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재지이> 포송령 지음 | 김혜경 옮김 | 민음사 펴냄 <세계 호러 걸작선> 아서 코넌 도일 외 지음 | 정진영 옮김 | 책세상 펴냄
6권의 묵직한 하드커버로 출간된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실린 모든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우연히 예쁜 여자를 만나서 연애도 하고 섹스도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귀신(또는 여우)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랑 계속 살고 여자가 겪는 문제도 해결하고 심지어 애까지 낳아 편하게 산다. 가끔 그 남자들은 여자들을 한명 이상 데리고 같이 살기도 하는데, 여자들이 질투하거나 싸움하는 꼴을 못 봤다.
정말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하지만 태반이 이런 이야기이고 6권을 다 끝내놓고 보면 개별 이야기들보다는 이렇게 뭉쳐진 막연한 인상이 더 잘 기억된다. 다들 칭찬하는 포송령의 이야기꾼의 상상력은 비교적 제한된 곳에서 빛을 발한다. 절세미인 귀신과 연애하는 남자 이야기 말이다. 결국 <요재지이>란 명말 청조를 살았던 문화 백수 남자의 섹스 판타지의 정수인 셈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기 욕망을 자기 책에 멋대로 풀었다고 그를 비난해야 할까? 그 욕망이 구현된 결과가 썩 재미있다면 비난할 이유는 더 줄어든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천녀유혼>과 같은 중국영화 고전의 원작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고.
다음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두편의 <세계 호러 걸작선> 시리즈다. 제목만 <세계 호러 걸작선>일 뿐 주로 영어권 위주지만 상관없다. 오스카 와일드에서부터 헨리 제임스에 이르는 저명한 작가들이 쓴 호러 단편들을 모아놓았는데, 그 질이 꽤 좋다. 물론 다 무섭지는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일드가 쓴 중편 <캔터빌의 유령>은 작정하고 쓴 코미디이고 (아무런 정보없이 중학교 때 이 작품을 읽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레퍼뉴의 <손에 대한 고찰>과 같은 단편은 그 고답적인 느낌 때문에 당시 독자들이 느꼈던 공포감은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재와 주제는 다양하고 이야기는 대부분 재미있으며 가끔 정말로 공포감을 자극하는 작품들도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 단편집이 앞으로 호러영화를 만들거나 쓸 계획이 있는 사람들에게 썩 좋은 참고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가볍게 한번 읽어보고 지평을 넓혀보라. 세상엔 긴 머리 귀신 말고도 쓸 재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 두권이 맘에 든다면 같은 시리즈로 나온 <뱀파이어 걸작선>도 시도해보시길.
듀나/ SF작가 및 영화평론가
<온 세상이 비라면> 이치카와 다쿠지 지음 |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연문> 렌조 미키히코 지음 | 김현희 옮김 | H&BOOK 펴냄
착한 이야기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최대한 미뤄두었다가 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신파이고 감동을 조장하는 영화였지만, 선입견과는 달랐다. 그 남자는, 그런 판타지를 맞이할 자격이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원작을 쓴 이치가와 다쿠지는 ‘원초적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잔인함도 그리는 작가였다. <온 세상이 비라면>은, 그런 잔인한 세계를 정면으로 그린 단편집이다. “세상을 뒤덮은 악의가 나는 항상 두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인간입니다… 이들이 꿈꾼 장소가 정말로 있다면 나 또한 그곳으로 갔을 것입니다.”(이치가와 다쿠지)
<온 세상이 비라면>의 소년은, 미숙아로 태어난 이후 언제나 남들보다 뒤처져왔다. 이지메로 괴로워하던 그에게, 한 소녀가 말한다. 도망치라고. 온 세상이 비라면, 그 바깥으로 도망치라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주 좁은 곳이라고. 그건 결국,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못생긴 남자애에게 다가온, 마돈나. 그녀의 달콤한 유혹이 거짓이었음을 알고도, 그는 되뇐다. “그래도 우리는 있는 힘껏 살았었지?… 내가 죽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어둡고 눅눅한 장소지만 그건 끈질기게 살고 또 살아갈 거야.”(<호박 속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렌조 미키히코의 <연문>에 나온다. <러브레터>에서 쇼이치는, 가족을 버리고 한때 사랑했던 여인에게 돌아간다. 그녀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버린다. 가족도, 직장도, 미래도. <피에로>의 남자는,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상처를 입어도 웃으면서, 짙은 화장 뒤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인생은, 실수와 잘못 그리고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하게 살아간다. 인생이란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것이니까. 아니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까.
