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미를 인터뷰 한다니까 몇몇 감독들이 내 등을 두드리며 오사마 빈 라덴 같은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테러하러가는 게 아니라니까... 게다가 그녀는 지금 임신 8개월째라구! 적지 않은 감독들에게 강호의 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요주의 인물로 찍힌 문제적 평론가를 만난다는 건 다소의 전운이 감도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나의 영화 <좋지아니한가>를 보고 씨네21 100자평에서 (감독 입장에선) 오독과 편견의 여지가 다분한 평을 써갈겼기에 더더욱 벼르던 참이었다. 임신 막바지라 거동이 불편한 그녀의 사정으로 인터뷰는 얼떨결에 황진미 평론가의 집에서 하게 되었다.
정윤철: (결혼사진을 가리키며) 못 알아보겠다.(웃음) 황진미: 결혼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정말 이상하더라. 이미 스토리는 다 만들어진 채로 사람만 가져다 박은 거다.
정윤철: 저런게 드라마다. 황진미: 사진 찍으시는 분이 생각하는 가부장적이고 19세기적인 구도속에다 사람만 박아넣은 것 아닌가.
정윤철: 스스로의 사진에서 가부장제와 가짜 드라마를 읽어내다니.(웃음) 황진미: 부부의 권력 관계는 각각의 부부에 따라 드라다. 그런데 저런 사진을 찍는 순간.....
정윤철: 사회가 바라는 모습이 되는거지. 근데 또 안찍고 넘어가기는 찝찝한 거 아닌가. 황진미: 결혼식 당일날 딱 두세시간 동안 찍은 사진이다. 배우나 모델이 참 먹고살기 힘든 직업이구나 싶었다.
정윤철: 하지만 대중영화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저런식의 익숙한 해피엔딩이다. (탁자위의 옥수수를 가리키며) 이걸 무표정으로 먹는 걸 찍어주는 결혼 사진관에는 아무도 안가겠지. 황진미: 공간도 웃기다. 무슨 19세기 귀족집 같지 않나. 벽지나 책도 그렇고.
정윤철: 그야말로 환상을 창조한 거지. 황진미: 이거야 말로 환타지.
정윤철: 관객이 원하는게 환타지 아닌가. 황진미: "누가 진실을 말하랬어? 누가 몰라서 보고 있는 줄 알아?"라는 거겠지.
정윤철: 대중영화 감독으로서 그걸 거부하는 것도 아주 힘든 일이다. 황진미: 관습과 리얼리티의 접점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근데 어떻게 하느냐가 제일 중요하지 않나. 그걸 잘 못하면 대부분 판타지도 리얼리티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다.
정윤철: 그러면 키취가 되는 거겠지. 사실 결혼사진도 대표적인 키취 아닌가. 영화속 신데렐라 같은 그림을 만든다거나.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사진은 뭘까. 황진미: 그건 사진에 안 담기는 거다.
정윤철: 한손으로 악수하면서 한손으로 식칼 들고, <달콤살벌한 연인> 같은 결혼사진이 되지 않을까. 환상과 실재의 의미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는 게 감독의 딜레만데, 그것의 성공여부는 평론가가 도와줘야할 몫이 아닐까. 황진미: 근데 사실 평론가는 되게 웃기는 직업이다. 감독은 영화 만들고 관객은 보는 건데 그 사이에서 뭘 하는걸까. 물론 꿈보다 해몽이란 말처럼 의미를 이차적으로 가공하거나 재창출하고 있다고 믿고 싶긴 한데, 그게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평론가가 칼을 갈아가며 글을 쓰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냥 지가 그렇게 느끼는 대로 쓰는 거다. 가끔은 허무하다. 의미를 풀이했으나 감독은 두 가지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난 몰랐는데 그런 뜻이 있었나보지. 혹은, 다 그렇게 생각해서 만든 거다. 니가 이야기 굳이 안 해도 다 안다. 뭘 그렇게 해석하고 난리냐. 어떤 반응이든지 뻘쭘하긴 마찬가지다.
정윤철: 감독의 무의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에 투영되는 거니까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마치 꿈해몽하듯, 평론가가 감독의 무의식이나 사회적 무의식을 콕콕 찍어내는 건 유용한 일 같다. 감독도 모를 때가 있다. 내가 쓴 평론이 무슨 역할을 할까라는 평론가들의 고민은 감독들도 똑같이 고민하는 지점이다. 황진미: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건 훨씬 힘든 일이다. 몇 년을 한편에 매달려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평론가가 글을 쓰는 건 훨씬 적은 노력으로도 가능하다. 아무리 심사숙고해도 열흘이면 쓴다. 사실 내가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윤철: 1~2년 고생해서 만든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하고 작품적으로도 평가 못받았을때, 그건 큰 좌절로 다가온다. <좋지아니한가>로도 비극적인 흥행 결과를 맞았는데. 흥행에 실패해서 화가 나기 보다는, 고생한 배우와 스탭들의 결과물이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지지 못했다는 게 더 화가 나는 것 같다. 황진미: <좋지 아니한가>는 영화적 관습을 깨려는 의도는 좋았는데 그걸 전달하는 과정에서 참신성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전작인 <말아톤>은 대단히 감동적으로 봤고, 빵빵한 배우진도 있고, 가족이야기니까 이데올로기도 있을테고, 기대를 하고 갔는데 충족이 안되더라. 결국 ‘어찌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라는 게 과연 올바른가 싶었다. 동의하기 쉽지 않다. 아버지의 혁대로 묶은 밥솥이 터지는 장면처럼 흥미로운 메타포가 있긴 했다. 그러나 리얼리티가 좀 떨어졌다. 컨벤션을 벗어난다고 해서 리얼리티로 수렴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이들 캐릭터가 리얼리티가 떨어지더라.
정윤철: 처음에는 만화 같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특히 일본영화에 가족 장르가 많지 않나. 그러나 캐릭터 자체가 평면적이라기 보다는 그냥 일상속의 판타지 같은 느낌 때문일 것 같다. 그런 것이 캐릭터가 마치 리얼리티가 없이 보일 수도 있다. 황진미: 달뜬 느낌이다.
정윤철: 그 뜬 느낌이 내가 좋아하는 거다. 공간도 한국이 아닌 듯 찍었다. 도시와 시골의 중간 느낌. 황진미: 근데 그 달뜬 느낌이 왜 안착이 안될까. 황보라의 얼굴마저 달 뜬 느낌이다.
