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 자리한 필름 소사이어티 오브 링컨센터와 뉴욕영화제에서 프로그램 책임자로 일하는 리처드 페냐가 올해로 25년째 칸영화제를 방문했다. 우리는 그를 그저 아시아영화와 한국영화 전문가 정도로 알고 있지만, 뉴욕 영화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두곳에서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맡는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쉽지 않은 일일 터. 그의 이력은 차라리 ‘전설’에 가깝다. 그는 12살 때 에릭 폰 스트로하임의 영화를 보기 위해 뉴욕영화제를 찾기도 했고, 소년 시절에는 자신의 뿌리를 좇아 스페인어 영화를 보러다니기도 했다. 그는 하버드대와 MIT를 나왔고, 링컨센터에 부임한 이래 아프리카, 대만, 폴란드, 헝가리, 아랍, 쿠바, 아르헨티나영화, 그리고 한국영화를 소개했다. 미국의 비즈니스맨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섬세하고 뚜렷하면서도 폭넓은 지성의 소유자인 그를 폐막일인 5월27일 오전에 만나 올해 칸영화제를 총정리했다.
-60번째 칸영화제를 전반적으로 평가한다면. =영화들이 아주 좋았던 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뛰어난 서너편의 영화 외에도 전체적으로 영화의 수준이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중에는 내가 열광하지 않을 만한 영화도 있었지만, 상당수가 흥미로운 영화였다.
-깜짝 놀랄 만한 영화가 없다고 불평하는 평론가도 있다. =올해는 두세편의 영화가 다른 모든 영화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상황은 아니다. 대신 평론가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영화들이 상당히 많다. 내가 개인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코언 형제의 <노 컨트리 포 올드맨>, 이창동의 <밀양> 등은 다른 이들도 아주 좋아할 것 같다.
-올해 칸 경쟁부문에는 유독 미국영화가 많았다. 어떻게 평가하나. =<노 컨트리 포 올드맨>부터 이야기한다면, 개인적으로는 가장 뛰어난 영화 같다.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훌륭하게 영화로 만들어냈다.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은 미국에서는 오래전에 개봉했던 영화다. 나는 핀처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조디악>은 어찌 보면 핀처의 영화 중 가장 덜 독창적인 영화 같다. 더욱 창조적으로 보이는 <쎄븐>이나 <파이트 클럽>보다는 직설적이랄까. 그래도 이 영화는 좋다. 만약 할리우드영화가 평균적으로 이 정도 수준으로 만들어진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웃음)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스프루프>? 나는 아직 이 버전을 못 봤다. 미국에서 본 버전은 로드리게즈의 영화와 묶여 있어 이보다 짧은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우리는 밤을 지배한다>는 별로였다. 내가 아는 많은 미국인들은 이 영화를 매우 고통스럽게 봤다. 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는 아직 보지 못했다. 오늘 오후 2시에 볼 계획이다.
-미국영화 중 칸에서 선보이지 않아 아쉬운 영화도 있나. =우선 미국으로 돌아가서 보게 될 폴 토머스 앤더슨의 <피가 있을 거다>가 있다. 업튼 싱클레어의 훌륭한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굉장히 좋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쯤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칸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일 텐데, 어쩌면 그가 칸에 오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베니스에는 확실히 갈 것으로 보인다. 웨스 앤더슨의 새 영화 <다즐링 리미티드>와 킴벌리 피어스의 <스톱 로스>도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아는데 칸에 오지 않았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젊음 없는 젊음>이 거의 완성됐는데도 이곳에서 선보이지 않은 일이다.
-이번 칸의 또 다른 축은 프랑스영화다. 그중에서도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사랑의 노래>는 미국과 프랑스 비평가들의 견해가 완전히 엇갈리던데. =<사랑의 노래>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좋았다기보다는 그 영화를 보면서 괴롭지 않았다는 정도지만. 하여간 프랑스 감독이 뮤지컬을 다시 만들고자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오래된 정부>는 굉장히 좋은 영화다. 너무 길긴 하지만, 섹스라든가 선정성을 계속 제기해왔던 브레이야가 시대극을 통해 같은 주제를 던진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저명한 미술가였지만 이제 영화의 길로 완전히 접어든 줄리안 슈나벨의 <잠수복과 나비>에 관해서 말하자면, 초반 1시간은 정말 좋다. 주인공의 몸 안에서 외부를 보는 1인칭 시점이 굉장히 파워풀하다. 그 뒤 가족과 정부가 등장해 펼쳐지는 이야기는 덜 흥미로웠지만 전체적으로 괜찮았다.
