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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카메오 9인의 촬영 에피소드 [3]
씨네21 취재팀 2006-11-08
몰입의 쾌감을 선사한 뒤늦은 ‘카메오 데뷔’

기구한 카메오 출연사, <음란서생>의 심산

<음란서생>

<비트> <태양은 없다>의 심산 작가는 <음란서생>으로 데뷔작을 데뷔작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씻었다. 그는 <비트>에 차승재 싸이더스 FNH 대표와 함께 야구장에서 술마시고 주정 섞인 응원을 하는 아저씨로 출연했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 편집 과정에서 모두 잘려나갔다. 그 다음 영화인 <라이방>에선 목소리와 뒤통수만 나왔고, 대사까지 있었던 차기작 또한 기구했다.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이 단편영화를 만들었는데, 여관에 애인을 데리고 와서 들어가느니 마느니 씩씩거리며 싸우는 아저씨를 맡았다. 그런데 감독이 영화를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는 거야. 연습으로 찍은 거라 보여주기 싫다면서(웃음)” 주인공의 옆방에 들어 “무지하게 시끄러운 섹스를 하는” 연기를 목소리만으로 해낸 고난도 촬영이었지만 심산 작가의 진정한 데뷔는 2005년 <음란서생> 세트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미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음란서생>에서 심산 작가가 맡은 역할은 ‘업자1’도 아닌 ‘업자2’. 업자1은 본디 배우이자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김해곤 감독(<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몫이었지만 그가 촬영에 바빠 다른 배우에게 주어졌다. 그러면서 심산 작가는 한 장면을 더 따냈다. “<음란서생>에서 정빈과 윤서의 후일담을 알려주는, 빅 클로즈업으로 크게 나오는 출판업자는 원래 내가 아니라 업자1이었다. 첫 번째 촬영이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김대우가 한번 더 나와야겠다고 하더라고.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실력으로 따낸 거 아닌가. (웃음)” 신기하게도 카메라 앞에서 한번 떨어본 적이 없다는 심산 작가는 “전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무지하게 매력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장에서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동안 몰입하는 체험이 기가 막혔다”면서 새로운 길을 향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는 “<음란서생> 개봉하면 시나리오가 마구 들어올 줄 알았는데 연락하는 감독이 없다. 나 연기 잘하니까 이 기사를 본 감독들은 연락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대우 감독의 한마디

“작가라서 그런지, 감독 마음을 잘 알아”

“심산 작가는 좋은 학교 나왔고 직업도 지적인 일인데, 왠지 마음먹으면 양아치처럼 살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능청스러운 얼굴도 있고. 내가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심산 작가에게 주었던 역이 그런 성격이 강했다. 긴장도 안 하고 잘하기에 <음란서생>의 업자 역도 맡겨야겠다 싶었다. 진검승부를 한다면 직업배우에게 못 미치겠지만, 작가여서 그런지 감독이 이면에서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좀더 길게 나오는 배역을 주고 싶다.”

3대 국제영화제 경쟁작에 출연한 월드스타?!

