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 날다>(1997), <괜찮아, 울지마>(2001)를 만들었던 민병훈 감독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아닌 한국에서 한국 배우들과 세 번째 영화를 완성했다. 수많은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첫 장편영화 <벌이 날다>가 명료한 알레고리와 주제의식을 표출하고 있다면, 세 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잎 새 한장만 덧씌워져도 무거움을 느끼는 영혼들을 묘사한다. 주인공 수현(서장원)은 빌립보서를 통째로 외우는 모범적인 신학생이지만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회의한다. 수현은 신학교 동기인 강우(이호영)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짐작하지만 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수현이 갈등하는 사이 학교를 떠난다. 강우는 자신이 수현에게 던진 “넌 가라면 갈 수 있고 멈추라면 멈출 수 있냐”라는 질문에 대해 행동으로 답을 보여준 것이다. 수현의 갈등 가운데는 수아(이민정)가 있고, 수현은 그녀에 대해서도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보인다. 수현은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한 수아가 플랫폼에 서 있는 걸 보고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린다. 그랬던 그는 수아를 닮은 여자를 본 날 연락도 없이 무작정 수아를 찾아간다. 그리고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그녀에게 던진다. 수아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했다가 자신과 다시 시작하자고 애원하는 등 수현은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모른다. 그런 수현에게 돌아오는 건 냉랭한 수아의 거절뿐이다. 그 뒤 마음을 잡지 못한 수현이 신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학장은 “확신하는 것과 흔들리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방학 동안 수도원으로 피정을 떠날 것을 권유한다.
학장의 소개로 찾아간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수현은 조금씩 자신을 괴롭혔던 고민에 대한 갈피를 잡기 시작한다. 수현이 몇명 되지 않는 조촐한 수도원 식구들을 통해 본 것은 신앙인의 이상적인 모범답안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들을 짊어진 채 신앙을 지키는 현실의 수도자 상이다. 강직한 원칙주의자 문 신부(기주봉)는 수도원 개발에 반대하며 싸우지만 몰래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에서 흔들리고 갈등하는 그의 내면이 엿보인다. 몇년째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세속적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정수는 수녀원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 다니엘라에게 마음을 주고 그녀를 위해 수도원 담까지 넘으려 한다. 평정을 찾아가던 수현은 기도실에서 수아를 닮은 헬레나 수녀를 보게 되고 그녀로 인해 다시 흔들리는 자신을 추스르려 오히려 그녀에게 모질게 대한다. 두려움은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 힘들게 만들고 진심과 선의를 가려버린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수현은 자신만을 보호하는 편협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많은 부분은 말이나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숲에 버려진 강아지를 데려와 옷장 안에서 키우는 수현의 행동을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죽어가는 강아지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다시 버리면서 강아지 목에 걸어준 십자가 목걸이가 다시 수현에게 돌아오는 사건의 인과관계는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죽어가던 아이가 문 신부의 기도를 받고 말끔히 병을 치유한 일처럼 이 영화에는 세상의 인과율로 설명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다른 법칙으로 보면 죽어가는 강아지와 아이는 하나의 이미지로 겹치고 시련과 은총은 세상 어느 구석에선가 인간이 알 수 없는 비율로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 민병훈 감독은 이 대사가 영화의 주제라고 말한다. 홍진(紅塵)과 번뇌(煩惱)가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면 가벼워진다는 것은 심신에 덧씌워진 티끌과 잡념을 털어낸다는 뜻이 될 것이다. 수현을 비롯해서 영화 속 인물들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신경을 갖고 있기에 그들의 고뇌는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매우 여리고 섬세하다.
수현에게는 수아도 수아를 닮은 헬레나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수현은 마치 포도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가지처럼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포도나무를 베어버리면 역설적으로 흔들리는 가지도 없어지고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뒷부분, 헬레나 수녀가 수현에게 감사와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감독이 생각하는 가벼워지는 길을 암시하고 있다. 헬레나 수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닮은 수현에게 고마워하고 용서해달라고 하지만, 사실 수현은 수아를 닮은 헬레나 수녀로 인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서를 얻은 것이다. 고요한 밤 수도원 뜰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용서라는 말은 공기 중에 퍼져 우리가 숨쉬는 대기를 구성한다. 아마도 감독이 표현하려 한 가벼워지는 방법은 그처럼 인과관계를 넘어선 감사와 용서가 소리없이 넘쳐나는 삶에 있지 않은가 싶다. 이진명 시인의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라는 시 제목처럼 용서는 내면을 울리는 소리없는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신학교와 수도원이라는 우리 영화에선 흔치 않은 공간을 배경으로 용서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만 굳이 신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지 않더라도 의미를 새길 수 있다. 그것은 자꾸 무거워지는 무게를 덜어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생명있는 모든 영혼이 짊어진 숙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