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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2001-10-09

고양이를 부탁해

■ Story

착하고 엉뚱한 몽상가 태희(배두나), 커리어우먼의 폼나는 삶을 탐내는 혜주(이요원), 무기력한 조부모와 가난을 짊어진 지영(옥지영), 둘만의 아기자기한 우주에서 생활하는 쾌활한 중국계 쌍둥이 자매 비류(이은실)와 온조(이은주)는 인천의 상고를 졸업한 다섯 친구다. 서울로 이사한 혜주는 고부가가치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고졸 여사원에게 부과된 소모적 일과에 지쳐가고, 무너져가는 집에서 텍스타일 디자이너의 꿈을 삭이는 지영은 길 잃은 고양이 티티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리 겉도는 태희는 소원해진 친구들을 그러모으려 애쓴다. 다섯 소녀가 오랜만의 밤샘 모임을 가진 밤 지영의 집은 무너지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경찰의 조사에 입을 열지 않던 지영은 분류감시원에 수용된다. 지영을 면회하고 돌아온 태희는 지영이 감시원에서 나오는 새벽 작은 트렁크에 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쌍둥이에게 고양이를 맡긴다.

■ Review

<고양이를 부탁해>의 삽화 한 페이지는, 월미도의 바람 속을 걷는 다섯 여자아이들의 이미지로 채워졌다. 비린내 묻은 바다 바람은 어설픈 외투깃을 파고들고 나풀대는 앞머리는 눈을 찌르고, 예쁜 모자는 어디론가 자꾸 날아가려고 한다. 걸음을 떼기 위해 그녀들은 우선 스스로의 조그만 몸부터 부여잡아야 한다. 어느 순간에는 친구의 얄팍한 등이 바람막이가 되기도 한다. 스무살, 그해의 겨울.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내기 소녀들의 그 바람 많은 계절을 쓰다듬듯 바라본다.

세상에는 인물에 대해 별반 설명하지 않고 쉽사리 요약할 수 있는 영화도 많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다섯 주인공을 묘사하지 않고서는 한줄도 소개하기 힘든 영화다. 태희, 혜주, 지영, 비류, 온조는 영화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을 평범한 여상 졸업생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도입부터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물과 그들 각각이 속한 생활 공간은 꼼꼼히 구체화되어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소녀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방과 골목은 영화 출연을 위해 갓 칠해진 페인트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마치 영화가 찾아오기 20년 전부터 숨쉬어왔다는 듯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물과 공간은 이미 모서리가 닳아 있고 때가 묻어 있다.

세계 전도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 증권회사의 말단사원 혜주. 세계는 넓지만 그녀는 아주 작다. 퇴근길 전철의 돼지갈비 냄새가 역겨워 서울 입성을 꿈꾸는 혜주는 근면함과 싹싹한 미소가 언젠가 멋진 삶을 데려다주리라 믿으며 친구들에게 얌체노릇도 하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오후면 복사기에 걸터앉아 친구들의 휴대폰 번호를 더듬는다. 학창 시절 혜주와 단짝이던 지영은 정재은 감독의 단편 <도형일기>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도형으로 일기를 쓰던 꼬마 소녀를 많이 닮은 아이다.

다니던 공장이 문닫아 생계가 위태로운 지영은 저녁이면 좁고 눅눅한 방으로 돌아와 스탠드를 켜고 백지 위에 끝도 없는 문양을 그린다. 손수 만든 액세서리를 팔며 둘만의 완전한 가족을 꾸려가는 쌍둥이 비류와 온조는 제일 안정된 스무살을 보낸다. 알록달록한 주렴이 드리워진 둘의 집은 아이들에게 아늑한 동굴이 된다. 중산층 가정의 양념딸 태희는 친구들의 수호천사. 뇌성마비 소년 시인의 시를 타이프 치고 뱃사람을 꿈꾸며 친구들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어디로 갈까를 생각한 그녀는 결국 ‘장화신은 고양이’가 되어 가장 멀리 떠난다.

