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봄을 대표하는 영화제에 한국계 감독들의 작품이 대거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4월25일부터 5월6일까지 12일 동안 로어 맨해튼은 물론 첼시와 킵스 베이, 미드타운 웨스트, 어퍼 맨해튼 등 맨해튼 전역에 걸쳐 열린 제6회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지호 리 감독의 <내가 숨쉬는 공기>와 벤슨 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플래닛 B-보이>, 마이클 강 감독의 <웨스트 32번가> 등 한국계 감독들의 작품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됐다.
트라이베카에 뜬 한국계 신성 감독들
비경쟁 부문인 인카운터스 섹션을 통해 소개된 <내가 숨쉬는 공기>는 경마에 인생을 건 비즈니스맨과 미래를 볼 수 있는 갱스터, 마피아 보스에게 팔려간 팝스타, 짝사랑하는 여인을 살리려는 의사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작품. 지호 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데도 포레스트 휘태커, 앤디 가르시아, 브렌든 프레이저, 사라 미셸 겔러, 케빈 베이컨, 줄리 델피 등 초호화 출연진이 참여해 관심을 모았다.
뉴욕의 한인 타운을 배경으로 하고, 대표적인 한인 배우들이 출연해 촬영 당시부터 언론의 관심을 끌었던 <웨스트 32번가>는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소년을 도우려는 한국계 변호사와 한인 갱단 사이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특히 아시아인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의 프리미어에서는 마이클 강 감독은 물론 시나리오 공동작가인 에드먼드 리와 배우 존 조, 김준성, 그레이스 박, 제인 김 등 출연진과 프로듀서,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관객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20년 전 유행을 타고 사라진 줄 알았던 브레이크 댄스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플래닛 B-보이>는 세계 브레이크 댄스 대회 ‘배틀 오브 더 이어’의 결승에 참가한 팀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관객의 환호성을 크게 얻은 작품이다. 특히 ‘트라이베카 드라이브인’ 프로그램을 통해 야외 영사회도 가진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던 B-보이팀들이 즉석 공연까지 선보여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 <ESPN>과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사이트 ‘살롱 닷 컴’ 등 미디어의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 이들은 영화제 기간 중 맨해튼의 유명 댄스클럽인 웹스터홀에서 B-보이팀들의 실력을 겨루는 특별행사도 열었다. 뉴욕 지하철 지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세계 각 지역의 예선시합 장소를 전철역처럼 표현하는 방식으로 관객의 이해를 돕기도 한 이 작품은, 이미 영화팬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입소문을 얻고 있어서 여러 영화사와 배급 계약 가능성도 협의하는 단계다.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강세
올해 영화제에는 모두 47개국에서 출품된 157편의 장편영화와 다큐멘터리, 88편의 단편 작품들이 소개됐고, 이중 18편의 영화와 16편의 다큐멘터리가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작품상은 이스라엘영화 <마이 파더 마이 로드>에 돌아갔고, 신인감독상은 <투 임브레이시스>의 엔리케 베네 감독, 남우주연상은 <메이킹 오브>의 로프티 에드벨리, 여우주연상은 프랑스의 시저상을 수상한 파스칼 페랭의 <레이디 채털리> 마리나 한즈가 차지했다. 하지만 올해 트라이베카에서 가장 강세를 보인 것은 다큐멘터리영화들이다. 특히 70년대 뉴욕에서 시작된 그래피티(graffiti)의 역사와 현주소를 그린 <밤 잇>(Bomb It), 각각 상반된 이념을 가진 두팀의 우즈베키스탄 가족 서커스단을 다룬 <천국과 지상 사이>(Between Heaven and Earth), LA의 자폐아동 5명이 뮤지컬을 직접 작사하고 리허설하는 과정을 1년 동안 따라다니며 기록한 <자폐증: 뮤지컬>(Autism: The Musical), 수십년간 나치 전범을 색출해 칭송과 비난을 한몸에 받았던 사이먼 비젠탈을 다룬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요>(I Have Never Forgotten You), 성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캘리포니아의 한 워크숍을 소재로 한 <더 워크숍> 등이 화제를 모았다.
