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이전부터 관객을 흥분시키는 감독이다”, “독특한 감수성으로 관객을 감화시키는 연출자다”. 한국의 봉준호 감독과 일본의 이누도 잇신 감독이 제3회 메가박스일본영화제에서 만났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11월19일, ‘영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 두 감독은 서로에 대한 칭찬과 질문을 시작으로 각자 개인의 영화적 경험을 털어놓았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데라와키 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대화가 다소 거창한 심포지엄 주제인 ‘영화의 현재와 미래’의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TV와 만화를 통해 영화적 감수성을 쌓아온 두 감독의 대화는 현재 한국과 일본영화의 한 경향을 설명하는 데 충분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터치> 상영 뒤, 90여분간 진행된 심포지엄을 여기 옮긴다.
데라와키 겐: 우선 봉준호 감독께 <터치>를 본 소감을 부탁드린다. 봉준호: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추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야구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화에 대한 것이다. 고교 시절 야구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야구의 정취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야구만의 리듬이 영화에 잘 묻어났다고 생각한다. <터치>의 원작을 보지는 못했지만, 같은 작가(아다치 미쓰루)가 쓴 작품인 <H2>는 재밌게 봤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만화는 많이 보고 있다. 이누도 잇신: 원작을 읽은 관객은 불만이 많더라. <터치>의 원작은 20권이 넘는다. 만화 팬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장면이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영화는 제작사쪽에서 영화화를 제안받은 프로젝트고, 여주인공이 나가사와 마사미라고 하기에 찍은 영화다. (웃음) 이번 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로보콘>을 보고 그녀와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라와키 겐: 두 감독은 서로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이누도 감독은 봉 감독을 어떤 감독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누도 잇신: 봉준호 감독 영화 중 맨 처음 본 게 <살인의 추억>이다. 그 당시 봤던 영화들 중에서 최고였다. 극본, 조명, 카메라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컨트롤돼 있었다. 최근 미국영화는 촬영을 많이 하고, 편집을 하면서 맞춰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영화가 산만해진다. 하지만 봉 감독의 영화에는 산만함이 전혀 없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좋아”, “됐다”라는 느낌이 든다. 지난주에 내가 무리하게 주선을 해서 (웃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을 만났는데, 봉 감독을 만나는 것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을 만나는 것과 똑같이 설레더라.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사람을 흥분시키는 감독이다. 이건 영화를 본 뒤에 “대단하다”고 느끼는 감상만큼 중요한 거다. 내가 너무 칭찬만 하는 건가? (웃음) 봉준호: 이누도 잇신 감독은 독특한 감성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가 등장해도, 전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관객을 자연스럽게 인물 곁으로 데려간다. 테마적인 강박이 없다. 인물들이 겪는 감정이 마치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이 관객에게 전해진다. 감정에 마술을 부리는 영화랄까. 강한 자극이나 충격은 없지만, 지진에 비유하면 강한 여진이 남는 영화인 것 같다.
나에겐 텔레비전이 시네마테크
데라와키 겐: 두 감독 모두 어떤 경로로 영화를 만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이누도 잇신: 5~6년 전만 해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영화를 잘 보지 않았다. 미국영화에는 관객이 많이 들었지만, 일본영화는 외면당했다.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생계가 불가능한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영화는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또 많이 봐왔다. 그러다 스스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느꼈고, 17살 때 처음으로 8mm영화를 만들었다. 그게 너무 재밌더라. 그래서 대학교 때까지 몇편 정도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 학교 졸업 뒤에도 TV광고 찍는 일을 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서 다시 한번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짧은 애니메이션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상을 받았다. 그 덕에 다음 작품을 제작해줄 회사가 나타났고, 좀더 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영화감독이 되었다. 봉준호: 영화를 만들게 된 과정은 이누도 감독과 참 비슷한 것 같다. 다만 나는 영화를 좋아했어도 극장엔 자주 가지 못했다. 어머님이 지구상에서 가장 세균이 많은 곳이 극장과 지하다방이라고 하셨다. 극장은 세균의 온상이고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곳이라고. (웃음) 당시엔 비디오도 DVD도 없어서 나에겐 텔레비전이 시네마테크였다. 특히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해주는 영화들을 즐겨봤다. 영어 대사라 알아들을 수 없으니 비주얼에 더 집중하게 되고, 무슨 이야기일지 멋대로 상상하고 이야기를 구성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내가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누도 잇신: 나도 초등학교 때는 TV만 봤다. 정말 재밌는 영화에서 정말 시시한 영화까지. 당시엔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추천해주는 작품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무작정 보면서 스스로 좋은 영화와 시시한 영화를 구분하고, 자신만의 명작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즐기는 거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우리 가족도 여행, 스포츠, 레저를 전혀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일년 내내 TV만 봤다.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의 흉을 보는 게 가족들의 취미였으니. (웃음) 샘 페킨파 영화를 좋아했는데, 페킨파 영화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될 때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조금씩 잘린다. 그런 걸 보면서 ‘여기는 컷이 연결이 안 되는군, 이런 장면이 있었겠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심지어 <겟어웨이>가 낮시간에 방송된 적이 있는데, 폭력적인 신이 나오면 분홍색 별표가, 애정 장면에서는 분홍색 하트가 등장하더라.
