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 프랭크 피어슨이 있다면 충무로에는 유동훈이 있다. 두 사람이 걸어온 인생역정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혹시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닮아 있다. 두 사람 모두 일급작가이면서 후학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부었고 시나리오 작가의 지위향상과 권익옹호를 위하여 집요한 투쟁을 벌여온 인물들이다. 심지어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직을 여러 번 역임했다는 것까지도 빼다박은 꼴인데, 그 기간과 카리스마에서는 프랭크 피어슨이 유동훈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는 불과 37살 때 일찌감치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직에 오른 이후, 중간에 잠시 물러났던 5년간의 세월을 제외하고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재임기간만도 20년에 육박한다. 이 기록적인 장기집권(!) 덕분에 그에게는 ‘선거의 귀재’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닌다. 최근 이 선거의 귀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오랫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던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경선에 나섰던 이장호 감독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전남 고창 출신인 유동훈은 서라벌예대(현재의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중일 때도 정작 영화과 수업보다는 문예창작과 수업에 더욱 열을 올렸던 전형적인 문학청년이다. 덕분에 데뷔작도 프랑스의 문호 뒤마 피스의 고전을 우리 실정에 맞게 번안한 <춘희>. 오영일과 김지미가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당시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였고 훗날 김재형 감독에 의하여 리메이크되기도 한다. 데뷔 직후 유동훈이 보여주었던 창작의 열정은 실로 놀랍다. 그는 1970년 한해에만 무려 14편의 작품을 극장에 올렸는데 이는 국내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다. 더구나 그 14편 중 각색은 단 한편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오리지널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당시 그가 주력했던 장르는 액션영화인데 주로 암흑가를 배경으로 복수심과 의협심에 불타는 사나이들의 주먹다짐을 통렬하게 그려낸 작품들이다. 당대 최고의 액션스타 박노식과 장동휘 등이 단골로 출연했던 이 영화들은 요즈음 의뭉스러운 패러디로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류승완의 <다찌마와 리>의 원조쯤 된다.
그의 작가적 역량이 만개한 것은 1975년. 이해에도 그는 5편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중 <삼포가는 길>과 <마지막 포옹>은 문예영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황석영의 걸작단편을 각색한 <삼포가는 길>을 보면 새삼 우리에게도 거장들의 시대가 있었구나 하는 뿌듯한 감탄사를 발하게 된다. 문숙과 백일섭 그리고 김진규의 연기는 물론이고 김덕진의 촬영도 최고수준에 달한 이 향기로운 영화는 안타깝게도 이만희의 고별작품이기도 하다. 맹아학교의 음악선생님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마지막 포옹>은 보는 이마다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 따뜻한 감동의 작품. 80년대로 접어들자 유동훈은 제작 일선에 뛰어들면서 감독으로도 데뷔하여 <야생마>와 <가슴이 뛰네> 등 두 작품을 연출하기도 한다.
유동훈은 지난 수십년간 충무로의 중심에 버티어 서서 숱한 풍파를 겪었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국내 정상급의 시나리오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은 영상작가전문교육원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많은 후배작가들을 길러냈다. 시나리오뱅크의 설립과 저작권확보투쟁 그리고 표준계약서 작성의 의무화 등은 그가 시나리오 작가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집요하게 추진해온 숙원사업들인데 지난해부터 하나둘씩 가시화되면서 현재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1989년에는 외화직배반대투쟁을 벌이다가 방화혐의로 구속되어 한동안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유동훈은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의욕과 놀라운 추진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그는 최근 영화인협회의 신임이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대종상 운영제도의 투명화와 축제화 그리고 서울필름오피스 및 영화인회관의 설립을 올해의 당면목표로 꼽았다. 그의 계획대로 된다면 충무로의 지각변동도 멀지 않은 것 같다.
I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I
1967년 정진우의 <춘희> ★
68년 김기덕의 <아네모네 마담>
69년 전우열의 <영시의 부르스>
전조명의 <돌아온 선창>
70년 사병록의 <용호풍운>
임권택의 <애꾸눈 박>
조해원의 <안개 속의 탈출>
72년 정진우의 <섬개구리 만세>
74년 곽정환의 <이중섭>
이만희의 <들국화는 피었는데>
이두용의 <돌아온 외다리>
75년 이만희의 <삼포가는 길> ⓥ★
최하원의 <마지막 포옹> ★
77년 이혁수의 <제삼부두 고슴도치>
82년 김재형의 <춘희>
유동훈의 <야생마>
85년 이미례의 <고추밭의 양배추>
91년 김현명의 <서울의 눈물>
93년 김호선의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 ⓥ
96년 원정수의 <큐>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선 대표작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