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야’의 맛깔스런 튀김의 고소함
“하지메에게 프러포즈한 여자가 있었어. 너는 몰랐어? 음, 역시 요코에겐 얘기할 수 없었던 걸까….” 하지메에 대한 요코의 감정을 슬쩍 떠보는 남자. 등장인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 영화에서 하지메와 요코를 잇는 또 하나의 축이 있으니 그는 동네친구 세이지다. 하기와라 마사토가 연기한 세이지는 세이신도 서점에서 두 골목 올라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튀김식당 ‘이모야’에서 일하는 남자로 설정되었다.
▲ <큐어> <막스의 산> 등에서 서늘한 심리연기를 선보인 하기와라 마사토는 일본에서 방영된 <겨울연가>의 배용준 더빙과 <역도산> 설경구의 비서 역으로 출연하면서 한국에 얼굴을 알렸다. <카페 뤼미에르>에서는 동네 튀김집에서 일하는 요코와 하지메의 친구 세이지로 등장한다. 튀김집 ‘이모야’는 크지 않지만 늘 단골들로 북적거리는 정겨운 식당이었다. 입담 좋은 ‘이모야’의 주방장 아저씨가 정성을 다해 튀긴 푸짐한 ‘덴푸라’. 조개로 맛을 낸 된장국과 그득한 쌀밥이 함께 나오는 정식이 600엔(약 5천원)이다.
드르르 미닫이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서자 허허거리는 웃음의 주방장이 “어서옵쇼!”를 외친다. “그게 2년 전이었나, 3년 전이었나? 여기서 영화를 찍을 거라고 해서 감독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허우… 뭐라고 해서 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꽤나 유명한 사람인가봐”라며 단골처럼 보이는 동네 청년에게 자랑을 한다. 그리고 나에게 “대만에서 왔냐?”고 묻는다. “아니오. 한국에서 왔어요.” 대만 감독과 한국 여자 그리고 이곳 도쿄, 그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듯 의아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이건 서비스!”라며 커다란 단호박 튀김을 하나 더 튀겨서 밥 위에 얹어준다. 이렇게 푸짐한 ‘덴푸라’와 된장국, 하얀 쌀밥을 받아들고 나니 마스터의 죽음에 신산해진 마음도, 종일 걸어서 출출해진 배도 이내 든든해진다.
“전철소리를 녹음하다 보면 전철 안에 숨겨진 뭔가를 알게 될까?… 뭘 듣는 걸까? 네가 듣는 건 뭐야?” “글쎄… 매번 들리는 게 달라.” “응 … 그렇구나.” “매번 달라지는 게 재밌어…. 전철에서 뭔가 사건이 일어나면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그렇겠네. (웃음)” “그럼 내가 녹음한 소리를 들려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 <카페 뤼미에르> 중에서
▲ 요코는 실존인물이었던 재일 대만 음악가 장원예(江文也)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그가 생전에 자주 들렀다던 고엔지의 도마루 서점. 요코는 서점 주인에게 장원예를 아는지를 물어보지만 원하는 답을 얻진 못한다. 그리고 카메라를 꺼내서 서점의 풍경을 찍는다. 영화에서 요코가 왜 그렇게 자리를 계속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는지는 좁은 골목을 눈으로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요코는 골목을 빠져나오며 하지메의 전화를 받는다. “아! 하지메, 나 지금 고엔지역에 있으니까 15분 뒤쯤에 오차노미즈역에서 만나.”
요코가 아파서 하루 종일 잠만 자던 날. 집으로 찾아온 하지메는 부엌에서 조용히 요코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 그리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열차들 사이에 둘러싸인 남자. “전철의 태내”라고 명명하던 그 가운데는 마이크와 MD녹음기를 들고 있는 “눈이 외로워 보이는” 하지메가 그려져 있다. 아사노 다다노부가 직접 그린 이 그림을 쏙 빼닮은 공간이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던 오차노미즈역이다. 여러 개의 전철이 겹겹이 교차하는 그 풍경은 오차노미즈역 양쪽에 걸쳐 있는 다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 다리 위에서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혈관에서 뿜어져나오는 색색의 피처럼 시간과 순서를 달리하며 전철이 나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매번 다르게 들리는 전철소리”를 좋아하는 하지메가 오차노미즈역을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기묘한 전철들의 엇갈림을 뒤로하고 비로소 역에 붙어 있는 카페에 앉아 아까부터 참아왔던 커피를 한잔 마셨다. 아! 쌉싸름하면서도 정신을 쨍 하게 만드는 커피의 맛이라니. 타국 땅에서의 헤맴, 그 고단함이 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영화의 엔딩, 오차노미즈 역으로
<카페 뤼미에르>의 공간을 찾아가는 짧은 여행. 오즈 야스지로의 숨결을 좇아가는 벅찬 소풍. 그렇게 거기에는 오즈의 영화에서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아버지와 딸이, 그리고 따뜻한 밥상이 있었다. 기차는 순환하고 또 교차하고 전철 아래 강물을 따라 삶은 꾸준히 흘러가고 있었다. 오즈의 <도쿄 이야기>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그 전철에서 이제 21세기의 소년들이 키득거리며 만화를 읽고, 소녀들은 참새의 뜀박질처럼 빠른 손가락으로 이메일을 쓰고, 청년은 나른한 오후의 졸음을 달래고, 노인은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가만히 차창 밖의 지나가는 풍경들을 지켜보고 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오랜 시간 반복되어온 익숙한 풍경들이다. 예전에 <카페 뤼미에르>를 두고 누군가 ‘오즈에 대한 가장 예의바른 오마주’란 표현을 썼을 때 나는 그것을 그저 머리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영화 속 공간을 따라 걷다보니 허우샤오시엔이 그저 오즈의 영화를 복제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통해 그의 공간들과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오차노미즈역은 매우 독특한 풍경을 선사한다. JR 주오센과 지요다선 등이 교차하는 이곳은 역사 양쪽에 큰 다리가 있다. 그곳에 서면 보이는 것이 바로 <카페 뤼미에르>의 마지막 장면, 히토토 요의 노래 <히토시안>(一思案)이 흘러나올 때 펼쳐지는 풍경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하이힐>에서 멋진 하이힐을 신고 베스트셀러를 읽던 코끼리가 하차한 곳도 바로 오차노미즈역.
도쿄의 작은 골목들, 얽히고 겹쳐진 전철. 거기엔 100년 전 태어났던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뒤를 따라 걷던 대만 감독 허우사오시엔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한국에서 온 서른둘의 어떤 여자 역시 한참 동안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각자 다른 시기에 태어나 다른 공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레일들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풍경이었다. 나는 오즈를 위해 허우샤오시엔처럼 영화를 만들 수도, 히토토 요처럼 노래를 부를 수도, 아사노 다다노부처럼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저 그의 영화 속 공간을 눈과 발로 확인하는 것. 고작 이것이 나란 사람이 오즈에게 바칠 수 있는 최선의 오마주다. 한 때, 아니 여전히 내 삶을 가장 깊게 위로해주었던 어떤 선배를 위한 가장 성실한 구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