일반 시사에 큰딸이 영화를 보러 왔다. 보고 나서 뭐라던가. =‘잘 봤냐이∼’ 그랬더니 몇 마디 안 하고 눈가가 촉촉히 젖더만. 둘째딸이 영화를 더 먼저 봤는데 그 반응이 더 재밌다. 대성통곡하면서 나보고 집에 돌아갔으면 가만 있지, 왜 다시 나왔냐고. 실제 나였으면 다시 도청으로 안 갔겠지. 애 몇번 안고 있다가 잠들었겠지.
-인봉은 애초 박철민을 염두에 두고 쓴 인물이었다는데. =감독이 시나리오 쓰면서 ‘형이 해야 해’ 그랬고, 나도 ‘내가 할 거야, 뭐’ 그랬으니까.
-최종 시나리오가 맘에 들었나. 어떤 점이 좋았나. =김지훈 감독이나 작가나 광주를 경험하지 않았다. 두 사람 고향이 대구고 부산이다. 그런데 1980년 5월의 광주 안으로 쑥 들어가서 상황을 쭉 펼쳐가는 게 좋았다. 먹물을 뺀 거지. 먹물로 접근했다면 그 당시의 상황을 끊임없이 재단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랬을 텐데. 상업영화에서 광주의 아픔, 그리고 공동체의 벅찬 느낌들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는 게 어렵잖나.
-시나리오 읽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광주를 겪었기 때문에 감정이 더 북받쳤던 것 아닌가. =대학교 1학년 때 황석영 선배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선배가 줘서 읽은 적이 있다. 그전까지 기억 속의 광주는 너무 단편적이었다. 학교 안 가서 좋아. 체육대회 못해서 억울해. 다친 아버지 보면 무서워. 시민군들 따라다니면서 원없이 음료수 먹을 수 있어 배불러. 그때 노을빵이라고 보름달 빵보다 더 맛있는 빵이 있었다. 샤니에서 나온. 노을빵도 맘껏 먹을 수 있지. 그런데 책을 보면서 광주를 진짜로 알게 된 거다. 상무관의 곡소리가 왜 흘러나왔는지. 파편적인 기억들이 연결되는 거다.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있었고, 그 안에서 참다운 공동체를 가지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있었고. 폭도들의 도시라고 했지만 주유소 한 군데도 안 털렸고, 은행 한곳도 안 털렸다. 자랑스러운 느낌과 함께 난 씨발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그런 부끄러움들이 섞이는 거지. 시나리오를 보면서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다시 올라왔던 것 같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사투리를 안 쓴다. 인봉의 경우도 전라도 사투리라고 보긴 어렵다. =초반에 리딩할 때부터 좀 고민이 됐다. 어렵더라도 남도 특유의 사투리를 써야 하는디. 그래서 찰진 정서를 표현하면 어떨까. 의도적으로 단어 몇개라도 배치를 해볼까 그랬다. 하지만 뭐 전라도 사람들만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감독과는 결국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 나오는 단어만 쓰기로 했다.
-<화려한 휴가>의 인봉은 영화의 머리 대목부터 나온다. 출연 분량이나 비중도 가장 많고 크다. 이번엔 별로 편집을 당하지 않은 것 같은데. =초반부터 나오는 게 쉽지 않지. 이만큼 큰 역을 맡지도 못했고. 큰 구다리들이 이번에도 많이 잘리긴 했지만 감독이 편집하고 나서 그러더라. 어떤 장면은 너무 재밌어서 뺐다고. 슬픔의 정서랑 잘 안 붙는다고. 그러니 뭐라고 할 수 없지.
-광주에서 나고 자라면서 적어도 그날을 기억하는 이들은 관련 사진들만 봐도 내가 직접 그런 장면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도 그렇다. 영화 보면서도 저거 내가 직접 본 것 아닌가 헷갈린다. 당시 아버지가 얼굴에 타박상을 입고 돌아왔는데 도대체 내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들이 더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신애(이요원)가 마이크를 잡고 외치는데, 실제로 들었던 목소리는 더 나이 든 여성이었던 것 같다. 대신 더 날카롭고 절절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어린 나이에도 지금 나가면 죽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고. 노동청과 MBC건물이 불타는 걸 멀리서 봤던 것 같고, 새벽 내내 아련히 들리는 총소리에 부르르 떨다 잠이 들기도 했고.