정윤철: 그게 의도였다. 같은 가족을 다뤄도 그 방식이 <마라톤>과는 다르다. 두 영화 모두 주제는 ‘소통’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한국에서의 가족 이야기라면 언제나 아주 현실적이다. <가족의 탄생>도 캐릭터는 리얼하다. 그래서 차별성을 두고 싶었다. 리얼리티의 강박추 없이, 주제는 좀 더 현실적으로 가는. 황진미: 근데 그 과정이 타협적이다.
정윤철: 물론 혁신적이진 않다. 그러나 현재의 이데올로기에 안착하는 영화라기보다는, 한시적인 답안일지는 몰라도, 어떤 외향을 바꿀 수 없다면 내면의 시점, 즉 마인드라도 좀 바꾸면 좋지 아니한가... 그런걸 이야기하는 심플한 영화다. 황진미: 최근에 <우아한 세계>를 봤다. 이 영화 역시도 ‘어쩔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가족애를 빌어와서 조폭을 미화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현실적이고 절충적인 가족을 통해 돈벌어오는 자의 비애를 이야기한다. 그를 어떻게 가장이란 이름으로 존경할 것인가. 그러나 이젠 어쩔 수 없다. 그저 가족 외부에 남을 수 밖에...
정윤철: 임상병리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황진미: 진단검사의학이다. 환자를 보지 않고 환자의 검사 데이타만으로 증세를 분석하는 거다. 임상병리학에서 이름이 바뀐 건데 유전자 검사나 세포검사 등등을 하는 일이다. 의학계 내부에서는 기초의학적인 거지만 다른 전공의와 마찬가지로 전문의 자격증이 있는 의사이다.
정윤철: 그럼 영화는 어려서부터 원래 좋아하신 건가. 황진미: 전혀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극장에 간 일이 별로 없다. 웃긴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TV 문학관 같은걸 열심히 보면서 그게 영환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영화 <삼포가는 길>을 보다보니 TV 문학관이랑은 너무 다른 거다. 아하, TV 문학관은 영화가 아니구나... 그때야 깨달았다.(웃음) 그래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취미 이상은 아니었다.
정윤철: 배우 김혜수씨의 질문이다. 평론가들이 대체 어떤 경로로 평론가가 되는지 궁금하다는데. 황진미: 난 좀 특이한 경로다. 영화를 특별히 열심히 본 건 아니었지만 개봉작은 꼬박꼬박 챙겨봤으니 의대 다니는 사람으로서는 많이 본 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레지던트 전문의 2년차였나..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다. 당시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던 때여서 더 그랬나보다. 여튼 2~3주일에 걸쳐서 장문의 글을 썼다. 아는 사람들에게 보여줬더니 아무도 안 읽더라. 답답해서 누구라도 읽어봐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씨네21>에 이메일로 보냈더니, 뜻밖에도 당시 허문영 편집장이 전화를 해서 글을 싣기로 했다더라. 굉장히 긴 글인데 실을 수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특집으로 하면 실을 수도 있다더라고. 이런 일이 다 있나. 영화에 글을 써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그 글 하나로 데뷔를 한 거다.
정윤철: 그렇다면 대중적인 영화 관객으로 시작, 자신의 지식과 글재주를 기반으로 그렇게 관객에서 평론가로 바로 입성한 케이스네. 황진미: 그렇다고 해서 관객으로서 글을 많이 써본 것도 아니다. 근데 과거에 내가 어떤 단체에 있었는데 거기서 성명서들을 많이 썼다. 성명서란 게 원래 서론 본론 결론이 명확하고 간결하지 않나. 그게 도움이 된다. 내 글은 그래도 주어랑 동사가 딱 떨어지게 분명하다. 뭐는 뭐다. 그렇게 쓴다. 문단 구성도 서론과 결론이 있게 쓸려고 한다. 읽을수록 미로로 빨려 들어가는 글은 쓰지 않는다. 간결하게 쓸 수 있는 재주가 약간 있었고, 잡다구리한 상식 같은 게 있었고, 더 중요한건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는 거다. 나는 영화가 예술영화인가 아닌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의 욕구는 영화 속에 녹아있는 사회적 가치를 드러내는 거다. 이 영화가 지금 뭔가 사회적 발언을 하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사회가 응답할 바가 뭐냐. 이렇게 영화와 사회의 상호 리액션을 읽고 싶은 거다. 나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상관은 없다. 내 글은 나름 정치적인 입장을 담은 거니까 동의를 할 래야 다 할 수도 없는 거다.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전달은 됐냐는 거다. 욕들을 많이 하는 걸 보니 된 것 같다.(웃음) 어쨌든 뭘 말하려는 글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욕도 하는 거니까.
정윤철: 씨네21에 그 글이 실린 이후로는, 어떻게 계속 평론을 쓰게 된건가. 황진미: 시간나면 사무실로 와보라기에 가봤더니, 허문영 편집장이 그러더라. 글만 봤을 땐 아주 영민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네.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살아요? (웃음) 그러고는 다른 영화평을 맡기면서 바로 영화평론가 타이틀을 붙여주더라. 깜짝 놀랐다. 그냥 평론가라 부르면 다 평론가가 되는 것이냐고 전화해서 물었더니 그러시더라. 영화 글을 쓰면 평론가 아니냐고. 맘에 안 들면 영화 칼럼니스트 같은 걸로 바꾸겠냐길래 그것도 잘 모르겠더라. 좌우간 그때부터 영화와 인문학, 철학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긴 했다. 창피 당하지 않기 위해. 사실 의대 2년차에 휴학하고 딴 공부를 좀 한 게 있는데 그게 글 쓰는 밑천이 되었지 싶다.
정윤철: 여튼 글을 쓰면 돈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됐겠네. 황진미: 그랬다. 오오 이게 돈이 되는구나! 싶었다. 근데 그 뒤로는 짧은 글만 쓰다보니 별로 돈은 안 되더라.(웃음) 솔직히 내 직업이 의사니까 월급이 훨 많지 않나.
정윤철: 병원에서는 당신이 영화평론가라는 걸 모르나. 황진미: 모른다. 의료계와 영화계는 전혀 다른 세계다.
