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타임즈>는 세 가지 에피스드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다. ‘연애몽’, ‘자유몽’, ‘청춘몽’은 허우샤오시엔 자신의 이전 작품들인 <펑구이에서 온 소년> <해상화> <밀레니엄 맘보>와 각각 조응하며 발전된 것이기도 하지만, 전작들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사랑에 대해 각 에피소드들이 내뿜는 자신만의 빛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이다. <쓰리 타임즈>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이라는 또 다른 제목을 지니고 있는데, 이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작품이 ‘연애몽’이다. 1966년 어느 날 군 입대를 위해 떠나는 날 첸(장첸)은 당구장에서 일하는 하루코에게 사랑의 편지를 건넨다. 그 편지를 받아든 하루코는 이내 그것을 봉인해버리고, 첸의 고백도 관객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그 속에 가둬지고 만다. 허우샤오시엔은 첸의 고백을 편지 주인인 하루코가 아닌 그녀를 대신해 당구장에서 일하게 된 메이(서기)를 통해서 들려줌으로써 그 사랑의 진짜 임자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필연이 되어가는 우연을 차분하면서도 설레는 맥박처럼 표현하고 있다.
1911년 대만을 배경으로 하는 ‘자유몽’은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린다(예외적인 한 장면이 있긴 하다). 유곽에 사는 기녀 아메이(서기)와 대농장 지주의 아들이자 언론인인 창(장첸)의 사랑을 담는 자유몽은 그 모태라 할 수 있는 <해상화>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연애몽보다는 엄격한 형식미를 보여준다. 특히 자유몽은 인물들의 모든 대사를 자막 처리함으로써 끝내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가둬야만 인물의 감정과 시대의 부조리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자유몽이 사랑을 좌절시키는 시대를 실내 공간에 갇혀 있는 한 여성을 통해 엄격하게 표현하고 있다면, ‘청춘몽’은 그 반대편에서 한 공간에 머물지 못하는 두 남녀의 사랑을 안토니오식으로 묘사한다. 2005년을 배경으로 하는 청춘몽의 마지막 장면은 두 남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질주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어디로 향해 가는 걸까? 허우샤오시엔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떠남은 연애몽에서 첸이 메이를 찾아 떠나는 것과는 다르다. 첸과 달리 그들에게는 목적지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이 세편 중 한편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연애몽’을 택할 것이다. 빛과 어둠 속에서, 그리고 포커스 인과 포커스 아웃 속에서 기억의 양각과 음각을 새기는 연출의 신묘함은 영화의 이미지가 ‘사물의 표면’이 아닌 ‘사람의 피부’와 같음을, 그래서 영화와의 만남이란 단지 ‘시각적 보기’가 아니라 ‘촉각적 접촉’임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기억이 옳다면, 허우샤우시엔 영화의 첫 해피엔딩으로 기억될) 연애몽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적 행복의 정점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