만화와 영화는 서로의 씨앗
데라와키 겐: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는 <터치> 외에도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 많은 것 같다. 이누도 잇신: <금발의 초원>도 만화가 원작이고, 이번에 찍은 <노란 눈물>도 만화가 원작이다. 내 영화에는 소녀만화에서 받은 영향이 압도적인데, 이들은 주로 49년조라 불리는 작가군들의 작품이다. 49년조는 1970년대 등장한 49년생 작가들의 집단을 말한다. 일본에서 소녀만화는 남자들이 읽을 수 없는, 읽지 않는 장르다. 하지만 49년조의 작품들은 남자들이 숨어서 볼 정도로 임팩트가 대단했다. 보통 소년만화가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계기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점프를 한다면, 소녀만화는 일상은 일상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렇다할 사건은 없지만 이야기는 신선하고 재미있다. 데라와키 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만화를 보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젊은 감독들은 만화에서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는 오히려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 만화와 영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어떤지 궁금하다. 봉준호: 나는 스스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우주왕자 고라망>이라고 도라에몽을 모방한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를 그린 적도 있다. (웃음) 한때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도 했었으니. 어릴 때는 거의 모든 장르의 만화를 다 봤다. 아무리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유리가면>과 <들장미 소녀 캔디>. 어린이 만화지만 다크한 감수성이 풍부한 <바벨 2세>, 기발한 SF물 <도라에몽> 등 내 영화가 만화에서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이누도 잇신: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한 적이 있나. 봉준호: <살인의 추억>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고, 동시에 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연극 공연이 있다. 절반 정도 원작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 2편 중 하나가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이누도 잇신: 그림이 먼저 있는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는 거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가. 봉준호: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들은 장면 연출이 굉장히 영화적이다. 만일 누군가 그 사람의 만화를 영화로 만든다면 굉장한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화 자체가 이미 뛰어나게 영화적으로 연출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이 질문은 오히려 만화가 원작인 <터치>를 만들어본 이누도 감독에게 묻고싶다. 이누도 잇신: 나는 <터치>와 <금발의 초원>을 만들면서 원작을 완전히 잊으려고 했다. 그림을 재현하는 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아주 유명한 장면들, 너무 유명해서 원작 팬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장면들은 최대한 동일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떼샷이 살아야 영화가 풍부해진다
데라와키 겐: <터치>를 보면 기존의 야구영화와는 다른 각도의 촬영들이 눈에 띈다. 만화의 지면을 영화의 영상으로 옮기면서 나타난 부분인 것 같은데, <터치>에서 주인공들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 보통 만화는 주인공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지 않나. 이걸 야구경기 장면에서 영화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누도 잇신: 그건 <터치>가 연애물이기도 하고, 시선이 교차하는 게 중요한 모티브니까 그런 것 같다. 기존의 야구영화와 다르다는 건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다소 이질적인 작품에서 힌트를 얻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터치>의 야구장면을 찍으면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렸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에는 주인공이 총으로 세명의 사람을 쏠 때 그 세명의 얼굴이 모두 ‘방! 방! 방!’ 소리와 함께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나는 이 느낌을 야구의 타격장면에서 떠올렸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찍을 때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쓰바키 산주로>를 떠올렸고, 최근 <비잔>이란 영화를 찍을 때는 <죠스>를 떠올렸다. 예전에 봤던 전혀 다른 영화의 장면들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내 영화에 힌트가 되는 것 같다.