-“슷.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녀!” 인봉의 대사를 듣다가 <목포는 항구다>가 떠올랐다. 가오리 대사와 똑같은데. =나도 모르게 나와버려서. 사실 그 장면은 애드리브가 많았다. ‘찐따이, 막따이, 와와∼’ 그러면서 민우에게 권법영화 설명하는 것도 했었고. 나중에 빠졌지만. <록키2>를 설명하는 애드리브는 처음엔 너무 과한 것 같아서 두 가지 버전으로 다 찍었는데, 인봉이라는 캐릭터나 전체 영화의 흐름에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감독이 살려놓은 것 같다. 어디선가 봤더니 감독이 그랬더만, 배우가 자신의 연기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순간적으로 애드리브를 하는 것도 있지만, 기존 대사를 많이 비틀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 같다. =뭐, 그런 걸 말하는 건가. 용대랑 싸울 때도 그냥 이 나쁜 새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분노를 발생시키는 새끼, 폭력을 유발하는 새끼. 뭐 이렇게 말인가. 내가 맡은 인물들이 주로 관객과 놀아주고, 익살 부리고, 사고치고, 그러다가 나중에 짠해지는 역할이 대부분이다. 그런 성격을 극대화하려는 방법을 찾다 보니까 그런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뭔가. 인봉의 입장에서 보면. =따지고 보면 나도 인텔리다. 공부했든 안 했든, 도서관하고 친했든 안 친했든, 책을 많이 샀건 안 샀건, 대학 졸업증이 있으니까. <화려한 휴가>는 젊은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런 먹물 든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5월에 싸웠던 사람들의 중심은 용대나 인봉이 같은 사람들이었다. 논리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고 싸우진 못했지만, 싸우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민주의 의미를 깨닫게 됐고, 그것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았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도청 앞에서 인봉과 용대가 고향을 향해 절하면서 “오메, 니미 절을 거꾸로 해부렀네” 하면서 우왕좌왕하는 장면을 꼽고 싶다. 인봉과 용대가 만담하면서 그들의 보잘것없는 소사를 들려주면서 광주를 지킨 이들이 누구였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빠진 분량 중에서 가장 아쉬운 것도 그 때문이고.
-연기는 고등학교 연극반 활동이 처음이다. 아, 근데 그전에 격투기를 배웠다고 들었다. =뺑뺑이로 들어가게 된 고등학교가 예전부터 깡패학교라고 소문난 곳이었다. 아버지가 그 학교 떨어졌다고 했더니 한숨 쉬면서 딱 한마디 하시더라. “배레부렀구만.” 아들 공부시키는 건 끝났구나, 뭐 그런 뜻이었는데. 나도 스스로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합기도 도장을 다녔다.
-연극반을 택한 건 어떤 계기였나. =연극하던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형은 추송웅 선생 따라다니면서 학교도 제대로 안 갔다. 하나뿐인 형이 왜 연극을 고집할까. 연극이 그렇게 재밌는 건가, 궁금해하면서 자연스럽게 빠져든 것 같다. 형은 KBS에서 성우로 일하면서 연극무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10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 지금도 집안에 큰일 있거나 배우로서 살아가기 힘들 때면 매번 형이 생각난다. 다섯살 터울이라서 주종관계가 확실했는데, 내 어린 시절은 형이 다 장악한 시기라고 봐도 된다. 형은 언제나 내 앞에서 모노드라마를 선보였고. 뭐, 이런 식이다. ‘앉아서 봐’, ‘재밌냐?’, ‘그럼, 웃어 새끼야’, ‘박수쳐’(웃음). 따지고 보면 내 배우 역사는 관객부터 출발한 셈이다. 형은 연극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사실 나를 배우로 키웠던 거고.
-이한위와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알고 있다. 전화 받을 때마다 ‘충성’을 맹세한다던데. =전화 주시면 언제나 교가부터 불러 바친다. (웃음) 5년 선배라서 같이 학교를 다니진 않았다. 형이 조선대학교에서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우리 축제 때 연극연출을 해주면서 알게 됐다. 그때는 정말 교과서였고, 우상이었지. 그랬는데 공연 끝난 뒤에 내가 배우들만 소개하고 연출자 소개는 쏙 빼먹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한위 선배님, 어디 계시더라. 안 보이시네. 그냥 박수나 한번 주시죠” 그랬지. 그랬는데 끝나고 나서 “야 이 새끼야. 나 바로 니 눈밑에 있었다”고 화를 내셨다. 아직까지 그날 사태에 대해 심히 분노하신다.