정윤철: 의료계와 영화계라는 두 세계가 황진미씨 개인의 삶속에서는 어떤 식의 포지션을 각각 차지하고 있나. 황진미: 둘은 아무 상관도 없다. 의료는 나의 전문직 밥벌이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이야기했지 않나. 의사로서 활동하는 것은 사적인 삶이다. 오히려 <씨네21>에 글 쓰는 게 공적인 거라고 생각 한다.
정윤철: 그렇다면 감독들이 영화라는 매체로 사회적인 매세지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진미씨는 비평을 통해 사회에 자신의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걸까. 황진미: 그러고 싶은데...그게 민주시민으로써의 공적인 삶이니까. 영화를 비평하면서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 그런 걸 영화 속에서 발굴할 수도 있지만, 크게 건져낼 것이 없더라도 좀 더 튀겨서 우기고 싶은 것들도 있다.
정윤철: 선의로 필요 이상의 과장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런 글을 영화를 사적인 삶으로 사는 감독이나 영화인들이 본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텐데. 황진미: 상처받을 수도 있을 거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욕을 할까. 요즘은 그들의 심정도 이해를 하게 됐다. 감독들은 스스로의 영화와 사적으로 긴밀한 정서를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내가 ‘이거는 뭐다’라고 직설적으로 주장을 해버리는데다 문체의 특징이 완전 성명서니까 그분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감독들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내 글의 뜻이 잘 전달이 됐나부지 싶기도 하고.
정윤철: 그럴 땐 이 일을 하는데 회의가 들거나 하지 않나. 황진미: 신경은 좀 쓰인다. 누가 그렇게 욕을 먹고 살고 싶겠나. 하지만 나는 돈벌이나 명성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쓰고 싶어 쓴 거다. 그래도 안티가 많아서 맘이 괴롭다고 남편에게 물어보면, 잘하고 있다는 거라더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면 글은 의미가 없는 거 아니냐는 거다. 누군가를 화나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거다. 그들 마음속의 뭔가를 건드리는 거니까.
정윤철: 어떤 영화를 보면 특히 화가 나나. 황진미: <300>은 화내는 것도 아깝다.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승질이 나는 영화들이 있다.
정윤철: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은 없나. 트뤼포가 그랬다. 먼저 영화를 보고, 그리고 평론을 하고, 마지막은 직접 찍어보는 거라고. 황진미: 그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체력도 안 되고, 또 여러 사람과 공동으로 작업하는 걸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한계를 잘 안다. 그런데 시나리오는 지난 여름에 한번 써봤다. 9일 만에 썼는데, 글을 쓰는 게 너무 재미있는 거다!
정윤철: 그런 게 자기 새끼에 대한 애착이다. 황진미: 한번 읽어봐 줬으면 좋겠다. 부동산 문제에 대한 영화다. ‘뉴타운 괴담’이라고. 폭동과 재개발을 둘러싼 호러물이다. 부동산 양극화의 문제를 다루는 건데, 등장인물이 좀 많고, 각 인간들이 재개발을 둘러싸고 어떻게 망가져 가는가가 나온다. 사람도 되게 많이 죽는다. 쓰면서 벌벌 떨었다. 소름이 쫘악 끼쳤다. 진짜 재밌다. 꼭 좀 봐 달라.
일단 말을 끊어야겠다...
임필성 감독의 질문이다. 왜 그렇게 극단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평론에 사용하는가. 황진미씨 평론은 마치 인터넷 댓글처럼 느껴진다. 한가지 잣대를 가지고 좋고 나쁘고를 가르는 것은 평론가가 감독에게 ‘내가 사준 옷 왜 안입고 왔어!’라고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터넷 댓글들이 그렇지 않나. 1점 아니면 10점. 예전 관객들은 영화가 이해가 안 되면 여러 가지 글들을 찾아보고 생각한 다음에 의견을 개진했는데, 요즘 관객들은 자신이 이해 못하면 곧바로 쓰레기 영화라 욕한다. 인터넷 문화의 특징이다. 황진미씨 평에도 그런 느낌이 있고, 인터넷 덧글 들에 또다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황진미: 인터넷 덧글의 시류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다. 내 글이 거기 영향을 줘봐야 얼마나 주겠냐. 내 영향은 미미하다. 자극적인 표현? 그저 어휘가 많은 걸로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내 글을 보고 학술용어가 많다고 욕하고, 또 어떤 사람은 비속어라고 욕한다. 누구는 어려워서 싫다고, 누구는 무식해서 싫다고. 나는 비속어도 어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평론에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풍부한 어휘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른 말 고운 말이 굉장히 표현을 옥죄는 경우가 많잖아.
정윤철: 요즘 영화평을 보면 영화에서 지나치게 이야기만을 중심으로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는 경향이 있는데, 황진미씨 평도 좀 그런 편이다. 황진미: 내 눈에도 미학적인 것들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공감을 하든 안하든 뭔가 생각하길 원한다. 왜 영화를 그 자체로 평가하지 못하냐 왜 영화에서 자꾸 정치적 의미나 파악하냐 이러는 건 정말로 잘못 된 거다. 미학적 분석을 하고 싶은 분은 그렇게 하면 된다. 그저 내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것 뿐이다. 가끔 미학적인 것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분석을 하는 사람에게 영화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체 무슨 애정을 어떻게 가지라는 거냐.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보라고? ‘순수한 어떤 것 그 자체’라는 말에 숨어있는 함정을 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내 글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 중에는 영화 매니아 출신, 혹은 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은 날더러 주로 무식하다고 욕한다. 나는 정치, 윤리, 규범적 판단에 더욱 관심이 많다. 미학적 판단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높은지 낮은지 정도는 안다. 5년 이상 미친듯이 영화를 봤는데 그 정도야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지. 내 눈에 후질 정도면 진짜 후진 영화 아니겠나.(웃음) 암세포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첨엔 안 보이다가 어 저거 이상한데, 점점 암세포라는 게 보인다. 나의 진짜 관심사는 근데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영화적 완성도가 아니라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이다.