-루마니아를 비롯해 동유럽영화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번 영화제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가장 좋아한 영화는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었다. 이 영화는 정말 파워풀했다. 다른 영화를 들자면 헝가리의 벨라 타르가 만든 <런던에서 온 사나이>가 있다.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는 다른 누구보다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었다. 러시아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알렉산드라>를 보면서 놀랐던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정치적인 논점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영화는 소쿠로프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체첸전쟁을 그렸다. 이들 외에 마켓이나 다른 섹션에서 상영한 동유럽영화 중에는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자라난 세대들의 영화가 인상적이었다. 이들 세대는 사회체제에 격렬히 반대했던 이전 세대들과 달리 체제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점이 무척 흥미로웠고, 더 많은 동유럽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영화는 어땠는지. =왕가위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대부분이 실망감을 표한 반면,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의 여행>은 놀라운 영화였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쓰리 타임즈>나 <상해화> 같은 걸작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본다. 이창동의 <밀양>은 캐릭터들이 풍부하게 묘사되는 등 굉장히 잘 쓴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상황에 대한 묘사 또한 굉장히 풍부해서 도대체 다음 상황이 어떻게 이어질지 짐작할 수 없다. 이창동 감독으로서도 대단한 도약이라고 본다. <숨>에 관해서는…, 솔직히 나는 김기덕 감독의 팬이 아니지만, 그의 최근작 중 비교적 나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와세 나오미의 <애도의 숲>은 분명 내 과는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교회 옆에서 찍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웃음)
-그 외에 인상적인 영화가 있었나. =멕시코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고요한 빛>은 이번 칸에서 받은 좋은 충격이었다. 그의 데뷔작 <하퐁>은 일종의 흥미로운 실패작이었다. 반면 두 번째 영화 <천국의 전쟁>은 정말 실패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도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정말 지적이고 섬세하며 감동적이면서도 의미가 깊었다. 이 영화는 <밀양>과 함께 내게 흥미롭게 다가왔는데, 두 영화 모두 종교를 비웃거나 전복하려 한다기보다는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무언가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도 종교를 정치체제와 연관해 바라보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올해 본 영화들에서 어떤 경향을 읽을 수 있었나. =아까 말했듯, 굉장히 여러 영화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종교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매우 재미있었다. 또 몇몇 영화에 나온 낙태도 중요한 이슈였고, 환경이라는 사안도 더 많은 영화에 등장했다. 또 <알렉산드라>나 <페르세폴리스>처럼 잠재적으로 정치적 주제를 다룬 영화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전체를 특징지을 만한 어떤 하나의 주제나 경향은 떠오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칸영화제가 할리우드영화를 개막작으로 내세우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 대신 칸영화제는 60주년을 맞이해 완벽한 조화를 추구했던 듯하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홍콩 감독이 연출했지만 할리우드 스타가 나오는 영어로 된 영화다. 게다가 국제적인 합작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제쪽은 그것이 먹히기를 기대한 모양인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물론 35명의 대단한 감독을 모아서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올 칸영화제를 통틀어 최고와 최악을 꼽는다면. =최고작은 아까 말했던 문주, 코언, 이창동, 레이가다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이다. 그리고 60주년 기념 섹션이라는 이상한 부문에서 상영한 이탈리아 에르마노 올미 감독의 <첸토치오디>도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리고 최악이라…. 내가 3년째 올 때만 해도 ‘영화들이 정말 후졌군’ 하면서 불평했었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영화라 해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다면 기대보다 실망스러운 영화라고 한다면. =우선,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내게 약속해줘>가 있다. 쿠스투리차는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지만, 불행히도 <언더그라운드> 이후 그의 영화는 모두 자신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나 패러디로 느껴진다. 이제는 스타일만 남았을 뿐 텅 비어 보인다. 파티 아킨의 <천국의 가장자리> 또한 굉장히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캐릭터의 흐름 때문에 실망스러웠다.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의 <추방>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영화다. 그의 데뷔작 <리턴>은 정말 훌륭했지만, 그 영화의 리뷰를 읽고 스스로 천재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웃음) 이 영화는 최소한 1시간은 줄일 수 있었다. 하긴, 그들 모두 재능있는 감독이기 때문에 언젠가 뛰어난 작품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린치만 해도 <스트레이트 스토리> 같은 후진 영화를 만들잖았나. (웃음)
-새롭게 기대를 걸게 된 감독도 있나. =<XXY>를 만든 아르헨티나 루치아 푸엔초 감독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발견이었다. <문유랑가보>를 만든 리 아이작 정의 다음 영화에도 관심이 간다.
-칸영화제는 당신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사실, 칸영화제는 ‘그들만의 리그’다. 하지만 칸은 그해 영화의 흐름을 결정하고 새로운 재능들을 발견하게 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이 영화제는 전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운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내게 칸영화제는 2주 동안의 고된 나날이긴 하지만 말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