데라와키 겐: <터치>의 군중신도 궁금하다. 주인공을 제외한 배경 인물들의 움직임도 굉장히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이누도 잇신: 그건 내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느낀 점이다. <괴물>의 강변장면에서 카메라는 주인공인 송강호를 잡고 있지만, 스크린엔 송강호 이외의 인물들까지 생생하게 비친다. 나는 영화의 이런 장면들이 작품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선 요즘 이런 부분들이 소홀해지고 있다. 예전엔 촬영소란 것이 있어 거기에 소속된 능숙한 엑스트라들이 이 부분의 문제점을 해결해줬지만, 요즘엔 그렇지 못하다. 봉준호: 그런 군중신을 한국에서는 속칭 ‘떼샷’이라고 하는데, 여기엔 나 혼자뿐 아니라 조감독, 연출부 등 모든 스탭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이누도 감독에게 궁금한 건 <메종 드 히미코>의 춤신이다. 댄스홀에서 많은 인원들이 함께 춤을 추는데, 그 시퀀스는 몇회에 걸쳐 완성된 건가. 이누도 잇신: 아침부터 점심까지 한번,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새벽 4시까지 또 한번 정도. 봉준호: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임과 동시에 주인공의 감정이 섬세하게 상승하기 때문에 무척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감독을 비롯해 스탭들의 숙련도가 대단한 것 같다. 얼마 전에 사카모토 준지 감독을 만났는데, 일본에선 보통 규모의 영화는 한달 반, 대작은 두달 반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 나는 찍었다 하면 다섯달이니 일본에서 연출제의가 들어오면 겁부터 난다. (웃음) 이누도 잇신: 아마 일본에서 봉 감독에게 연출을 부탁할 때는 빨리 찍는 걸 포기했을 것이다. (웃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도 일본에서 촬영기간이 긴 걸로 유명한데, 그 감독이 <살인의 추억> 이야기를 하면서 7개월 걸렸다고 하더라. 근데 실제론 5개월이라고 하니 유키사다 감독이 부풀려 말했나보다. (웃음) 봉준호: 전반적으로 부끄럽다. 이누도 잇신: 아니다. 나는 봉 감독이 계속 시간을 들여 좋은 영화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사실 그게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100회 촬영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된다. 그래서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매우 마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봉준호: 실제로 촬영기간에는 4~5kg 정도 빠진다. 편집하면서 제자리에 앉아 많은 양의 음식을 먹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긴 하지만.
영화는 보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데라와키 겐: 최근 어떤 감독들을 만나보면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전혀 보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1년에 5편 정도만 본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무엇보다 보는 행위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두 감독은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영화를 많이 봐온 감독인 것 같다. 또 두 감독의 영화는 재미가 있다. 영화는 결국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누도 잇신: 재미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흥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봤던 영화들을 떠올리면, 아주 재밌는 미국영화도 있지만 누벨바그 영화처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영화도 있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내게 흥미를 자아냈다. 모든 영화가 그 당시에 해답을 주거나 재미를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는데, 그때는 ‘너무 심술궂다’, ‘뭐야’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 다시 보니 정말 대단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라. 봉준호: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의 흥분도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누나의 손을 잡고 봤던 <사운드 오브 뮤직>이 기억난다. 영화가 세 시간이 넘어서, 극장에 들어갈 때는 낮이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밤이 되더라. 어릴 때는 그게 너무 충격이었다. 또 영화 자체의 흥분도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MBC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자전거 도둑>이 기억난다. 그때는 이게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작품인지, 네오리얼리즘인지도 모르고 봤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집에 있는 내 자전거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영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휴대폰 폴더를 한번도 열지 않고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