정윤철: 솔직히 황진미씨가 정치적인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그런 반론들이 나온다기 보다는, 만든 사람의 의도는 밥이고 거기에 콩을 얹어 콩밥을 만들었을 뿐인데, 거기서 콩 만 딱 골라내서 이 영화는 콩요리의 일종이다. 라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 황진미: 할 수 없다. 원래 사람이란 게 자기 꼴리는 대로 보게 되어있는 거다. 콩밥을 지었으나 어떤 사람은 그걸 콩요리로 보고 콩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럴 땐 콩 요리 이야기를 하도록 냅둬야 한다. 콩에 집중해서 글을 쓴 사람 때문에 콩밥을 맛있게 먹은 사람의 가치가 낮아지는 건 아니다. 좋아서 먹은 게 어디가겠나. 내 글을 보고 왜 콩에만 집중했냐며 기분 나빠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고, 혹은 몰랐는데 여기 들어있는 콩이 유전자 조작 식품이래. 역시...그 콩밥을 먹었더니 기분이 나쁘더라니까.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거기에 콩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황진미: 하지만 기껏 콩밥을 해줬더니 콩이 유전자 콩인지 아닌지를 검토해서 밥을 짓지 않았다고 나쁜 밥이니 다 버려라.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밥 지은 사람은 뭐가 되는 걸까. 골라내고 먹으면 되지 왜 밥까지 먹지 말라고 하는가. 그런 반응도 당연한 거 아닐까. 황진미: 평론가가 무슨 공무원이나 사법부는 아니잖아. 한 영화를 봐라, 보지마라, 왈가왈부 할 수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론가가 사법부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거겠지. 하지만 이 영화 관람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평론가는 없다. 어차피 인터넷 별점에 더 좌지우지 되는 거 아닌가. 평론가가 칭찬한다고 영화 잘 되냐. 오히려 반대로 아닌가. 나는 그저, 이 영화, 내가 보기엔 이렇다오. 제기하는 거다.
정윤철: 평론가로 사는데 영향을 준 철학가가 있나. 황진미: 한나 아렌트. 하지만 솔직히 팬클럽 멤버처럼 좋아하는 철학가는 없다.
정윤철: 정신분석은 환자가 하는 말을 듣고 증상을 찾는 거다. 평론가도 영화를 보고 감독의 말하려는 무의식이나 이런 걸 찾아내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반하고 있는 철학이나 세계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황진미란 사람이 요즘 들어서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사상이나 이론은 뭐가 있나. 황진미: 니체와 들뢰즈를 이야기하고 싶지만, 내가 그들의 이론을 모조리 다 읽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걸 모두 다 읽든 안 읽든 사람에게는 상식이란 게 있지 않나. 푸코든 누구든 그들이 제기한 문제들이 뭔지는 안다. 그리고 그전의 니체나 이후의 들뢰즈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안다. 그저 상식의 틀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플라톤주의자다.라고 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근데 암암리에 플라톤주의자는 꽤 많더라. 나는 적어도 플라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플라톤주의처럼 이상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것에 대한 투항 정신은 있다. 나는 플라톤주의자랑 계속해서 싸워야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이성의 권위를 한번 까보려는 것. 그것이 현대 철학이 노력하는 거 아닌가. 플라톤주의와의 싸움도 마찬가지고. 황진미: 김기덕의 <시간>을 비평하면서는 들뢰즈를 가져와서 안티 플라톤적인 영화라고 썼다. 안티플라토니즘, 혹은 막시즘일 수도 있고. 나는 뭔가 이상화된 것들, 옳음의 절대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들, 사회적인 맥락과 무관할 수 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저 너머에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는 믿음들, 영화가 영화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것들이 싫은 거다.
정윤철: 황진미씨의 논리적인 비평 방식은 분석적인 평론에서 잘 발휘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위한 반론을 보면서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망상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썼더라. 황진미: 내과의사는 내과만, 소아과 의사는 소아과 공부만 하는게 아니다. 의대생들은 모든 과정을 다 배운다. 학생 실습을 나갔을 때 정신과 환자들을 직접 겪어봤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미친 사람을 직접 보고나서 제언을 하는 것과 보지 않고서 문학적 상상력으로 그리는 것은 다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미친 사람을 정말로 보고 만든 영화였다. 보통은 신경증적인걸 정신병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정신병적인 것에 신경증을 갖다대는 경우도 많거든.
정윤철: 하지만 ‘필름2.0’에서 박찬욱 감독과 대담할 때는 꼭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듯한 느낌으로 임했다. 왜 그랬나. 마치 다중인격 같았다. 황진미: 아니. 대담은 재미있었다. 근데 그 좌담에서 나의 역할은 ‘데블스 애드버킷’이었다. 누군가가 악역을 맡아서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져야 하는 자리였다. 김영진 평론가가 영화를 상당히 좋게 봤기 때문에, 나까지 용비어천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서 몇몇 부분들이 별로라는 지적을 한 거다. 당시 필름 2.0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나는 외부 사람의 자격으로 좌담에 들어간 거 아닌가. 나쁘다는 이야기도 해줘야 한다고 여겼다. 씨네21에서는 그 영화를 크게 칭찬하진 않았었고.
정윤철: 16세기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이성의 중요성을 말했지만 20세기의 라캉은 욕망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거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타자의 욕망이랑 자신의 욕망을 구별 못한다. 그러면서 타자에 대한 의식도 전혀 없다. 그것이 광기이다. 나의 욕망만 거울로 보니까. 비평에 있어서 이런 위험도 분명히 있다고 본다. 감독의 욕망이 아닌 평론가의 욕망으로만 영화를 바라볼 때 잘못된 해석을 낳을 수도 있지 않나. 황진미: 잘된 해석과 잘못된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세상에 오해란 없다. 나름대로의 이해가 있을뿐이다. 물론 감독의 입장에서는 싫겠지. 가령 임필성 감독. 내가 <남극일기> 비평을 아주 조롱하듯이 썼잖아. 영화 제작 도중에 벌어진 분란도 막 끄집어내면서, 결국 영화 제작 현장의 꼬라지가 바로 감독 니 꼬라지다. 이런 식으로. 정말 감독이라면 진저리를 칠 글이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감독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다. 영화를 찍었으면 그걸로 자신의 욕망을 다 이룬 사람이다. 그걸로 된 거다. 그런 사람을 내가 왜 보호할 의무를 져야 하는가. 어디선가 찌라시같은 글을 보고 가슴에 멍이 들었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거야 자기들이 알아서 극복할 문제다. 아니. 감독의 욕망은 이미 완성된 영화로 구현이 됐는데, 그렇게 이미 완성된 세계를 본 평론가가 뭔 짓거리를 한들 그 세계가 무너지는가. 평론가가 뭐라 하면 감독의 세계가 없어지냐구.
