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창고 대개방 ② 남양주 한국영화소품센터
글·사진 이영진 2006-11-23

소품이 아닙니다, 명품입니다

시곗줄과 머리빗

오 헨리의 단편을 묶어 만든 에피소드영화 <마지막 잎새>(1978)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두 남녀가 서로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할 때 사용한 시곗줄과 머리빗이다. 남편은 시계를 팔아 머리빗을 사고, 아내는 머리를 깎아 시곗줄을 사준다는 <크리스마스 선물>의 설정을 따왔다. 이 장면에 들어갈 소품 마련을 위해 종로 일대 금은방과 시계방을 모조리 돈 끝에 오래된 명품을 고르긴 했는데, 이성구 감독이 원작에서처럼 금빛 시곗줄을 원해서 새로 도금을 해야 했다. 그 바람에 애초 오메가 시계에 달려 있던 은빛 시곗줄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대신 50년도 더 된 시계지만 밥만 주면 여전히 재깍거려서 김호길씨는 가끔 심심할 때 차고 외출한다고.

목칼

<춘향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품. 조선시대 형구 중 하나로,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에 채워놓았던 기구다. 차순하씨는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이 목칼 제작시 실제 나무를 써서 만드는 바람에 촬영 때 ‘통증을 호소하는’ 배우들의 불평이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후엔 합판을 이용해 색깔있는 종이를 붙여서 만들었고, 요즘은 스티로폼으로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시트지를 바르는데 모양이 감쪽같다고.

은 표주박

골동품의 가치는 제 본 그대로 남아 있어야 높다. 배창호 감독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에 나오는 은 표주박은 서울 광장시장을 돌았지만 두쪽 아니면 세쪽으로 파손된 것밖에 없었다. 파손된 것이면 뭐 어떻느냐고. 극중 은 표주박은 이미숙과 유지인이 서로가 자매임을 확인하는 증표였다. 허투루 눈속임을 할 순 없었다. 거의 포기하며 나오던 차에 마지막으로 들른 장안평의 한 상점에서 그때 당시 60만원을 주고 온전한 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 보석상에서는 소중한 것이니 다시 돌려주면 대여비만 받겠다고 했으나 김호길씨는 이만한 장신구를 언제 다시 구할 수 있겠냐 싶어 가족의 타박에도 지금까지 품에 지니고 있다. “이것도 집에 나뒀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다 타버렸겠지.” <TV 진품명품>에도 가끔 똑같은 모양의 은 표주박이 등장해 높은 감정가를 받는다고 하니 앞으로 이 골동품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파이프

소중한 건 나눠야 한다고? <금홍아 금홍아>(1995)에서 이상 역의 김갑수가 물고 다니던 파이프를 구하던 김호길씨는 결국 아버지 유품을 꺼내서 영화에 썼다. “이 파이프는 일제시대 때 나온 물건들 중에서도 모양이 독특하다. 이상 정도면 남다른 파이프를 썼을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그는 애연가였던 아버지가 고이 간직하기만 했던 소중한 물건을 꺼내 소품으로 썼다고 한다. “안 썼으면 아직도 부친이 쓰시던 트렁크에 그냥 있었을 거다.”

사모

궁궐 내 내시들이 착용했던 모자. 실은 고증에 어긋난 소품이다. 차순하씨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시 의상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다른 관리들과 뭔가 차별점을 주긴 줘야 하고 아이디어는 없고. 그래서 날개 떼고 관복도 흉배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썼는데 그게 무슨 정석처럼 굳어진거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궁중 내시들도 다른 관리들과 똑같은 모자를 썼더라고.” 영화에서는 <연산일기>(1987) 이후 고증에 맞게 제작된 사모를 사용하는데, TV드라마에서는 아직도 궁중 내시들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등장한다.

매듭

긴 끈을 자르지 않고 묶어서 만든 일종의 노리개. 이원세 감독의 멜로영화 <광화문통 아이>(1976)에 쓰였다. 극중 인물이 이 노리개를 틀로 짜는 장면에서 이 매듭이 나온다. 김호길씨는 서울시 중구 필동에 사는 누군가가 매듭을 기막히게 만들어내는 기술보유자라는 소문을 듣고 찾긴 했으나, 삼고초려는커녕 금세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제작을 의뢰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 시내 금은방을 돌고 돈 끝에 종로5가 근처의 보석상에서 이 매듭을 발견했다. 지금 보기엔 별로 값나가는 것 같진 않지만, 당시엔 상당한 액수를 지불하고 구입했다고 한다.

