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석 규모의 하이퍼텍 나다 상영관 내부는 아늑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아담한 정원이 내다보이는 통유리에 커튼이 드리우기 시작하면 가슴이 설렌다. 나다의 전신으로 시네필의 성역이었던 동숭씨네마텍의 지하 카페도 그랬다. 언제고 변함없이 평온한 한편, 어떤 영화를 만나게 될 것인가 설레곤 했다. 지금의 하이퍼텍 나다의 라인업은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양하다. 규모의 경쟁으로 치닫는 분위기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픈 신작을 소개하면서, 각종 감독들의 회고전을 준비하는 한편, 일주일에 한번 화요일 저녁에는 프랑스영화를 상영하는 시네프랑스를 진행 중이며, 7월5일부터는 매주 목요일 저녁 한국독립장편다큐멘터리를 상영한 뒤 감독과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의미있는 영화를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소개한다는 그 마음은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최근 이곳에서 배급한 <우리학교>가 독립영화계의 슬리퍼 히트를 기록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숭아트센터 영상사업팀장에서 시작해 현재 영화사 진진과 하이퍼텍 나다의 운영까지 책임지고 있는 김난숙 대표도 마찬가지다. 농담처럼 진담처럼,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즐겁게 살아남겠다고 말하는 그 마음은, 그의 다양한 경력 속에서 변함없었을 듯하다. 10년 넘게 우리 곁을 지켜준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이제 막 창사 8개월을 넘어선 영화사 진진이 그보다 더욱 오랜 기간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영화의 즐거움을 선사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우리학교>가 이렇게 잘될 줄 알았나. =개봉 첫주차에 생각보다 반응이 안 좋았는데도 이상하게 잘될 것 같았다. 2주차부터 반응이 오면서 관객이 점점 많아지더라. 조은령 감독은 예전에 동숭단편극장에서 <스케이트>를 개봉한 이후부터 알고 지냈는데 워낙 사람이 좋아서 연말이면 늘 카드를 보내곤 했다. 차기작을 준비하느라 일본을 들락날락한다더니,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더라. 추모행사를 여기서 갖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은령 감독이 <우리학교>로 다시 돌아온 거 같아서 감회가 새롭다. 분명히 조은령 본인이 시작한 일이니, 도와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번주 지나면 공동체 상영까지 포함해서 7만명이 넘을 것 같은데, 이러다가 10만명까지도 가지 않을까. 모레부터는 조은령 감독이 만든 <하나를 위하여>를 함께 특별상영할 예정이다. 일종의 감사와 정리의 의미로, 김명준 감독이 그러고 싶다고 하더라.
-하지만 역시 누군가가 돈을 벌 거라고 예상할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제작자가 가장 해피한 케이스다. 제작비의 두배를 벌어들였고, 부가판권도 모두 잘 팔렸다. 그간 <송환>이며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같은 영화를 개봉했지만, 태원엔터테인먼트에서 DVD 판권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이 영화는 달랐다. 관객도 계속 DVD 출시 여부를 문의하고. 여기에 케이블이며 공중파에 판권까지. 독립다큐멘터리 혹은 독립장편영화의 새로운 수익모델이 된 것 같다.
-지난 6월에는 직원들과 함께 직접 우리학교 운동회까지 다녀왔다. =너무 좋았다. 영화에서 봤던 얼굴 그대로 다들 맞이해주는데 정말 반갑더라. 사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복잡한 갈등이 그들과 나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무장해제시키는 그들만의 뭔가가 있다. 마지막 날 운동장 구석에서 작게 불꽃놀이를 해주는데, 민족이니 국가니 다 떠나서, 이 좋은 사람들을 장애물없이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라.
-지금은 동숭아트센터와는 전혀 무관한 건가. =여전히 동숭아트센터 김옥랑 대표가 일부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그간 동숭아트센터 안에 공연영상팀이 함께 있었는데, 2003년에 먼저 분사했다. 이후 영상사업팀 역시, 동숭아트센터의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분사했다. 자생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더욱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거다. 진짜 돈 없을 때, 망하기 직전에 도와주신다고는 했는데. (웃음)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다. 올해 매출목표 15억원도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우리학교>의 도움이 가장 컸고, 지난해 개봉했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부가판권도 꽤 좋았다.