<연문>은 다나베 세이코의 정갈한 단편들처럼 중후하게 인생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추리작가로도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는 작품마다 하나씩 수수께끼, 트릭을 숨겨놓았다. 차분하게 읽어나가다 수수께끼를 발견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다. 감동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산한 삶의 무게와 온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나, 살아야 할 이유는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은 모른다 해도. <재회>에서 다섯장의 사진에 담긴 의미처럼, 그 누구도 모른다 해도.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 칼 인옘마 지음 | 장호연 옮김 | 책세상 펴냄
세계적인 로봇 공학자가 써낸,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한 여덟편의 소논문. 세상에는 이질적인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살아가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황혼과 회색지대의 진실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수학적 증명을 내연의 여인처럼 은밀하게 간직한 젊은 광부, 타자의 인간성을 차마 눈감을 수 없는 서부의 인디언 감독관, 삼림학자의 그루피. 이 몽롱한 단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그들이 좇는 신기루 같은 희망을, 그 수백 가지 결이 다른 외로움의 빛깔을 그려낸다. 때로는 ‘어떤 식으로든’ 확실한 것이 우유부단한 것보다 나아 보일지 모른다. 주저하는 그들의 마음이야말로 이 끊이지 않는 고독의 원천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쓸쓸한 존재들은 무해하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증명과 수식과 정리로 찾아지지 않는 해답을 따라 타인의 의식을 보듬는 문학적 상상력의 길로 떠난 이의 궤적. 책장을 덮고 눈을 감으면, 필사적으로 붙드는 골상학자를 할퀴고 깨물고 때리는 대머리 여인의 잔상이 이운다. 세차게 내쪽으로 끌어당길수록 내게서 벗어나는 그녀. 가슴 한구석이 소리도 없이 차근차근 무너지는 느낌에 대한 보고서. 그렇다. 바야흐로 가을 아닌가.
김선형/ 영문학 박사·세종대 초빙교수
<아홉 가지 이야기> J. D. 샐린저 지음 |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펴냄
255번이나 ‘갓뎀’이라고 외치는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는 단 네권의 책을 출판했다. 마지막 책이 나온 해가 1963년이고, 1974년 이후 그를 인터뷰한 기자는 아무도 없다. 작가는 은둔했으나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더러는 테러리스트도) 샐린저가 준 영감을 고백했다. <아홉 가지 이야기>는 이 결벽한 작가가 손수 고른 유일한 단편집이다. 이 책에 다른 제목을 붙이라면 <구토>나 <실락원>이 적당할 것이다. 작가는 상투성과 기만을 깊이 증오하고 순수와 천재성을 격렬히 숭배한다. 그 결과로 어린 현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단편 <테디>에는 싯다르타의 환생과도 같은 신동이 나오고,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에는 전쟁 중 만난 군인에게 자기를 위해 ‘비참함’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고 요구하는 소녀가 나온다. 물론 소녀는 확인부터 한다. “비참함을 좀 아세요?” 한편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과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는 생의 순결을 잃어버렸다는 비통한 진실을 자각한 어른의 비가(悲歌)다. <웃는 남자>는 그런 시련을 겪는 어른을 지켜보며 무시무시한 한기를 느끼는 아이의 시점으로 씌어졌다.
단어와 단어를 일부러 마찰시키며 숨을 몰아쉬는 샐린저의 문장은 집중을 요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비유는 언제나 경우에 딱 맞으며, 인물의 대화는 종종 두어 페이지가 지나서야 의미의 전모를 드러낸다. 랭보나 프루스트, 나보코프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안전한 선택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지만, ‘글래스 가(家) 연작’으로 묶이는 중편집 <프래니와 주이>와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는 글래스 남매가 곳곳에 등장하는 <아홉 가지 이야기>와 일습이다.