15년 영화기자 경력이 카메오로, <엽기적인 그녀> <라디오 스타>의 배장수

<라디오 스타>

<라디오 스타>가 몇 번째 작품이냐고 물었더니, 잠깐 기다리란다. 컴퓨터를 켜고 ‘기록표’를 봐야 한다면서. “44번째네. 데뷔작은 김유진 감독의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마누라 죽이기>가 첫 번째 흥행작이고. 2001년에는 <엽기적인 그녀> <조폭 마누라> <두사부일체>에 출연해서 한해에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음, <태백산맥>이 베를린, <취화선>이 칸, <하류인생>이 베니스에 갔으니 3대 국제영화제 경쟁작에 모두 출연한 월드스타지. 아무도 안 알아주지만.” 유명인사의 예기치 않은 출연을 카메오라 부르지만, 배장수 기자는 반대로 특별 출연을 통해 유명세를 얻었다. 15년 넘게 영화담당 기자를 한 덕에 임권택, 강우석, 김유진 감독 등의 영화에선 단골 출연 배우. 당시 조감독이던 이들이 데뷔해서 그를 찾는 경우도 많다. <레이디경향> 기자 시절에도 연극 무대에 설 만큼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그는 “좋은 영화 볼 때마다 직접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보니 좋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원조교제를 하려다 전지현에게 한방 먹는 회사원, 인권영화 <그녀의 몸무게>에서 성차별 발언하는 교사로 나와 카메오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진 그는 작품마다 작은 변신을 시도한다. “갖고 있는 안경만 10개가 넘는다. 디자인이나 색깔이 다른 걸 준비해가서 분위기에 맞는 걸 착용한다.” 가끔 감독들이 안경을 벗으라고 할 때는 “상대 배우의 표정이나 대사를 파악하기 어려워” 대략 난감하다. 주로 단역을 맡다보니 단박에 오케이를 받으면 “이거 뭐야” 하면서도 “정말 내가 잘했나” 싶어서 짜릿하지만, “테이크가 계속될 땐” 어쩌지 못하는 자괴감도 든다고. “<오버 더 레인보우> 때는 감독이 맘에 안 들어해서 주말마다 부산에 내려가서 촬영한 일도 있고. <박하사탕> 때는 이창동 감독이 연기하지 말라고 해서 힘을 빼고 했더니 동시녹음쪽에서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타박 들은 적도 있고. (웃음)” 그에게 가장 큰 애로사항은 장기 지방 촬영이다. “<가을로>는 먼저 시켜달라고 한 건데 결국 출연을 못했다. 국장에게 촬영하러 부산에 3일 동안 내려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있어야지.” 출연작은 리뷰를 후배에게 맡기거나 따로 시간내서 일반시사회에서 관람한다는 그는 필모그래피가 쌓일수록 “영화를 볼 때 장점을 더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덧붙인다.

정승혜 프로듀서의 한마디

“부족한 리얼리티를 극복하는 연기력”

“<라디오 스타>에 사회부 기자로 나와달라고 부탁했더니 나이가 너무 많다며 먼저 걱정했다. 이준익 감독님이 괜찮다고 떠밀어서 출연을 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니까 리얼리티가 좀 떨어지는 캐스팅이긴 하더라. 본인은 뒤늦게 지역신문에는 나이 든 사회부 기자가 있긴 하다고 말하지만. 물론 연기는 이준익 감독님보다 훨씬 낫다. 다만 요즘은 비전문배우 중에서도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카메오 경쟁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좀더 많은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협박으로 시작해, ‘논란을 일으킨(?)’ 문제적 연기

법률 자문에서 카메오로, <바람난 가족> <손님은 왕이다>의 조광희

<바람난 가족>

조광희 본부장은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법정장면 촬영을 앞두고 <바람난 가족> 조감독으로부터 자문을 해달라는 SOS를 받았다. 주말을 이용해 흔쾌히 전주 촬영장을 찾은 것까진 좋았는데, 정작 현장에서 만난 조감독은 자문 대신 출연을 요구했다. “왜 말이 다르냐고 물었더니 ‘저 원래 그런 X인데요’라고 하더라. (웃음) 어쨌든 다음날 출연은 못하겠다고 하고 돌아섰다. 그날 밤에 임상수 감독과 같이 방을 써야 했는데, 법정장면 대사를 같이 쓰자고 해서 번갈아서 시나리오를 매만졌다. 그런데 촬영 당일 아침에 출연 이야길 꺼내더라. 내 영화 망칠 거냐고 협박하면서.” 일반 배우를 쓰면 법정 상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테레오 타입화된 판사 연기를 할 것이라는 임 감독의 우려를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마지못해 카메라 앞에 서긴 했는데, 난생처음 경험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오후 12시쯤 분장 들어가서 촬영은 6시쯤 시작했다. 대사가 입에 익으려고 하니까 감독이 주문을 하더라. 야비하게 해달라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야비하게 보여질지 전혀 몰랐다. 자정까지 찍었는데, 감독은 나중에 모니터 보면서 내가 일부러 야비한 연기를 안 보여줬다고 원망까지 했다.” 시사회 때 그는 <바람난 가족>의 법정장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쑥스러워서. “부자연스럽다”는 지적과 “리얼했다”는 칭찬, 극단으로 나뉜 반응만 들었다고. “대사없이 가만 앉아 있으면 된다”고 해서 응한 <손님은 왕이다>의 이발소 손님 역시 고역은 마찬가지. “안경 쓰고 하겠다고 했더니 다들 누가 이발할 때 안경 쓰고 하냐고 하더라. 그래서 안경 벗고 찍었는데, 초점도 안 맞는 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이었다.” <너는 내 운명> 때도 출연 요청을 받았는데, “다행히 미국에 가 있던 때라 부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그는 “감독이 어떻게 하라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것도 아니고 연기라는 것이 훈련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면서 앞으로 영화 출연은 안 할 계획이라고. 그런데 과연 뜻대로 될까. 영화인들과 함께 검열 철폐 등에 앞장서다 결국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영화사에 들어가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몇번 캐물었더니 슬쩍 덧붙인다. “꼭 해야 한다면 범법자를 해보고 싶다. 화이트칼라 범죄를 저지르는.”