그에겐 마음이 없다... 곧 개봉할 어느 영화의 카피가 문득 떠오른다.
=감독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사이코패스인 듯한데... (사이코패스: 나로 인한 남의 고통을 모르는 자) 황진미: 아프든지 말든지 그들 문제다. 감독들은 평론가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사람들 아닌가. 게다가 대부분의 감독들은 에고가 강하기 때문에 내가 쓴 글 따위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정윤철: 아니다. 그럼 내가 여기 왜 왔겠나 (웃음) 많은 감독들이 굉장히 아랑곳한다. 황진미: 나는 의식을 안한다. 100자평이나 프리뷰. 뭐 서로서로 잘 아는 사이라면 대놓고 쓸 수는 없었을거다. 고생해서 찍은 것도 잘 알고 나쁘게 되면 안된다는 것도 아는 사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출발을 한 거였고 실질적인 인맥도 없기 때문에 그냥 쓸 수가 있다.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객입장에서는 도움이 된다.
정윤철: 타자시구나. 타자. 영화계 바깥에 있는... 황진미: 관객 출신 평론가 치고는 소수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지.
정윤철: 관객출신 평론가지만 모든 관객이 좋아하는 평론가는 또 아니지 않나. 황진미: 안티가 훨 많다니까.(웃음)
정윤철: 어릴 때부터 남의 시선에 별로 신경을 안 썼나. 자아가 세셨던 건가. 황진미: 요즘 같은 학교 환경이었으면 왕따가 돼서 못 다녔을 거다. 잘 못 어울렸다. 우리 때만해도 애들이 좀 착했지. 내 손으로 학교를 때려칠까 고민을 했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애들한테 디지게 얻어맞고 학교 못 갔을 것 같다.(웃음)
정윤철: 자 이젠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례분석, 그때 왜 그랬어요다.(웃음) <남극일기> 비평에서 감독을 송강호 캐릭터에 비교했다. 감독이 혼자서 도달한 곳이 바로 관객의 도달 불능점이라고 했다. 솔직히 영화감독과 제작과정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라고 생각한다.(웃음) 감독이 미친 의지로 끌고 가면 스탭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의문을 품는 건 모든 현장의 진실이다. 모든 영화는 그렇게 모험을 떠나는 거고, 죽을 힘을 다해서 목표지점으로 가는 거다. 그러다가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한다. 하지만 실패했다손 치더라도 감독의 집념 마저 비난받아야 할 문제인가. 과연 감독의 집념 조차 평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걸까. 어떻게 보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것처럼 미리 저지를 범죄를 단죄하는 단체 같기도 하고, 법으로 치자면 형법 불소급의 원칙을 깨는 듯한 일 아닌가. 글 자체는 읽는 재미가 있으나 탐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본다면 용서도달 불능점에 도달하는 거 아닌가. 황진미: 뭐, <남극일기>의 주제가 그거 아닌가. 잘못된 집념이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한사람의 광기로 인하야 그렇게 되었다는 거잖아. 황진미: 하지만 비평적인 생산 효과가 과연 있는 비평인가. 황진미: 당시 <씨네21>의 이종도 기자가 <남극일기>를 찬양하는 식의 글을 썼다. 집념의 패단이 등장하는 영화를 두고는 무슨 ‘미끄러지는 욕망’ 운운하는 글을 썼다. 19세기에 그런 문학 많았잖아. 죽음을 불사한 인간의 집념은 얼마나 위대한가 운운하는 것들 말이다. 말이 되냐. 이건 모두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가 그따위 짐념에 휘말려가는 짓을 실재로 안해 봤던가. 잘못된 지도자의 집념 때문에 세상이 어떤 꼬라지가 나는지 안 겪어봤나. 개발독재를 거친 사람들에게 그건 정말이지 진저리가 나는 이야기다. 그런 짐념의 패단에 대한 영화를 보면서 이종도 기자처럼 졸라 멋지지 않냐고 해석하는 건 큰일날 이야기다.
정윤철: 그런 지도자의 집념 때문에 현대사가 얼룩진 건 사실이다. <남극일기>도 결국 욕망이라는 것이 결국은 허무한 건데도 인간은 미친 희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거다. 영화가 제기하는 것은 <백경>처럼 그런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황진미: 맞다. 그런데 무슨 <노인과 바다>라는 둥, 인류 보편의 욕망의 본질이라는 둥, 그렇게 읽어내는 사람도 있다는 거다. 정확한 정치적 맥락에서 어떤 시대를 사는 누구의 욕망이냐가 중요한거다.
정윤철: 그래서 <남극일기>의 평론은 사실상 메타비평이었던 것인가. 황진미: 이종도 기자의 글에 대한 재비평이었다는 거다. 둘이서 찬반양론을 쓰게 됐는데, 이종도 기자의 입장은 미리 프리뷰로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반대 가설은 거기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정윤철: 하지만 제작현장의 고초처럼 영화 외적인 것까지 끌고 나왔다는 것은.... 황진미: 상도덕이 없느냐는 말인가.(웃음)
정윤철: <남극일기>가 완벽한건 아니지만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주 틀린 건 아니었잖은가. 욕망의 끝의 덧없음과 허무함. 황진미: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욕망은 덧없고 허무한 게 아니라 악질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정윤철: 하지만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감독의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마저 포기하라는 건 아주 죽으란 이야기잖나. 황진미: 무슨 소리. 감독의 욕망은 잘 구현했잖아. 뉴질랜드까지 가서 돈 쓰고 사람 고생시켜가며 영화 한편 만들어냈잖아. 이미 욕망은 다 이룬 거다. 내가 지금 이건희 회장 걱정하게 생겼냐. 다 이룬 사람 아닌가.
정윤철: 후 샤오시엔이 "영화는 제가 세상을 대하는 예의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비평은 "제가 영화를 대하는 예의입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 황진미: 나에게 그건 아닌 것 같다. 후샤오시엔도 나름 훌륭한 분이시긴 한데 그분의 세계를 다 알지도 못하고, 여튼 나에게 비평이 예의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왕싸가지다. 예의는 없다. 나에게 비평은 예의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해 소통하는 경로다. 영화평론가로 데뷔 안했다면 답답했을 것 같다. 씨네21에 정말 고맙다.
