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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카메오 9인의 촬영 에피소드 [1]
씨네21 취재팀 2006-11-08

미리 털어놓자. 여기 등장하는 9인의 카메오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카메오가 아니다. 카메오가 뭔가. “저명한 인사나 인기 배우가 극중 예기치 않은 순간에 등장해 아주 짧은 동안만 하는 연기나 역할”을 카메오라 부른다. 그런 깜짝 연기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을 카메오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 관객은 여기 9인의 카메오의 존재를 눈치채고 반응하지 않는다. 그저 단역배우 중 한명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기자·배급 시사회의 상황은 다르다. 일반 관객이 보면 절대 모를 누군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수군거린다. 시사회 직후에는 그들만의 카메오에 대한 연기 품평회도 자주 벌어진다. 가끔 귀동냥으로 그들만이 나누는 은밀한 재미를 접할 때마다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충무로의 은밀한 대표 카메오들, 9인의 짭짤한 에피소들을 모아 소개한다.

진정한 카메오의 자의식을 겸비한 ‘카메오 스타’

연출을 위한 카메오, <황산벌> <라디오 스타>의 이준익

<라디오스타>

이준익 감독이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게 된 것은 순전히 중국집 주방장 덕이다. 단역으로 캐스팅한 실재 중국집 주방장이 덜컥 겁을 집어먹고 촬영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스탭을 다양한 역으로 활용했던 터라 역할을 맡길 만한 스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감독님이 하셔야죠, 뭐.” 조감독의 무심한 한마디. 그 즉시 이준익 감독은 손에 밀가루도 묻히고 장화도 신은 채 흔쾌히 카메라 앞에 섰다. 비록 “그 컷은 드라마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장면이 아니어서 나간 거다. 그냥 풍경 스케치에 녹아드는 역할이니까”라고 겸손해하지만, 이준익 감독에게서 진정한 카메오의 자의식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두번 등장하는데, 앞의 것은 잘했지. 배달원 머리 때리고 고개 스윽 돌리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근데 뒤의 것은 좀 못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들켜버린 연기거든. 그래서 앞것은 80점. 뒷것은 40점 주겠다.” 후하다고? 자신이 출연하는 테이크를 한번에 오케이하는 것이 민망해서 눈치껏 몇번을 간 뒤에야 오케이를 질렀다는 고백에서는 ‘카메오 스타’의 자긍심이 물씬 묻어난다. 사실 <라디오 스타>는 이준익 감독의 첫 출연작이 아니다. “<황산벌>에서 신라군이 처음 공격할 때 함성 지르면서 망루에서 북치는 장사가 나였다. <아나키스트>에서 장동건 죽을 때 묘비 앞에서 바스트숏으로 스쳐가기도 했고, <공포택시>에서도 택시 운전사들 소굴이 나오는 장면에서 바스트로 살짝 나와.” 이처럼 이준익 감독 자신이 제작하거나 감독한 영화들에 지속적으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은 카메오 출연 경험이 감독으로서의 내실을 다지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연기자는 자신의 역할 하나만을 수개월 동안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감독은 전체를 보는 사람이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연기의 몰입도나 진실성을 보는 것은 배우가 감독보다 훨씬 우수하다. 그래서 그걸 잘 발견해내고 이해해서 영화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카메오로 출연한 경험들은 큰 도움이 된다.”

배우 안성기의 한마디

“배우의 감정이 참 많은 사람”

“아주 재미있다. 극의 흐름을 끊지 않는 역할이어서 카메오로서도 참 적절하고, 또 짧은 만큼 임팩트도 있는 역할 아닌가. 사실 이준익 감독은 배우의 감정이 참 많은 사람이다. 연기하는 걸 좋아하고, 또 촬영하고 나서는 자기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물어보기도 하더라. (웃음) 그래서인지 이 감독은 배우를 잘 이해하고, 배우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면서 촬영을 하기 때문에 현장에서의 미진함이 전혀 남지 않는다.”

캐릭터에 집중, ‘묻어가는’ 카메오 연기의 진수

배우 시절의 열정으로, <비열한 거리> <각설탕>의 최선중

<각설탕>

최선중 프로듀서는 출연 요청을 받으면 일단 거절한다. 간단한 단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2000)의 전도사를 혹 기억하는가. 포스터에 얼굴이 나오진 않았으나 최 대표는 조연으로 출연해 안성기, 박신양, 정은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때문인지 감독들은 그에게 꽤 비중있는 역할들을 내민다. <비열한 거리>의 유하 감독이 그에게 애초 제시한 역은 남궁민에게 면박을 주는 제작자 역이었고, <연애의 목적>의 한재림 감독도 교감 대신 먼저 수학선생 역을 권했었다. “잠깐 나오는 게 아니면 부담이 되고 쑥스럽다. <각설탕>의 수의사 역은 꽤 큰데 이정학 프로듀서가 내가 딱이라고 꼬드긴데다 유오성과 편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장면이라 결국 출연하게 됐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연우무대, 한양레퍼토리 등에서 설경구, 유오성, 이문식, 권해효 등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그는 배우 출신 제작자다. “<심바새매> 때는 내가 주인공이었다. 끝까지 버텨서 지금은 다들 유명한 배우가 됐고, 난 연봉 300만원을 못 버티고 다른 길을 택했지만. <킬리만자로>가 흥행에 성공했다면 배우 다시 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르지.” 일찌감치 영화에 뛰어든 동기 이경영의 추천으로 <구로아리랑>(1989)에서 야학교사로 출연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카메오 출연은 한참 뒤다. 배우로서의 못다한 열정을 달랜 첫 번째 작품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문성근의 문학회 후배로 포르노 책을 전해주는 인물을 시작으로 이후에 몸담았던 우노필름, 싸이더스 영화에서 그는 매번 등장했다. “영화 연기는 잘 몰라서 초반엔 주눅이 많이 들었다. <비트> 찍을 때 김성수 감독은 당시 조민환 프로듀서에게 “쟤, 누가 데리고 왔냐”는 말까지 했다. 그 뒤에 차승재 대표가 ‘넌 연기하면 안 된다’고 해서 몸을 사렸더니 의뢰도 별로 없더라. 최근에 나이 먹고 또 싸고 하니까 조금씩 들어오는 것 같다.” 자신의 연기는 튀지 않고 ‘묻어서 가는’ 무기교가 특징이라고 말하는 그는 “다른 카메오과 달리 나를 보여주기보다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꽤 많이 나왔는데도 어디서 봤더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게 그 때문 아닐까. 가끔 우연히 모니터를 하게 되면 내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싶다. (웃음)” 가장 많이 들어오는 역할은 선생님인데, 앞으로는 사절이라고 한다. “나도 비열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솔직히 악역을 해보고 싶다. 야비하면서 깐죽대는. <비열한 거리>의 황 회장 같은. 아, 근데 베드신 있는 연기는 정말 못한다.”