-동숭아트센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영상사업팀장으로 부임하면서인데, 그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대우영상사업단에서 청어람 최용배 대표, 아이비전 쌈지 전호진 대표, 이글픽쳐스 정진완 대표 등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영화케이블사업을 시작한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한국영화 사전판권구매팀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비디오시장이 워낙 컸으니까. 그전에는 방송국 구성작가였다. 원래는 뉴스 자료조사원으로 방송국 일을 시작했다가 SBS 개국하면서 교양제작국에 있었고, <행복찾기>라고 아줌마들이 나오는 토크쇼에서 구성작가로 2, 3년 정도 일했는데 되게 재밌었다.
-와, 방송국 작가라면 월급도 많이 받았겠다. =SBS가 개국할 당시 능력여부와 상관없이 돈으로 지를 때였으니까. (웃음) 그때 만난 지독한 방송인도 많았다. MBC에 1년 정도 있을 때 알게 된 최삼규 PD는 동물다큐쪽에서 정말 유명하신 분이 됐고, 3, 4년 전에 돌아가신 SBS 김종찬 국장님은 지금도 기억이 많이 난다.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뭐든 끝까지 밀어붙이는 징글징글한 사람이랄까.
-원래 전공은 뭐였나. =외대 불어과 85학번이다. 학교는 거의 안 다녔고, 동아리에 들락거린 기억밖에 없다. 우리 동아리 출신 선배로 김태균 감독, 이재용 감독 등이 있다. 대학영화연합을 통해서 한양대의 장윤현, 공수창 감독이며 서강대, 경희대, 서울대, 이대 영화동아리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는 선배들이 모두 잘난 척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얻어들은 풍월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웃음)
-영화를 연출한 적도 있었겠다. =8mm랑 16mm. 완성한 건 없다. 완성하면 비웃음살 게 분명하니까 미완으로 남겨둬 변명의 여지를 만드는 거지. 8mm영화 촬영테이프는 아직도 집에 있다. (웃음)
-방송국에서 나온 이유는 뭐였나. =스물아홉에 나왔다. 서른 되기 전에 다시 영화를 해야겠더라. 그리고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월급 진짜 조금 주더라. (웃음) 제일 힘들었던 건 8시 출근 시간. 더욱 충격적인 건 나름대로 일찍 간다고 7시40분에 출근했는데 모두 다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거. 게다가 그때는 대기업 여자들이 모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초반에 세게 거부해서 유니폼은 안 입었는데 미움은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내가 선택해서 간 거니까, 대기업 생활도 잘하고 싶었다. 그곳에선 뭐든 숫자로 말하는 걸 좋아하더라. 비디오 몇장 나갔냐, 관객 몇명 들었냐, 거기 얼마 손해냐. 그때 손익개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럼 대우영상사업단이 없어지면서 동숭으로 옮긴 건가. =그전에 나왔다. 최용배 대표가 시네마서비스로 옮기고, 영화를 전공했거나 영화가 좋아서 거기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나오는 분위기였다. 1996년에 결혼했는데, 승진도 하고, 월급도 올랐는데 불안해지더라. 난 항상 안정감을 느끼면, 잘나갈 때가 불안하다. 지금은 잘 안 나가서 불안하지도 않다. (웃음) 30대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다. 결혼을 31살에 했는데, 후배 한명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 “언니는 결혼도 했고, 직장도 안정됐고. 그런데 30대의 10년을 뭘 하면서 보내고 싶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그 얘기가 떠나질 않았다. 들어간 지 3년 만에 나왔다. 방송국도 3년 만에 나왔는데.