정윤철: <말죽거리 잔혹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그걸 마초 나르시시즘 판타지 영화라고 했는데, 또 유하 감독의 신작 <비열한 거리>의 평은 좋게 썼다. 이유가 뭔가. 둘 다 남자영화고 같은 감독의 같은 영화잖아. 혹시 <비열한 거리>의 주인공이 결국 파멸하는데 반해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은 멋있게 나와서? 황진미: <말죽거리>는 여기 한발 저기 한발 담구고 있는 영화다. 학교라는 사회, 그 위의 선도부와 선생, 또 그 위에 유신체제가 있고, 이런 식으로 영화가 권력의 체계를 잘 보여준다. 비판적으로 보이지만 비판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거다. 이 영화에서 현수가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라고 외치면 굉장히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하고, 또는 소심하고 어눌하게 있다가 갑자기 근육질의 남자가 되고, 두 얼굴의 사나이가 돼서 싸움에서 이기고 난장을 깐단 말이지. 그렇게 난장을 부리고픈 마음 속에는 묘한 정치적 욕망이 있다. 영화를 본 많은 남자들이 속이 시원하다고 느낀다. 현수의 폭발적인 난리 벙거지에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다. 나도 사실은 선도부도 까고 싶었고, 실은 박정희 새끼도 까고 싶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할 거다. 웃기고 있는 거다. 그 시절에 고등학교 다니면서 박정희를 진짜로 까고 싶었던 인간이 몇이나 돼냐.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 시절의 남자들에게 이상한 시대적 소화를 하고 있다. 이상한 면죄부와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다. 카타르시스가 있으면 안 된다. 그 시대를 비판하고 싶었다면 결코 장면을 그렇게 화려하게 찍으면 절대로 안된다. 다른 예로 <품행제로>를 봐라. 고등학교 짱도 짱처럼 안보이고, 싸움도 그냥 개싸움이다. 찌질하다. 불쌍하게 싸운다. 왠만하면 안 싸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엉겨붙어서 싸운다. 그게 맞는 거다. 그런 싸움에 무슨 대의가 있냐. 거기에 무슨 저항이 있냐.
정윤철: 영화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풀어주는 건 좋은 것 아닌가. 황진미: 아이고. 과연 그 시절 남자들이 그렇게 원을 풀어줘야 하는 존재들인가. 그들이 약잔가. ‘남들은 마초라지만 우리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었네’ 이렇게 회원상생을 원하는 가엾은 영혼들인가. 절대 아니잖아. 우리가 왜 그 찌질함을 풀어줘야 하냔 말이다. 어떤 억울한 영혼은 꼭 굿거리를 해줘야 한다. <우아한 세계>가 좋은 이유는, 우리 아버지들 불쌍하니까 경배해라. 아빠 힘내세요. 이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아한 세계>는 그런 식으로 구제받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보는 시선이 있다. 불쌍한 아버지에 대한 기도가 절대로 아니다. 근데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남자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이유가 뭐냐. 그러면 뭔 좋은 일이 생기나.
정윤철: 그렇다고 나쁜 일이 생기나. 황진미: 생긴다. 이상한 향수와 이상한 연대의식이 생긴다. 그러지도 않아놓고서는 자신이 꼭 그 시대에 저항했었다는 듯한 기이한 정치적 연대감이 생긴다. 옳지 않다고 본다. 반성을 하려면 반성을 해야지. 지들끼리 무용담 이야기하면서 연대감 구축하면서 군가를 부르면, 그게 한마디로 돌은 거지 그걸 보고 박수치고 싶나.
정윤철: 그런 향수나 회귀 없는 세대가 본다면... 황진미: 권상우 몸짱에 대한 판타지 영화지.
정윤철: 학교라는 권위에 카타르시스, 황진미식 평처럼 싸질러버리는 카타르시스가 있긴 했지 않나. 황진미: 그래서 그걸로 흥행했잖아. 그래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거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잘 만들었다니까.
정윤철: <친절한 금자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진미: 복수 시리즈 마지막 영화의 주인공은 하필 여자다.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됨으로써 뭐가 달리지나가 참 재밌는 비평적 포인트가 된다. 근데 문제는 박찬욱이 마지막 복수 시리즈에서 과도하게 속죄와 구원에 매달린다는 점이다. 이전 영화들은 상호복수에 정확하게 들이댄다. <올드보이>도 속죄와 구원의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금자씨만 속죄와 구원에 매달리는가. 이게 금자씨의 젠더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게다가 금자씨는 개인의 복수를 하는게 아니다. 복수는 사법체계 밖에서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건데 이 사람은 자기가 형법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건 이미 개인적 복수가 아니다. 왜 이 사람이 형법의 대리자로 나서야 하고 자기가 지은 죄 이상의 속죄와 구원의 표상이 되어야 하는가.
정윤철: 여성과 남성은 존재로서의 차이가 있는건데, 그걸 표출하는 것 자체가 나쁜건가. 황진미: 나는 금자씨가 <올드보이>의 최민식이나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에 비해 덜 인간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개념으로만 똘똘 뭉쳐진 형태의 너무나 차디찬 존재. 마치 싸이보그처럼 느껴지는 거다. 그녀는 모성애의 담지자로서의 주체고, 엄청나게 아름답다. 그리고 어딘가 이성적인 존재로만 느껴진다. 피가 흐르는 정념의 존재는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여자는 왜 이글이글 불타는 사악한 자로서의 독특한 개인이 되면 안 되는 건가.