심보경 프로듀서의 한마디

“상식적인 느낌에서 벗어날 줄 아는”

“<바람난 가족>의 법정장면을 보면, 다른 연기자들도 그렇지만 다들 자연스럽다. 법관은 특히 아우라가 센 직업인데, 혹시 다른 직업배우가 했으면 어떻게 나왔을지 모르겠다. 일반적인 법관의 톤으로 판결문을 읽었을 텐데. 조 변호사는 으레 상상하는 톤과는 아주 다른 연기를 보여줬다. 본인은 진땀나는 일이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제대로 들어맞은 캐스팅이었다고 자부한다. 꼬시는 역할은 임상수 감독이 다 했지만.”

그 밖의 영화인 카메오

감독의 직접 출연은 기본, 특정 직업 고수, 해외 진출까지

영화계 인사들의 카메오 효과가 빛을 발하는 곳은 일반 상영관이 아니라 기자시사회다. 감독과 영화사 대표는 물론이거니와 영화잡지 직원들과 홍보사 직원까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키득거리는 낮은 웃음소리는 시사회장을 은밀하게 감돈다. 기자시사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느끼고 싶은 관객이라면, 평소 영화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영화사 대표들과 감독들의 얼굴을 외워두는 센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장 효과가 강한 카메오는 영화감독이다. 자신의 영화마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진 감독은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촬영감독 홍경표와 함께 의뢰인을 연기했고, <아는 여자>에서는 취조 형사를 연기했다. 최근작 <거룩한 계보>에서는 정준호를 노리는 자객으로 등장해 스턴트 액션까지 직접 해냈으나 편집본에서는 모조리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임상수 감독의 <눈물>과 <그때 그사람들>, 자신이 연출한 <범죄의 재구성>(서점 손님)과 <타짜>에 등장(경찰로 나왔는데 편집본에서 잘렸다)한 최동훈 감독은 아예 카메오 출연에 재미들린 케이스. 변혁 감독은 <주홍글씨>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등장해 (전문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지휘연기를 선보였고, <눈물>에서 의사로 분한 임상수 감독은 <그때 그사람들>에서도 의사로 출연해 특유의 가늘고 높은 목청을 무기로 상당한 대사를 소화해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서 의대 가라는 꾸중을 많이 들은 듯한, 집념의 동급직종 연속출연이다.

영화사 대표들의 카메오 출연은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효과가 없는 경우지만 시사회에서의 웃음소리는 가장 큰 편이다. 진인사 양중경 대표는 친구 곽경택 감독의 작품에 상습적으로 출연해왔다. <친구>에서 경상도식 영어발음을 구사하는 영어선생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똥개>에서는 신용금고 악덕회장 오덕만으로 등장해 ‘카메오-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줬다. 카메오 출연을 극구 거부하거나 <씨네21>의 취재를 거부한 영화사 대표들도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재호가 연기한 경찰서 반장으로 애초에 내정되었던 사람은 싸이더스FHN의 차승재 대표. 봉준호 감독에 의하면 “송강호와 연기가 너무 비교될 것 같다”는 이유로 캐스팅을 거부했다고. <손님은 왕이다>에서 사악한 사채업자로 분한(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을 참고하라!) 마술피리 오기민 대표는 배우로서의 지나친 자긍심 때문에 카메오로 묶이길 거부했다. 잡지사 기자들과 홍보사 직원들의 카메오 출연도 종종 발견된다. 특히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씨네21> 편집장 시절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출연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곤욕을 치렀다. 관가에 잡혀가는 동학혁명가 전봉준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애절한 눈빛 연기가 압권이었는데, 지인들은 지나치게 느린 말투 때문에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있는 역을 맡지 못한 것 아닌가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 영화인들의 카메오 물량공세는 해외로도 이어졌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프랑스 감독 클레어 드니의 <침입자>에서 선박회사 사장을 연기했다. 인천 공항세관에서 필름이 손상되는 바람에 재촬영까지 해야 했던 김동호 위원장은 “두 번째라 연기도 더 좋은 것 같다”는 말로 강렬한 자신감을 내보이기도 했다. 가히 ‘카메오 한류’의 모범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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