유하 감독의 한마디

“가격 대비 성능 우수, 먹물 냄새 적격”

“무엇보다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하다. 영화 찍다보면 단역 출연 장면에서 펑크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급히 기용하기도 용이하다. 출연료를 제하고 배우로서만 생각하면 글쎄. <킬리만자로>도 봤는데, 일정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이긴 해도 대성하긴 어려울 것 같다.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먹물 냄새 나는 인물은 그래도 적격이다. 지식인 역은 전문 배우에게 맡기는 것을 좀 꺼리는 편인데, 최 PD는 간지가 묻어나서 앞으로도 계속 출연시킬 생각이다.”

고도의 ‘등판’ 연기부터, 남의 대사 싹쓸이까지

카메오 경험 20여년, <아라한 장풍대작전> <손님은 왕이다>의 이춘연

<손님은 왕이다>

영화계 대소사를 맡아온 터인가. 최근 몇년 동안 뜸하다. 열혈순경 상환(류승범)에게 교통딱지 떼이고 스타일 구기는 국회의원(<아라한 장풍대작전>), 협박이 오가는 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이발하는 파출소장(<손님은 왕이다>)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기자시사회 때 중요한 대목에서 내 얼굴이 나오면 웃어버리니까. 다들 목숨 걸고 진지하게 덤비는 영화인데 해 끼치기 싫더라고.” 그래서 정한 원칙이 ‘삼고초려’다. 세번 이상 출연해달라고 간청해야 수락한다. “여러 번 이야기를 해야지 ‘아, 정말 내가 필요하구나’ 느끼는 거지.” 이춘연 대표는 원래 배우가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했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때도 연기 전공이었다. “그때는 잘생긴 줄 알았다. 대학에 갔더니 동기들이 무대 경험이 없어서 가르치기도 했고. 근데 2년 지나니까 나보다 훨씬 잘하더라. 내가 불편하게 생겼다는 사실도 깨달았고.” 연기는 “사나이가 할 일이 못 된다”면서 졸업 뒤 화천공사 기획실에 들어간 그의 데뷔작은 김현명 감독의 <아가다>(1984). 십자가를 지고 눈밭을 걸어가는 역할이었다. “감독이 컷을 일부러 작게 부르는 바람에 1km는 족히 걸은 것 같다.” 얼굴이 아닌 등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고도의 ‘등판’ 연기를 성실하게 수행해서일까. 이후로 출연 제의가 잇따랐다. 지금까지 찍은 30여편 중 그가 꼽는 영화는 <성공시대>. “초등학교 때부터 안스타(안성기)를 좋아했다. <얄개전>(1965)을 본 이후로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맘먹었고. 그런데 <성공시대>에서 만나서 맞대결을 펼친 거다. 얼마나 두근거렸겠나.” ‘봉사하는’ 마음으로 출연하는 터라 그동안 보수는 안 받았지만 예외도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데뷔작인 <키드캅>에서 백화점 경비4로 출연할 예정이었다가, 현장에서 발군의 연기를 선보여 나머지 경비들의 대사까지 싹쓸이한 대가였다. “비장하게 죽는 역할이었는데 이틀밤 샜다. 원래 예상 촬영시간은 30분이었는데…. 나중에 목욕하라고 50만원 주더라. 그때 김민정이 아역배우였는데, 우리 아들이랑 오랜 친구다. 근데 몇년 전에도 ‘너네 아버지 단역배우냐’고 물었다더만….” ‘영화’를 위해서 ‘출연’은 앞으로 자제할 계획이라지만, 접어둔 꿈은 언젠가 비집고 나오게 마련이다. “<황산벌> 같은 영화에 왜 날 안 썼는지 몰라. 전라도 출신이라 사투리는 화려한데 말이지”라며 아쉬움을 전한다.

오기현 감독의 한마디

“신인감독 위해서 미리 편집도”

“원래 <손님은 왕이다>의 파출소장은 전라도 사투리도 더 많고 세다. 그런데 안 어울린다면서 바꾸겠다고 하시더라. 표준어 같긴 한데 자세히 들어보면 사투리가 묻어나는 대사로. 대사가 좀 줄어들기도 했는데, 굳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자진 삭제하셨다. 신인감독 위해서 미리 편집해주신 셈이다. 촬영날은 화려한 입담 대신 종일 시나리오만 들여다보면서 연기에만 몰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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