정윤철: <달콤살벌한 연인>의 최강희 캐릭터가 있다. 황진미: 그건 재밌는데가 있는 영화다. 모성애도 죄의식도 없는 여자 살인자의 등장이 되게 재미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금자씨에게랑 오로라 공주에 질린 상태였기도 했다. 도대체 여자가 분노하는 지점은 왜 오로지 아이를 잃었을 때여야만 하는가. 근데 <달콤살벌한 연인>은 진짜로 나쁜 년 이야기를 하니까 재미있는 거다. 진자 나쁜 년도 있는거지 뭘. 나는 금자씨도 그런 캐릭터이길 바랬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폭마누라>를 보면서 너무나 천박한 영화여서 페미니즘을 들이댈 대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조폭 마누라는 남성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지위를 가진 자다. 스스로 더 남성화되어가면서까지 성공한 애다. 추미애처럼.(웃음) 하지만 보통 그런 캐릭터들도 사적인 영역의 문제, 특히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이전의 가부장적인 질서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혹은 결혼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90년대 <그대안의 블루>같은 영화들의 문제 의식이다. 여자가 전문직으로 성공했을 때 결혼과 일을 다 쫓아가면 다 잃는다. 하나는 포기해라. 하지만 <조폭 마누라>는 앗싸!한 방식의 결론을 보여준다. 만만하고 착한 사람을 하나 잡어서, 결혼을 해버리잖아. 굉장히 괜찮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정윤철: 그런데 페미니즘 비평이 전선을 계속 긋는다면은 기득권층에서는 거부감을 가질텐데. 황진미: 그럼 대성공이다. 둥글게 둥글게 글 쓰는건 내 목적이 아니다. 분란을 일으킬 거다. 그게 정치적 글쓰기다. 페미니즘만 정의냐. 물론 그건 아니지. 하지만 어떤 글에서든 계급적 당파성은 나오게 마련이고, 페미니즘도 정치적 문제로서 굉장히 중요하다.
정윤철: 문제적인 비평이 하나 더 있다. <타인의 삶>의 20자평 말이다. “그는 왜 그랬을까? 스토킹하다 느껴버린 퀴어영화인가?” 라고 썼다. 황진미: 김기덕의 <숨>을 보면, 이 여자가 왜 갑자기 사형수를 찾아갔는가. 사형수가 왜 이 여자에게 감흥되어가는가. 이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영화의 맥락상 그저 몇 장면으로 해결이 된다. 하지만 <타인의 삶>에서는, 주인공이 얼마나 극악한 비밀경찰인지를 미리 보여준 뒤, 그냥저냥 그가 도청하던 사람들을 살리게 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 사이는 설명이 되어야 한다.
정윤철: 간극이 너무 크다는 건가. 황진미: 내가 졸았나 했다니까.
정윤철: 일종의 퀴어 영화냐고 비꼬면서 이야기하신 건데, 물론 영화의 서두에서 보여지는 건 주인공의 정치관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정치관 위에 있는 가치관이 있다. 그걸 흔드는 사건이 문화부 장관의 성상납 꼬투리 아닌가. 가치관이 흔들리는 사건이 나타나자 메말랐던 동정심이 터져나온 것 아닌가. 사상과 양심의 싸움. 이게 감독이 던지는 질문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놓쳤던 인간의 마음과 양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데 황진미씨는 정치관에 대한 이야기로만 제한해서 본 게 아닌가. 황진미: 여튼 그 남자는 끝까지 사회주의자잖아
정윤철: 양심과 사상의 싸움인데, 양심이 결국 이긴 것 아닐까. 황진미: 나는 그렇게 둘을 대립하고 싶지 않다. 어떤 양심이든 사상에 의해 재단이 된다. 고문 경관 이근안을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정말 양심이 없어서 그랬나. 악마라서 고문경감이 되는게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양심이 있다.
정윤철: 이근안은 <타인의 삶>의 주인공 보다 양심이 적었던 거지 황진미: 난 그렇게 안본다. 나치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새디스트였나. 아니, 그냥 착실한 관료였을 수도 있다. 중세시대에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서 사냥한 사람들은 모두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신념하에 행동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양심이다. 다만 신념체계가 다를 뿐이다. 그걸 함량 미달의 도덕관념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타인의 삶>은 정치적인 문제를 너무 호락호락하거나 말랑말랑하게 본다. 비밀경찰도 인간이더라. 이건 정말이지 이상한 화법이다. <송환>같은 영화가 잘 만들어진 이유는 뭉뚱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송환>을 보고서 ‘간첩인 할아버지들도 인간이더라. 아이고 거기에도 인간이 있었네’ 이런 식으로 뭉뚱거리는 방식은 정말 싫다. 빨갱이도 인간이고 장기수도 인간이고 비밀경찰도 인간이고, 다 인간이라며 정치적으로 뭉뚱거리는 방식은 뭔가 중요한 것을 못보게 만들거나 잘못보게 만드는 방식이다. <송환>의 주인공들은 현재완료적으로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진 인간들인지 다양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북으로 송환이 되었을 때 어떻게 정치적 메타포로 이용당하는가도 나오지 않나. 그런 걸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송환>은 좋은 영화였다. 비밀경찰도 다 인간이었어. 고문기술자도 얼마나 사실은 힘들었겠어. 그런 식으로 뭉뚱그리는 순간 뭐가 나오나. 다 같이 반성? 다같이 면제? 결국은 전두환만 나쁜 놈인가? 대체 이 나라에는 전두환이랑 김일성빼면 나쁜 인간이 없다. 그들 배고 나머지는 다 같은 인간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체를 상실해버린다. 차라리 간첩을 간첩 대우하는 게 그 사람에 대한 존경이라고 생각한다. 다 인간이야. 다 할아버지야.
정윤철: <타인의 삶>에서 ‘타인’은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과 사상이 예술을 만나서 그것에 감화 받는 이야기. 사상이 예술과 같이 만나서 좀 더 완전한 인간을 만든다는.... 황진미: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퀴어영화인거다. 비밀경찰이 타인에게 개인적으로 꽂혀버려서 감흥이 된거 아닌가. 왜인지도 모르고 그냥 감흥 받아버린 거다. 그게 뭐냐. 그건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근데 인류 보편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넓어지지도 았고 결국은 특수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 됐잖아.
정윤철: 물론 쉰들러처럼 능력이 있으면 수백 명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또 다른 타자를 만나서 좀 더 인간적 마음을 느끼면서 인간애를 발휘한다면 뒤늦게 한 순간이라도 뜻하지 않은 값진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 아닌가. 철학이라는 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거라고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다. 그럼 예술은 뭐냐. 느끼는 방법을 배우는 거 아닌가. 삶에 대해 느끼는 것과 아는 것. 비평가가 영화를 처음으로 보고 글을 쓸 때도 감성과 이성이라는 게 있는데, 황진미씨는 환자를 다룰 때처럼 감정을 배재하고 이성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을때가 있다. 영화를 환자처럼 보는 건 아닌가.… 황진미: 그렇진 않다. 볼때랑 쓸때랑 다르다. 나는 영화를 볼 땐 정말로 감정적인 대응을 하면서 본다. 민망할 정도로 감독의 의도에 딱 맞게 반응을 해준다. 엉엉 울기도 잘한다. 근데 글을 쓸 때는 달라진다. 생각을 하는 거다.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쓰는게 아니다. 물론 <제니주노>를 보면서 만듦새가 허접하다는 걸 못느끼는 게 아니지만, 모성권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로 좋다는 거다.