앙상블 드라마 <고양이를 부탁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소녀들의 손을 옮겨가며 단락이 바뀌는 릴레이식 구성이 되리라는 우리의 범용한 예상을 뛰어넘는다. 정재은 감독은 신인이라 믿기 힘든 자신감과 고양이처럼 유연한 손길로 다섯명의 인물을 모으고 다시 흩어놓으며 유려한 사방 무늬를 그려나간다. 다섯 소녀의 동선이 때없이 엇갈리고 만나는 동대문 의류상가와 월미도장면의 매끄러움은 이러한 미덕의 축소판.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휴대폰은 커다랗게 CG 처리된 문자 메시지, 화면 나누기 기법의 도움을 얻어 전화, 편지는 물론 BGM의 역할까지 도맡는다. 뿐만 아니라 <고양이를 부탁해>는 다섯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에서 유난히 활짝 핀다. 소음 속에 속마음이 오가는 록카페 생일파티, 내려지는 셔터를 향한 지하도의 질주, 마녀처럼 둘러앉은 옥상의 회합은, 심리적 적막함이 이면을 흐르는 이 영화에서 에너지의 정점을 이룬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처음부터 미세한 흔들림을 주목해야 할 숙명을 타고난 영화다. 대개 스무살 무렵의 여자아이들에게 거창한 사건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재은 감독의 소녀들은 ‘하드보일드’라는 수식어가 떠오를 만큼, 소리내어 울거나 불평하기를 즐기지 않는다. 삽입된 노래들처럼 <고양이를 부탁해>는 테크노의 냉정한 스타카토 리듬에 애수를 싣는 영화다. 예컨대 영화는 지영이 휴대폰을 바꾸고 그날 밤 고양이와 함께 새 휴대폰의 음악에 귀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낯선 건물의 창가에서 멍하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지영의 모습과 신원보증을 요구하는 면접 광경을 연달아 비춘다. 다음 장면에서 지영은 거울 앞에서 무표정하게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이처럼 <고양이를 부탁해>는 비탈진 드라마가 없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의 예민한 마음에 왈칵이는 분노와 애착, 기대와 실망이 조금씩 켜를 쌓아 무늬를 짓는 영화다. 그 무늬를 새기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화면은 움직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사려깊은 화가의 구도처럼 치밀한 짜임새를 자랑한다. 깊숙한 화면의 원경에서는 피로한 얼굴의 군중이 어디론가 바삐 밀려가고 프레임 구석에는 쪽배의 파란 깃발, 컴퓨터 모니터의 스티커 사진, 책상 밑에 감춰진 혜주의 고단한 맨발 같은 세부들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린다.

그런가 하면 방랑하는 거지 여인, 흰 위생모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식당 아주머니들, 전자레인지 속에 돌아가는 한약 그릇을 보며 망연자실한 태희의 엄마, 삭은 이로 김치를 베어먹느라 끙끙대는 지영의 할머니 등등 소녀들의 주변에 어른대는 쓸쓸히 늙은 여인들의 초상은 영화의 호흡을 깊게 만든다. 저마다 비밀과 스토리를 품은 듯한 <고양이를 부탁해>의 화면들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반면 편집과정에 일어난 스토리의 함축은 조금 과한 감이 있어 혜주의 언니가 떠나가는 사연이나 지영의 집이 무너지고 경찰의 의심을 받는 과정은 궁금증을 남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소름>에 이어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수확한 빛나는 처녀작이자, 대중매체에 의해 젊고 아름다운 이상적 육체, 소비사회의 특권적 수혜자로 그려져온 스물 무렵 여성의 기호들이 스무살의 실체와 얼마나 멀찌감치 있었나를 실감하게 만드는 뛰어난 여성 성장영화다. 태희, 혜주, 지영은 여전히 예쁜 여자애들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꽃보다 나무에 가깝다. 그들은 유포된 스무살의 이미지와 스무살의 현실 사이에서 누구보다 어지럼증을 탔을 스무살 여자아이들에게 위안이 될 친구들이다. 이중적이고 호기심 많고 훌쩍 떠나기를 꿈꾸는 그녀들은 과연 온순한 강아지보다 도도한 고양이를 닮았다.

그러나 스크린이 외면해온 사람들을 불러냈다는 사실만으로 마이너리티의 영화라고 부르기엔 <고양이를 부탁해>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 가난하고 고독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다. 그처럼 <고양이를 부탁해>는 청춘영화의 괄호 안에 묶여 있던 소녀들을 자유롭게 풀어 전위에 세울 뿐 아니라, 지금까지 잘 만들어진 남성 중심 청년영화가 그래왔듯이 성의 경계를 뛰어넘어 청춘의 현실을 끌어안는다.

정재은 감독의 연출은 시종 과묵한 큰언니처럼 덤덤하지만 그 뒤에는 벼랑 끝에 서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호밀밭 파수꾼’의 마음이 비쳐난다. 이 섬세하고 고집스런 손을 가진 젊은 감독은 너희는 망가진 게 아니라고, 남보다 조금 힘들고 더딜 뿐이라고 떠나는 아이들과 남는 아이들을 공평히 다독인다. 태희와 지영이 공항으로 향하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결말은 언뜻 스토리의 출구를 찾지 못한 주말연속극의 무책임한 비상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누구도 태희와 지영이 떠났다는 이유로 그 애들에 대한 근심을 쉽사리 거둘 수 없다. 언젠가 돌아올 그녀들 앞에는 권태와 두려움을 누르고 건너야 할 어둡고 긴 복도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스무살을 지나서도 인생은 나쁜 날씨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영화 속 아이들도 감독도, 그리고 우리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 <개봉작> 고양이를 부탁해

▶ "다섯 소녀가 속한 공간의 느낌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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