-그래도 동숭은 들어온 지 11년차가 되도록 옮기지 않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게 있나보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30대 때 가장 잘한 일이 대우에서 동숭으로 옮긴 거다. 대우에서 가장 큰 불만은 영화사들이 나를 보고 거래하는 게 아니라, 회사의 규모를 보고 일을 하니까, 그런 조직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월급 70만, 80만원만 받더라도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남편이야 그랬지, 연봉을 줄여서 가는 게 어딨냐고.
-당시 동숭씨네마텍은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이었다. =문화체육부 최초로 공식승인한 전용관이었는데 간접보조 형식으로 문예진흥기금을 세금환급 식으로 면제해줬다. 연간 5분의 3을 예술영화를 상영하면서 스크린쿼터도 지켜야 했는데, 꽤 까다로운 기준이었다. 한국예술영화가 없는데 두개를 모두 지키려다보니 독립영화제에 대관을 많이 했고, 이럴 바엔 우리가 한국 예술영화를 찾아서 틀자는 생각에서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을 개봉했는데 관객이 안 들어서 박살났다. (웃음)
-몇명이나 들었기에. =6800명? 그래도 요즘보단 낫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예술영화 환경과 전용관 지원 정책에 대해서는 빠삭하겠다. =예술영화의 1차 빅뱅이라고 할 만한 시기가 <씨네21> 등이 창간될 1995년. 관객운동이 티케팅 파워까지 연결되던 때로, 동숭씨네마텍이 많은 혜택을 봤다. 두개관을 합쳐서 연간 35만명이 들었으니까. 백두대간과 파트너십을 유지했는데, 거기서 수입한 영화만 7만명이 들었다. 가장 대박이 났던 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4만명 가까이 기록했다. 부가판권 시장도 좋을 때였고, 정부에서는 이렇게 잘되는데 무슨 정책이 필요하냐고 할 정도였는데 IMF를 맞았다. 좋은 영화 수입하던 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관객 수도 현저히 줄면서 극장도 힘들어지고. 칸에서 상 받으면 무조건 관객이 들던 시기도 그때 끝났다. 그리고 1999년, 2000년 가장 안 좋았다는 시기였는데, 극장들이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씨네큐브며 하이퍼텍 나다를 개관했다.
-넥스트 플러스 여름영화축제 기자회견장에서 사회를 보더라. 본인이 좋건 싫건 예술영화전용관의 맏언니 같은 위치에 선 셈이랄까.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나. =2000년에 나다가 개관하면서 일본영화제를 했었다. 좌석 점유율이 120%가 나올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이토 준지, 미이케 다카시, 수오 마사유키 감독 영화를 별다른 컨셉없이 소개한 건데, 일본영화가 막 소개될 때였다. 초창기에 일본영화를 많이 했는데, 어느샌가 다른 데서도 일본영화를 많이 하더라. 나다에서 하는 영화의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져갔다. 게다가 더이상 일본영화가 금기가 아니게 되면서 인도영화 등 제3세계 영화를 소개했는데, 줄줄이 다 망했다. 결국 회고전만으로 나다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는데, 그것도 2004년부터 뜸해졌다. 서울시네마테크에서 회고전을 적극적으로 개최하기도 했고.
-이제 독립영화전용관들까지 생기면 고민이 더욱 많아지겠다. =가장 긴 고민의 터널 속이다. CQN이며 스폰지하우스며 각자 특화된 영역을 가져가는 추세다. 예전에 백두대간과 우리가 수입사와 극장으로 함께했다면, 요즘은 극장과 수입자, 배급자가 하나가 되는 시스템 아닌가. 더 명확한 정체성이 필요해졌다. 정치적인 소수자를 다룬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칸다하르>를 개봉했는데, 관객이 아예 그런 영화를 싫어하더라. 극장 안에서 현실을 이야기하는 걸 불편해한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도 그래서 살 엄두도 못 냈는데, 결국 스폰지에서 수입해서 영화제 형식으로 소개하고.
-요즘 그런 식으로 영화제 형식을 빌려 작은 예술영화를 묶어서 개봉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관객의 호흡이 짧아진다는 것이 문제다. 요즘도 하루 종일 <우리학교>만 상영하냐고,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웃음) 예전에는 꽉 채워서 2주는 보장이 됐는데, 요즘은 개봉 첫주에도 교차상영 들어가는 걸 당연히 여기고.