-두 형제 모두 연극하겠다고 나섰으니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겠다. =연극영화과 가겠다고 했을 때 아부지가 한 집안에 딴따라를 둘이나 둘 수 없다고 역정을 내셨다. 결국 내 대학 입학 원서는 아버지가 선생님한테 직접 수령하셔서 작성 및 제출하셨다. 내 입장에선 다른 선배들 보면 굳이 연영과 안 가도 연극반 활동하면서 계속 배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그래야 더 잘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한번 효도하고, 돌려차기로 불효하자, 뭐 그랬지.
-같은 길을 갔던 형이 든든한 후원자였겠다. =형 눈에는 쌈마이 배우였다. 형은 정통 연극배우였고, 매번 주인공을 했으니까 ‘핫빠리’처럼 보였겠지. 형이 날 인정해준 건 딱 두번이다. 내가 좀 ‘운빨’이 있는데, 능력이나 깊이에 비해 언론을 많이 탔다. 대학 졸업 뒤에 극단 현장에 들어가 신촌에 있던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는데 기독교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배우 박철민은 형의 영향을 받아 어쩌고저쩌고∼’ 방송이 나갔는데 퇴근하던 형이 그걸 택시에서 들었다. 다음날 전화해서는 ‘너 이 새끼 배우 하고 있긴 있는갑다’ 하더라. 그러고 나서 또 한번은 결혼식 때. 독신이던 형이 부조를 받았는데 김명곤 같은 대선배들이 결혼식에 오시는 걸 보고 또 한번. 그 두번의 인정 말고는 뭐 계속 무시했지.
-대학 시절에 호수가에서 낚시하는 기행을 즐겼다던데. =아, 그거는. 오해를 하믄 안 된다. 그건 낭만이 아니라 진짜 배고파서 그랬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집에서 용돈 올라와도 3일 동안 외상 갚고 술 몇잔 묵어불믄 끝나불고. 그래서 호수가에서 낚시를 한 것이지. 낚시하다가 나도 지치고 물고기도 지쳐요. 그럼 학교에서 어슬렁거리는 비둘기 잡아불고. 학교에 큰 비둘기 집이 있었다. 후래쉬 비춰불믄 비둘기 꼼짝 못한다. 그럼 바로 조소과에 가서 진흙 얻어서 둘러불고, 바로 난로에 넣어불지.
-마당극을 하게 된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2년간 무대극하다가 친구들하고 같이 만들었다. 그때 마당극이 붐이었다. 김지하 선생 <오적> 올리고 그랬지. 풍자와 비판이 대세였고, 대학마다 마당극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극회 안에 마당극반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서로 안 맞아서 갈라섰지.
-재학 시절 중앙대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정확히 말하면 대행을 한 거다. 사회대 학생회장이었는데 총학생회장이 물러나면서 한 8개월 동안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 사실 그때 이야길 하자면 부끄럽다. 잘하지 못했고. 절절하게, 당당하게, 열심히 덤볐으면 자랑이라도 할 텐데.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날라리 운동권이었다고 한다. 나야 정말 가을은 가을이오, 겨울은 겨울이고, 하면서 연극만 하고 싶었으니까.
-대학 졸업 뒤 노동연극을 하는 극단 현장을 택한 걸 보면 그냥 시대에 떠밀려서 거리에 나선 것 같진 않다. =그렇게 봐주면 고맙지만, 계속 현장을 고집했던 것도 아니었다. 1993년쯤이었나. 5, 6년 정도 활동하고 나니까 주류 연극을 하고 싶어졌다.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한 격동의 시기가 끝나가던 무렵이어서 그런 욕망이 더 컸던 것 같다.
-주류에서 활동했더라면 영화쪽에서도 좀더 많은 기회를 얻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하면서 특별히 차별받은 건 없다. 다만 연극할 때 연극인으로 인정 안 해주는 건 좀 섭섭했다. 우리는 연극하는데 남들은 데모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연극을 올려도 별다른 평가가 없었던 것도 서운했고.