김혜리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사벨 아옌데 외 지음 | 송병선 옮김 | 생각의 나무 펴냄 <골프 코스의 인어들> 파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 민승남 옮김 | 민음사 펴냄
표지 귀퉁이에 조그맣게 ‘라틴여성문학소설선집’이라고 적혀 있는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는 주로 1940년대와 50년대에 태어난 라틴아메리카 여성 작가들의 단편을 싣고 있다. 그 ‘라틴+여성’이라는 변두리스러운 수식어가 이 책의 정체성이겠지만, 거기에 마음이 끌려 이 책을 산 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영혼의 집>의 이사벨 아옌데가 쓴 단편 <복수>가 읽고 싶을 뿐이었다. <복수>는 정치적인 내전과 권력의 전복이 단단한 혈연과 맞물려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복수담이다. 아름다운 처녀 둘세 로사는 자기 눈앞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삼십년을 기다리지만, 정작 사랑에 눈이 먼 남자가 무방비 상태로 찾아온 순간, 똑같은 사랑이 자기 마음도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과 증오와 기나긴 세월이 수증기처럼 몽롱하게 떠다니는 이 소설은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의 다른 단편들과도 닮은 점이 많다. 문학의 국적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지만, 여기 실린 라틴아메리카의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 순간과 영원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악몽이 반어법으로 표현되는 <훌륭한 어머니처럼>, 내전을 우화로 만들어버리는 <할머니와 황금다리>, 살아남고자, 분명 존재했던 해방구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예 잊어버리는 <독립 영웅>. ‘이야기’의 재미가 강한 이 소설들과 함께 자신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는지 고백하는 작가들의 담백한 서문도 가치가 있다.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자로 유명한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골프 코스의 인어들>은 무심한 자객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비정한 함정으로 뚝 떨어지는 듯한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이다. 첫 번째 소설 <골프 코스의 인어들>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총상에서 회복된 대통령 보좌관의 파티를 보여주며, 그가 회복하지 못한 무언가를 지적하고선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뒤에 이어지는 단편 열편은 언제 주인공에게 파국이 닥칠까를 걱정하며 읽을 수밖에 없다. 환상에 도취되어 지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몽상가>, 그저 총격사건을 목격하고 경찰에 전화했을 뿐인데 미로 속에 갇힌 생쥐 신세가 되어버리는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 부유한 자의 작은 동정심이 얼마나 무용한지 알려주는 <크리스마스에 사라진 시계> 등의 인물들은 아주 가끔 난관을 헤치고 무사히 일상으로 복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금이 간 채, 심할 때는 산산이 조각이 난 채, 지면 뒤로 사라져버린다. 자기 마음속에서 태어난 인물들을 이토록 냉혹하게 다루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김현정
<오늘의 SF 걸작선> 그렉 이건 외 지음 | 정은영 외 옮김 | 황금가지 펴냄
<오늘의 SF 걸작선>은 SF 편집자 데이비드 하트웰이 2002년에 발표한 SF 단편 선집의 번역판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이 단편집의 방점이 ‘SF’가 아니라 ‘오늘’에 찍혀 있다는 사실이다. 근래 발간된 SF 단편집들은 이전에 번역된 작품들의 재탕, 삼탕, 중탕에 가까웠다. 그래서 브루스 스털링, 그렉 이건, 로버트 셰클리, 어슐러 K. 르 귄 등 현존 거장들의 최신 단편 23편을 모아놓은 <오늘의 SF 걸작선>은 장르팬들에게는 신선한 성찬을 제공한다. 물론 버릴 것 하나없는 성찬이다. 유려한 이야기 속에 인류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안사락족의 계절>은 딱 어슐러 K. 르 귄의 지장이 찍혀 있는 단편이고, 닐 애셔의 <사막의 눈>과 마이클 무어콕의 <침묵하는 성채의 타락한 마녀>는 구식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멋지게 증명한다. 화룡점정은 그렉 이건의 중편 <단일체>다. 양자컴퓨터가 창조한 인공지능 아이를 키우는 과학자 부모의 이야기 <단일체>는 장편 <쿼런틴>과 마찬가지로 양자역학과 패러랠 월드(평형위주)를 설명하는 이론들로 가득하지만 일독의 가치가 있다. 이 단편선의 또 다른 미덕은 쓸데없이 무겁고 비싼 하드커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체된 고향길 고속도로나 번잡한 친척들 모임에서 잠시 지적인 탈출을 요한다면 가볍게 가방 속에 쑤셔넣도록. ‘어제도 모르는데 오늘이 웬말이냐’는 사람이라면 장르의 고전들이 담겨 있는 <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도솔)을 먼저 집어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김도훈
<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이 구두 어떠니?” 엄마가 십대인 딸에게 묻는다. “섹시해.” 소녀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엄마가 그 구두를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딸의 눈에 비친 엄마의 속마음은 때로 유리구슬처럼 투명해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딸은 모르는 척 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던져준다. <나 이뻐?>는 <파니 핑크>를 연출한 영화감독인 도리스 되리의 소설집이다. 올망졸망 모인 단편들은 일하는 엄마를 둔 십대 혹은 맞벌이를 하는 주부에 초점을 맞춘 것이 많은데, 이는 영화감독이자 소설가로, 그와 동시에 주부로 살아온 도리스 되리 자신의 삶에 탄탄한 뿌리를 두고 있다. <금붕어>의 여자주인공은 아내이자 엄마로 살았을 뿐인데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로 지내다보면 블랙홀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중력이 시간을 집어삼킨다는 블랙홀 말야. ‘내’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 아이들이 커서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기억하는 것은 큰소리로 야단치는 엄마와 일에 지친 아빠의 모습이 다는 아닐까. 바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현대인들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가는 일의 공포를, <나 이뻐?>는 가감없이 감싸안는다.
이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