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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느림

주간지가 1년에 2번 남보다 좋을 때가 있으니 설과 추석이다. 합본호를 만들고 남들 일할 때 쉬는 달콤한 1주일. 불공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인쇄소, 우체국, 가판대 등도 설과 추석엔 쉬어야 하니 독자 여러분도 이해하리라. 이번 설 합본호를 만들면서 보니까 2주간 개봉작만 16편이 넘는다. 이미 극장에 걸려 설 연휴까지 이어질 영화들까지 합치면 30편 가까운 영화들이다. 2월 말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어서 이번엔 해외에서 호평받은 작품들도 많다. <바벨> <더 퀸> <드림걸즈> <리틀 칠드런> <아버지의 깃발> 등이 오스카 특수를 기대하는 작품들이다. 그런가 하면 <쓰리 타임즈>나 <눈에게 바라는 것>처럼 아시아에서 호평받은 영화들이 있고 <1번가의 기적> <복면달호> 등 한국 코미디들도 명절 대목을 노리고 있다. 풍성한 식탁이 차려진 것 같아 입에 침이 고이지만 걱정스런 점도 있다. 이중 몇편이나 2주 뒤까지 극장에 걸려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멀티플렉스가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만큼 영화보기가 쉬워진 건지는 의심스럽다. 개봉하고 1주일을 못 넘기고 떨어지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고, 교차상영으로 하루 한회 트는 영화가 많다보니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으면 보고 싶었던 영화를 챙겨보기도 힘들게 됐다. 영화를 소비하는 속도가 빨라지다보니 예매순위의 중요성도 커져서 예매순위를 둘러싼 수싸움도 치열하다. 이번주 리포트 지면에 나온 것처럼 가격덤핑을 통해서 예매순위를 높이는 편법도 등장하고 영화사에서 표를 사서 예매순위를 높이는 일도 적지 않은 걸로 알려졌다. 1주일, 아니 개봉 첫 주말에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첫 주말 관객 수가 다시 관객을 끄는 유인책이 되는 상황이니 너나 할 것 없이 악순환의 대열에 동참한다. 이런 시장구조에서 작지만 알찬 영화가 입소문에 힘입어 장기상영에 돌입하는 일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물론 영화계만 이런 식은 아니다.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일명 낚시질들은 크고 작은 언론사들의 경쟁으로 격화되고 있다. 자사 사이트로 들어오는 네티즌 수를 늘리기 위해 하등 중요하지 않아도 포털의 상위 검색어가 들어 있는 기사를 쏟아내곤 한다. 일분이라도 빨리 기사를 올리려는 속보 경쟁도 더 치열해졌다. 시사회에서 영화 상영 중에도 노트북을 켜놓고 기사를 송고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기사의 내용이나 질보다 속도와 양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할 여유를 갖기란 힘들다.

세상이 그렇게 빨라지고 있으니 너도 세상의 속도에 맞춰라, 라는 핀잔을 듣겠지만 빠른 것만 좋은 것은 아니다. 밀란 쿤데라가 <느림>에서 쓴 것처럼 쌩 하고 달려가는 차 안에서 감상하는 바깥 풍경과 천천히 걸으면서 감상하는 바깥 풍경은 전혀 다르다. 시속 60km로 달리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인간의 두 다리로 행하는 산책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영화도 비슷한 데가 있다. 이번호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지적한 것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현대영화에 비해 느리기 때문에 멈춰서 돌아보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역시 그 느림 때문에 특별한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낸다. 개별 영화가 그러하듯 영화산업도 느림을 품에 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검색어 경쟁, 예매순위 경쟁, 첫 주말 흥행 경쟁 등 모든 것이 빨라야 하는 상황에서 작은 영화, 요란하지 않은 영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살아남을 길은 없기 때문이다.

자화자찬이겠으나 잡지도 그래서 필요한 것이리라. 일간지나 온라인 뉴스보다 느리지만 그래서 생각할 여유를 주는 공간. 이번 합본호도 여러분과 많은 생각을 나누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분량을 공들여 준비했다. 2주간 요모조모 즐기면서 생각할 거리로 충분하길 기대한다. 모두들 즐거운 설을 맞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