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이사벨라는 섹스를 하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울음없는 눈물. 카메라는 이사벨라의 얼굴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고 우리는 그녀의 눈가에 젖은 글썽이는 눈망울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정체불명의 중국인 쿠바 여인과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마약 밀거래상을 하고 있는 마이애미 형사 소니, 혹은 더 정확하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리와 점점 더 매혹적이 되어가는 콜린 파렐의 육신이 뒤엉키는 섹스를 보다 말고 문득 그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이 장면과 만날 때 누구라도 어리둥절해진다. 이건 섹스를 놓고 지금 이사벨라와 소니 사이에 이미 있었던 그 어떤 사연의 비통한 선택을 다루려는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이 첫 데이트이며, 그들 사이에 그 어떤 거래도 없었다. 열일곱살 때부터 마약 거래 비즈니스에 뛰어든 이사벨라에게 이게 첫 섹스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눈물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 눈물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것이 진짜라면 무엇이 갑자기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그 반대로 가짜라면 무엇을 속이기 위한 것일까? 그때 우리는 이사벨라의 눈물을 글썽이는 그 눈망울 클로즈업에서 소니의 리액션 숏이 없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그 눈물은 전적으로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녀 자신의 무엇을 속이기 위한 것일까? 혹은 그녀는 무엇에 속은 것일까? 물론 영화에서 갑작스러운 눈물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만 열거해도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 로메르의 <보름달이 뜨는 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 하지만 이건 마이클 만의 영화다. 남자들만의 하드보일드 혹은 할리우드 장르영화 안의 세계. <마이애미 바이스>는 잘 알려진 마이클 만의 세계를 거의 완전하게 스스로 카피하는 영화다. 남자들은 우정을 믿고 있으며, 소니와 리코는 한순간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네온사인으로 가득 찬 야경은 황홀하고, 총격전 장면들은 거의 시가전에 가깝다. 특히 액션장면들에서 디온 비브의 HD 바이퍼 카메라는 위력을 발휘한다(<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씨네21> 549호 ‘로맨스는 나의 것’ 박찬욱 인터뷰에서 소개한 그 카메라. 하지만 동일 기종인지에 대해서 나는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이애미 바이스>에는 마이클 만의 이전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어떤 잉여가 있다. 이를테면 이사벨라의 눈물. 나는 그걸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녀 자신을 위한 이사벨라의 눈물
첫 번째 판본은 유치하지만 오직 이 장면만을 놓고 하는 설명이다. 이 눈물은 육체적인 즐거움이 주는 기쁨의 표현이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섹스를 한 것이며, 이 만족이 그녀에게 눈물을 선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그렇게 설명할 만한 이유가 있다. 뒤이어 이어지는 이사벨라와 소니의 샤워 룸에서 이루어지는 두 번째 섹스는 소니의 파트너인 리코(제이미 폭스)와 그의 애인이자 같은 팀 소속인 트루디와의 샤워 룸에서의 섹스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여자는 완전하게 동일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때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서로 다른 두 섹스가 끝난 다음 만족스러운 느낌이다. 둘 다 섹스가 끝난 다음 신기하게도 일 이야기를 한다. 섹스가 끝난 다음 트루디는 리코에게 자기에게 기대어 편히 자라고 말한다. 섹스가 끝난 다음 소니는 이사벨라에게 새로운 계약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위로하고(트루디), 다른 하나는 새로운 계약을 받아들인다(이사벨라). (유사한) 상황의 반복은 <마이애미 바이스>의 연출 플랜 중 하나다. 유사한 상황이 자꾸만 반복되고, 그 안에 매번 다른 등장인물이 순서를 바꾸어 등장하면서 어떤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다룬다. 아니, 마이클 만의 영화에 어울리게 말한다면 어떻게 견디는지를 본다. 그때 이 눈물은 이사벨라 자신이 트루디와 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이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섹스에서 트루디는 웃지만 이사벨라는 눈물을 글썽인다. 하지만 이 눈물은 거짓이다. 혹은 아주 잠깐의 진실이다. 이사벨라는 소니가 제시하는 새로운 계약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와 흥정한다.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비즈니스 우먼.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보스이자 정부인 헤수스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 섹스를 그의 침대에서 ‘보고’한다.