스타들의 연출작도 눈에 띄네
올해 트라이베카영화제의 또 다른 특징은 배우와 가수 등 영화감독이 아닌 유명 인사들이 메가폰을 잡거나 제작한 작품들이 대거 소개됐다는 것이다. 줄리 델피가 각본, 연출, 편집, 제작, 작곡을 담당한 <파리에서의 이틀>, <HBO> 시리즈 <앙투라지>에 출연 중인 케빈 코놀리가 감독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제작한 블랙코미디 <에덴의 정원사>, 배우 겸 토크쇼 진행자인 리키 레이크가 제작하고 직접 출연한 다큐멘터리 <비즈니스 오브 빙 본>(The Business of Being Born), 매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감독의 <케이크 이터스>, 림프 비즈킷의 리드싱어 프레드 더스트가 감독한 <찰리 뱅스의 교육>(The Education of Charlie Banks)>, <스파이더 맨> 시리즈에서 ‘해리 오스본’을 연기한 제임스 프랭코가 연출한 <굿 타임 맥스>, <이투마마>의 디에고 루나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차베즈>(Chavez), <와일드 패트롤>의 폴 소터가 감독한 <와칭 더 디텍티브스>(Watching the Detectives) 등 많은 작품들이 영화제를 찾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유명인들의 작품이, 실제 노출이 필요한 뉴욕 인디필름메이커들이 기회를 얻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트라이베카영화제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비난은 지난해에 비해 50%나 인상된 티켓 가격이다. 지난해 12달러였던 티켓 가격은 올해 18달러로 인상됐고, 이중 프리미엄 스크리닝이나 패널 디스커션 등 특집 프로그램은 25달러까지 호가했다. 이는 가을에 열리는 뉴욕영화제에 비해서는 여전히 저렴한 편이지만, 선댄스영화제나 토론토영화제보다 높은 가격이다. 영화제쪽은 티켓 가격 인상에 대해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작품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미디어는 트라이베카영화제가 점점 스폰서를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플래닛 B-보이>의 벤슨 리 감독
한국 비보이팀의 원동력이 크게 관심갔다
지난 1998년 장편영화 <미스 먼데이>로 선댄스영화제에 진출했던 한국계 감독 벤슨 리가 브레이크 댄스를 소재로 한 9년 만의 신작 다큐멘터리 <플래닛 B-보이>를 트라이베카영화제에 출품했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80년대 고등학생 시절에 브레이크 댄스를 췄었다. 비디오를 보고 혼자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렇게 잘 추진 못했다. 이후 <미스 먼데이>를 발표했을 때쯤 우연히 다시 브레이크 댄스를 접하게 됐다. 트렌드로만 알았는데 ‘배틀 오브 더 이어’라는 세계적인 대회까지 열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서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다.
-준비 기간은 길었는지. =발단은 9년 전인데 풀타임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다. 특히 2001년 첫 출전해 2위를 차지한 뒤 계속 상위를 기록한 한국 비보이팀에 크게 관심이 갔다. 20여년의 역사를 가진 다른 국가 팀들에 비해 5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팀이 엄청난 발전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독창적인 예술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힙합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브레이크 댄스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적, 정치적인 배경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트라이베카영화제의 소수 인종 영화감독을 지원해주는 ‘올 액세스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받았고, 2년이 지난 지금 같은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를 가질 수 있게 돼 무척 흥분된다.
-이번 영화제에서 힙합문화의 하나인 그래피티를 다룬 <밤 잇>도 소개됐는데. =힙합은 뉴욕 젊은이들의 문화를 대변하며 시작됐다. 이중에는 그래피티와 음악, 댄스 등이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특징이 있지만 젊은이들의 창조적인 배출구가 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플래닛 B-보이>가 <밤 잇>과 함께 영화제에서 소개돼 반갑다.
-촬영 중 어려웠던 점은. =영화학교를 다니지 않은 나로서는 <플래닛 B-보이>가 ‘진정한 학교’였다. 이 작품을 찍으며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었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자각하게 됐다. 과거에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지만 이제는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경험이 영화인으로의 나를 살리지 않았나 한다. 앞으로 하는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영화제에서 인상깊었던 경험이 있다면. =야외 상영회 때 작품에 출연했던 비보이팀들이 특별공연을 해주었다. 작품을 후원해주기 위해 자비를 들여 와준 것이다. 내게는 가족과 같은 친구들이 2년 만에 완성된 작품을 관객과 함께 보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