정윤철: 근데 많은 사람들이 별로라 했던 <제니주노>에는 별점을 네 개나 줬고, 모두가 엄지를 치켜들었던 <타인의 삶>에는 두개 반을 줬다. 끌리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완성도 있는 영화보다 <제니주노>에게 별점을 더 주는 건 부분을 너무 침소봉대하는 거 아닌가. 황진미: 아니, 평론가가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잖아. 누군가가 별점을 더 주겠지.
정윤철: 정말 한 가지 요소가 좋으면 완성도의 문제도 모두 무마가 된다고 보나? 황진미: 약간은 그런 게 있다. 내가 무슨 방송윤리위원회도 아니잖나. 다들 별점 하나 둘 주는 영화일 게 분명하기는 하지만, 근데 이러저러한 점은 그냥 넘어가지 말고 주목을 해보자는 거다. 내 포지션은 얼터너티브라고 생각한다. 정파와 사파가 있으면 나는 사파다. 내가 어디서 날아온 돌인데?(웃음)
정윤철: 너무 튀려는 거 아닌가? 황진미: 말하자면, 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튐을 마다하지 않는 거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바가 있는데, 남들이 아니라고 할 것은 알지만 내 의견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 거다. 나는 얼터너티브이고 마이너리티다. 어차피 난 컬트라니까.
정윤철: 근데 어떤 관객들은 그런 평을 보고 분노할 수도 있다는 걸 알잖나. <타인의 삶>을 두고 퀴어영화라는 표현을 쓰면서 별점을 두개만 준다면, 상당히 많은 관객들이 황진미란 사람에게서 뜨악한 느낌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있을 거 아닌가. 황진미: 그러든가 말든가. 근데 퀴어영화라는 말이 나쁜 말인가. 퀴어란 게 원래 이해 안 되는, 이상한, 이런 뜻이잖아. 고딩때 <아마데우스>를 단체관람 갔는데 도무지 살리에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는 지대로 잘 살면 되지 왜 모차르트를 괴롭히는 걸까. 저거 뭔가 있네... 그래서 그것도 퀴어영화네 싶었던 거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게 본 영화 <타인의 삶>에 돌을 던진 그녀의 그런 결벽증적인 관점에 끝까지 동의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한국인들에 대한 경각심 불러일으키기 차원에서라면 그럴수도...자칭 얼터너티브, 마이너리티라니까... 이해는 안 되도 일단 인정.
정윤철: 남들은 설마 하면서 넘어가는 걸 그렇게 찍어내는 건 어찌보면 굉장한 상상력이 필요한 거다. 일종의 비약이잖아. 그런 상상력이 직관적으로 있나보다. 황진미: 뭐 위험을 불사하는 거지
정윤철: 모르는 사람들은 미친 거 아냐 싶기도 할 거다. 약간의 비약과 상상력은 평론의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면서 가는 것만이 캐릭터는 아닐 수도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 캐릭터들의 행동이 굉장히 황당하다. 하지만 저치들이 저렇게 얽히고 설키고 사나보다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덕이다. 점차 캐릭터 위주의 영화들이 더 많이 만들어질거다. 그러면 당연히 줄거리는 약해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잘 봤던 <바람피기 좋은 날>을 보면, 별 줄거리도 없고 캐릭터도 이해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바람을 피고 나서 아무런 벌도 없이 다시 가정에 들어가서 살잖아. 남자관객들이 되게 열받았었다더라. 황진미: 나는 그 여자들이 가정을 안깨는 게 오히려 불쾌하더라. 벌을 안받은 게 아니라 그러고 다시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벌이다. 바람 좋은 거 알았으면서 왜 그러고 살아?
정윤철: (웃음) 지금처럼 그렇게 비약을 하실 능력이 있는거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그런 비약까지 한번에 못간다니까. 관객을 위해 글을 쓰신다고는 했지만 좀 더 많은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더욱 유연한 자세도 전략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 결국 한국이라는 나라는 집단폭력적이고 플라톤적인 사회다. 오래오래 평론계에서 버텨야지 자신의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더 오래 전파할 수 있는거 아닐까. 지금처럼 만나서 이야기를 일일이 하기 전에는 오해 받을 수 있다 황진미: 근데 나에게는 선명성이 동력일 수도 있다.
정윤철: 아 물론이다. 하지만, 열받는다고 화염병 던져부러. 이런것도 중요하지만. 오래오래 버티면서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다. 후샤오시엔의 "예의"는 아니더라도, 평론가와 감독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더욱 잘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게 더 좋은 방법 아닐까. 몸도 무거우신데 너무 오래 시간을 끈 것 같다. 언제쯤 출산 예정인가. 황진미: 이번 달 예정인데 내가 겁이 좀 많다. 서른 아홉에 초산이라 위험 요소가 있다. 조산은 안하고 막달까지 온 것 만으로도 다행이다 싶다. 걸작을 만들려는 영화감독의 심정이다.(웃음) 당분간은 영화를 보러가기도 힘들 거다.
정윤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신분이 되는거니까. 황진미: 아이를 낳는 게 무가치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여기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정윤철: 관객 반응을 봐야 비로소 데뷔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데뷔 잘 하시기 바란다. 나는 "영화 대박나세요" 이런 말은 되게 싫더라. "좋은 영화만드세요"가 좋지. 좋은 아이 만드시라. 황진미: 좋은 엄마가 되는 게 좋은데.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정윤철: 이제 진짜 드라마가 시작되는거다. 황진미: 애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한다면 과연 아싸! 콜! 가지마!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 어릴 땐 매일매일 학교를 언제 때려칠까 고민했지만, 정작 내 애가 학교가기 싫다고 말한다면 흔쾌히 동의할 수 있을까. 이거 정말. 말이나 글로 하는 정치적 싸움이 아니라 진짜 삶의 정치적인 싸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는 거다. 아 참, <뉴타운 괴담>을 꼭 한번 읽어줬음 좋겠다. 이메일 주소 적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