-극단 활동을 하면서 집회 사회를 꽤 많이 봤다. 민주대머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한번 마이크 잡으면 반응이 뜨거웠다던데. =사실 엊그제도 사회 하나 봐달라고 했는데 고사했다. 사실 사회를 잘 보는 게 아니다. 땜빵으로 몇번 섰는데 예쁘게 봐주신 거지. 1990년 전후에 연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한 노래공연에서 사회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좀 남다르긴 하다. 문익환 목사님께 춤 한번 춰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는데 덩실덩실 해방춤을 추시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배고픔은 어떻게 극복했나. =얼마 전까지도 딸 데리고 오후에 놀이터 가면 직장 잃은 아비라는 눈총을 받았다. (웃음) 선배들이 가끔 와서 매표소에 1만∼2만원씩 두고 가면 그 돈으로 기름진 삼겹살 안주에 소주 회식하고 그런 시절을 꽤 오래 보냈다. 돈 벌려고 도중에 가락시장에서 손가락질하면서 중개인도 해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 아, 내가 연기 말고 할 게 없구나 그랬지.
-열성적인 팬클럽이 지하에서 활동 중이다. =지하라니. 지상에서 당당히 하고 있다. 가입자가 1900명쯤 된다. 흐흐. 실은 활동하는 친구들은 15∼20명이 전부다. 나머진 지하에서 활동도 안 하고 있다. 처음엔 (조)재현이 형이 많이 도와줬다. 본인 팬카페에다가 ‘박철민 매력있지 않냐, 근데 카페가 없다, 좀 도와줘라’ 그랬지. <불멸의 이순신> 할 때 회원 수가 확 늘었는데 지금은 뭐. 그래도 열심히 응원해주는 친구들은 <화려한 휴가> 때 떡을 세번이나 싸왔다. 떡 들고 와서는 ‘감독님, 제발 좀 자르지 마세요’라고 사정하고. 떡이 인봉이를 살린 거지.
-영화는 <부활의 노래>가 처음이다. 역시 5월 광주 이야기다. =시민군 K로 나왔다. 지금 케이블쪽에서 일하는 후배가 출연하면 용돈벌이는 된다고 해서 갔는데. 8천원인가 받았다. 아조, 험악한 개런티더만. 받기도 뭣허고, 안 받기도 뭣허고.
-그때만 해도 영화에 출연하는 걸 두고 시선이 곱지 않았을 텐데. =선배들이 <꽃잎>까지 하고 나니까 그러더라. 작은 역 하지 말라고. 작은 역 한번 하면 계속 작은 역이라고. 내공이나 기르라고. 그래도 내 입장에선 한회 출연하면 연극 몇달 하는 것만큼 버니까. 게다가 딴짓 하는 것도 아니고 연기 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박철민의 연기에는 마당극적인 요소가 있다. 순발력과 입심은 장점이다. 하지만 대사 치고 나서 입술을 씰룩인다거나 콧소리를 덧붙인다거나 고개를 갸우뚱 한다거나 하는 과도한 추임새는 단점이다, 라고 하더라. =그런 말 많이 들었다. <키스할까요> 때였나. 김태균 감독이 ‘마당극적인 연기를 하시네’ 그랬다. 그때만 해도 마당극쪽에 내가 깊숙이 들어가서 그런지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우리한테는 경험이 가장 큰 공부고 학습이다. 얼마 전에 찍었던 2부작 드라마 <그라운드 제로>는 까불대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전의 내 연기와는 다르다. 점점 진화한 것 아닌가 싶다. 한편으론 내 마당극적 연기를 좀더 캐릭터화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어느 무리든 한놈은 호들갑스럽고 과장스럽게 감정을 표출하는 이가 있잖나.
-<그라운드 제로>에서 멜로 연기를 해보니까 좋던가. =왜 그런지 알겠어. 톱 조연들이 왜들 그렇게 멜로를 하고 싶어하는지. 상대배우와 눈빛을 주고받는 맛이 있거든. <혈의 누>의 조달령 같은 무자비한 눈빛을 쏘는 역도 좋고. 얼마 전 <스카우트> 촬영을 끝냈는데, 거기서 서곤태라는 인물도 매력적이다. 한 여자에 대한 무한한 순애보를 과시하는 깡패로 나온다. 연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바보 같은 나랑 닮았다. 이번에는 전라도 사투리를 좀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마이 파더>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도 나온다.
-무대에 다시 오르고 싶지 않나. 이전에 <대한민국 김철식>으로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고 하던데. =안 그래도 올 겨울에 올린다. 너무 우려먹는 것 아니냐고 그러긴 하던데. 그리고 <늘근 도둑 이야기>도 계획 중이고. 내년에는 조재현 형이랑 같이 뭘 저지를 계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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