매화틀

당최 어찌 생겨먹은 물건인고. <연산일기>(1987) 시나리오를 들여다보던 차순하씨는 매화틀이라는 물건 앞에서 앞이 캄캄해졌다. 임권택 감독 또한 옛 문헌을 뒤적이다 이 괴이한 물건의 존재를 발견했다면서, 그저 왕이 변을 보던 용기라고만 했다. 임금의 변은 매화 향기가 난다고 해서 매화틀이요, 매우(梅雨)틀이라고도 불렸다는 이 해괴망측한 이름의 기원을 알아 무엇할 것인가. 조선시대에 임금은 바깥 화장실 대신 실내에서 요강과 매화틀을 이용해 대소변을 해결했다는 사실을 알아 또 무엇할 것인가. 차 대표는 촬영 얼마 전까지도 유아용 실내 변기를 사다놓고 작업실에서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다. 임금님의 향기로운 똥을 떠올리며 각고의 노력 끝에 내놓은 매화틀은 내놓기까지 한참을 망설였지만, 우려와 달리 반응은 뜨거웠다. 임 감독뿐만 아니라 현장에 들른 영화인들도 이런 물건이 조선시대에 있었느냐며 몇번씩 임금의 똥단지를 만지작거렸다. 차씨는 3년이 지나서야 서점에서 운현궁에 관한 서적을 둘러보다 매화틀을 발견했는데, 그림은 없었지만 설명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의 상상이 엉뚱한 결과를 낳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매화틀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캐묻는 방송 프로그램에까지 출연했다. <연산일기> 당시 제작했던 매화틀은 소품실 화재 때 없어졌고, 그림의 매화틀은 그 이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매화틀 내 변 받는 용기에는 쑥이 담겨져 있는데, 쑥 색깔을 통해 임금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기도 했다 한다.

1960, 70년대 베트남 지폐

김수용 감독의 <가위 바위 보>(1976)에 쓰인 베트남 지폐. 이 지폐는 극중 인물들의 사연과 닮았다. 사이공이 함락되자 한국으로 도망온 영화 속 렌 부인의 처지처럼 제작진은 이 돈 또한 베트남을 떠나온 보트피플에게서 어렵사리 구했다. 김호길씨가 충무로 뒷골목에서 바를 운영하던 베트남인들에게서 구한 이 돈은 남베트남에서 1960년대 후반에 발행된 것이다. ‘베트남의 강감찬’으로 불리는 쩐흥다오 장군의 초상이 그려져 있으며,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티에우 시절에 발행됐다. 1972년 초, 베트남 현지에서 이 지폐가 호랑이 그림의 오렌지색 돈으로 바뀌었고, 영화의 제작연도가 그로부터 4년 뒤인 것을 감안하면, 조국을 등진 보트피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돈이었다.

투전목

화투 전에 투전이란 놀이가 있었다. 투전은 투전목을 만들어 놀았다. 조선 중기에 중국 혹은 일본에서 유입된 이 투전목은 15cm쯤 되는 길이의 두툼한 종이에 그림을 그려 끗수를 표시한 옛날 화투다. 차순하씨가 이 투전목을 처음 만들어본 건 <이춘풍전>을 각색한 <돈바람 님바람>(1963) 소품팀에서 일할 때였다. 1940년대까지 보편적으로 쓰였다는 이 투전목 제작을 위해선 어릴 적 기억이 꽤 필요했다고. 종이를 여러 겹 붙여 만든 다음 그 위에 “좀 할 줄 아는” 중국어 솜씨를 활용해 상형문자를 써넣었는데, 이후 1980년대 여러 사극영화의 도박장면에 대여되어 쓰였다. 근데 투전도 밑장빼기가 가능하나?

여행가방

1920, 30, 50년대(왼쪽부터. 20년대 것은 고리짝 가방, 30년대 이후에 쓰였던 것은 화이바트렁크라 불렸다고 한다) 자주 볼 수 있었던 여행용 가방이다. 가구, 도자기, 장식용 소품과 달리 가방은 당시 국내 골동품 가게를 샅샅이 뒤져도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설령 대여섯개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몇 백명이 등장하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대규모 피난장면을 소화할 순 없었다고. 김호길씨 등이 결국 택한 건 중국에서의 반입. 이태우씨는 “방배동에 이조가구라고 우리랑 오랫동안 거래하는 골동품점이 있다. 그곳 주인이 사업상 중국을 자주 들고나는데, 그런 가방이 중국에 많다고 해서 그 편에 부탁해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쌍두마차

<요화 배정자>(1966)는 엄청난 대작이었다. 일례로 극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나오는 김지미는 당시 샐러리맨 월급의 100배에 달하는, 본인의 개런티보다 1.5배 이상 비싼 80만원 상당의 기모노를 입어 화제가 됐다. 일제시대 쓰였던 쌍두마차 또한 <요화 배정자>에 등장하는 소품 아니 대품(大品)이다. 기존에 갖고 있던 바퀴를 빼고는 모두 새로 만들었다. 비원에 가면 볼 수 있는 고종황제 시대 거리를 활보했던 마차를 모델로 했는데, 앞바퀴에는 맷돌 장치를 장착해 90도 이상 회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후 <의사 안중근>(1972) 등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했다. 아무리 잘 만든 마차라도 말의 도움 없이는 제구실을 못하나보다. 이태우씨는 손재주 좋은 촬영감독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장석준 감독의 만주 웨스턴영화 <지지하루의 흑태양>(1971) 때 이 마차를 기본으로 서부극에서 볼 수 있는 미국 서부시대 포장마차를 만들었는데, 말들이 지름 1m가 훨씬 넘는 대형 포장마차를 끌지 못해 촬영 때마다 스탭들 5, 6명이 마차를 밀어야 하는 중노동을 감당했다고 한다. 당시 국내에선 조련받은 말들이 거의 없어서 일반마를 구해왔으나, 이 말들은 매어놓아도 ‘X랄’하는 바람에 골치를 썩었다 한다. 덧붙여 그림의 마차는 새로 복원한 것이다.

일부 사진은 <소품으로 본 한국영화사-근대의 풍경>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