-관객 입장에서 어떤 때는 시간에 따라 다른 영화를 선택할 수 있어서 더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자체가 좋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 흐름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것이냐는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멀티플렉스와 달리 단관은 프로그램을 멀티화해야 관객을 끌 수 있다는 생각에 교차상영을 제일 먼저 시작했다. 우리가 우리 발등을 찍은 셈이지. (웃음) 처음에는 방송국에서 5분짜리 띠 프로그램을 편성하듯이 하루 종일 진지하고 어려운 영화를 상영하다가 한번씩 개봉 기회도 가지지 못할 단편영화를 꾸준히 틀면 반응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이퍼텍 나다가 개관한 뒤 지금까지 수입해서 개봉한 영화가 모두 31편. <히로시마 내사랑> <리틀 청> <슈팅 라이크 베컴> <엘리펀트> <굿바이 레닌> 등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영화들이다. 내부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져가려고 했나. =글쎄. 굳이 말하자면 약간 어려운 얘기를 쉽게 풀어주는 영화랄까. 마냥 가벼운 영화에는 안 끌리는 것 같고, 잘 몰랐는데 지금까지의 라인업을 보면 <꿈꾸는 카메라>처럼 다큐를 수입한 적도 있지만, 다큐 출신 감독의 영화가 좀 많은 것 같다.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아들>의 다르덴 형제나.
-그러고 보니 <송환> <영매…>를 개봉했고, 다큐플러스 인 나다도 있고, 다큐에 대한 관심이 유난하다. =동숭에 처음 왔더니, 이미 <낮은 목소리>를 비중있게 개봉시킨 뒤였고, <낮은 목소리2>는 당연히 동숭에서 개봉하는 분위기였다. 예전에 방송국에서는 PD들이 그렇게 다큐를 하고 싶어하는 걸 이해를 못했다. 극영화가 최고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보니 평범한 일반인 중에 고수가 참 많다는 걸 느낀다. 보통 사람을 다룬다는 게 좋고, 또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매력이다. 극영화보다 다큐를 더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단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모자란 제작비를 몸으로 도와주는 사운드 관련 스탭이라든지.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관심이 있어서 두명 정도의 감독과 이야기를 진행 중이다.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을 고민 중이다.
-극영화도 제작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송일곤 감독의 차기작이고, 이미 동숭아트센터에서 연극으로 올렸던 작품이라던데. =동숭아트센터 공연사업팀이 분사하여 만든 회사인 시어터컴퍼니가 콘텐츠 작가 그룹을 계속 운영하면서 창작연극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이왕이면 하나의 이야기를 연극과 영화로 함께 제작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다리퐁 모던 걸>을 쓴 작가의 영화대본이 너무 연극적이어서 주인공이 한성교환소 여자전화교환원이라는 것과 몇몇 에피소드만 남기고 모조리 영화적으로 바꾸는 중이다. 공연은 올해 이뤄졌다. 일단 소재가 매력적이었다. 여종 출신 여자아이가 주인집 도련님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현재로선 송일곤 감독 연출로 결정된 상태인데, 송일곤 감독도 좀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며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웃음) 다들 나더러 그러더라. 요새 영화 제작 환경이 어떤지 몰라서 겁이 없다고. (웃음) 그래도 아직은 의외로 투자사에서 먼저 전화해서 시나리오를 보여달라는 식으로 관심이 많더라. 확실한 건 시나리오가 제대로 되기 전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이 일은 당분간 그만둘 것 같지 않다. =물론이다. 이준익 감독님이 씨네월드 사장일 때 놀러갔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영화사가 1년 만에 고비를 겪고, 3년 만에 또다시 고비를 겪고, 5년 혹은 7년 만에 또 고비를 겪는데, 거기까지 넘기면 남들이 ‘망하기야 하겠어’ 생각하는 단계가 온다고. 그러니까 가늘고 길게 무조건 살아남으라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