첫 번째 가정에 기댄 두 번째 판본. 그런데 트루디와 이사벨라 사이의 이 이상한 텔레파시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사실상 둘 사이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그런데 소니와 작별하는 이사벨라와 병원에서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는 트루디 사이에서 갑자기 교차편집이 이루어진다. 한쪽은 떠나가고, 다른 한쪽은 깨어난다. 단지 이걸 이야기의 경제학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문제의 해결, 하여튼 해피엔딩. 하지만 그렇게 유치하게? 이때 둘 사이의 (영화적) 텔레파시가 성립하는 것은 그녀들이 소니와 리코라는 두 남자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이클 만의 관심은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두 남자 사이의 관계였다(<히트>와 <콜래트럴>). 또는 한 남자의 내면이다(<인사이더> <알리>). 여기서 사람이 아니라 남자라고 쓴 사실이 중요하다. 마이클 만은 세상이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말하자면 그 점이 페미니스트들을 역겹게 만들 것이다. 혹은 마이클 만이 아무리 세련된 척해도 그만큼 그를 고색창연하게 만든다). 그런데 <마이애미 바이스>는 리코와 소니의 내면을 조금도 따라가지 않는다. 그건 <히트>나 <콜래트럴>을 생각하면 정말 이상하게 보인다. 마이클 만은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했을 때 그 주인공이 둘이라는 것에 대해 항상 한쪽이 다른 한쪽의 내면의 외재화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 이 둘은 그러지 않는다. 소니와 리코는 파트너를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충하면서 완벽한 하나의 짝을 이룬다. 그때 두 여자가 두 사람의 외재화라면 어떻겠는가? 이를테면 트루디가 함정에 빠진 다음에 구원받는 순간 폭탄이 터져 그녀는 중화상을 입는다. 병원에 실려간 그녀를 보면서 리코가 말한다. “정말 불공평해, 이런 허접한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다니.” 그러자 소니가 대답한다. “하지만 그녀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걸. 나는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자기만큼 중요해.” 하지만 잠시 뒤 그 말을 소니 자신의 입으로 반복한다. 호세 예로와 마지막 대결을 향해 달려갈 때 리코는 소니에게 말한다.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서 마지막 연기를 끝낼 시간이야, 준비됐어?” 그러자 소니는 대답한다. “아니,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리코에게 소니가 덧붙인다. “난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니야”(그런데 이 대사는 “난 지금 연기하는 게 아니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소니는 소니이자 리코의 트루디이고, 트루디는 리코에게 트루디이자 소니이다. 그때 이사벨라의 알 수 없는 이 눈물은 소니에게 리코에 대한 트루디의 자리에 갈 수 없는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장르의 컨벤션이 흘리는 눈물. 그러므로 이 눈물은 전적으로 영화를 보는 당신을 위한 눈물이다. 혹은 마이클 만의 미장센이다.
소니-호세의 관계에 대한 이사벨라의 불안의 눈물
세 번째 판본. 그런데 이 눈물이 거짓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사벨라가 아니라 눈물이 안다고 썼다. 그러니까 이사벨라는 아직 그것을 모르지만 이 눈물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말하자면 이 눈물을 불안의 판본으로 읽는 것이다. 이때 내가 말하는 불안은 주어진 현실과 그것을 구성하는 상상적 통일성 사이에서 그 둘이 완전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데서 생겨나는 어떤 붕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라캉의 유명한 명제. “불안은 기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지금 자기에게 다가온 이 섹스가 의미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소니는 그녀를 속여서 정보를 훔치거나 아니면 정말 그녀에게 빠진 것이다. 혹은 그 둘 다다. <마이애미 바이스>가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언더 커버로 임무를 수행하는 소니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혼란을 느낄 때(FBI 국장 후지마는 소니에게 경고한다. “위장수사를 하려면 반쯤 범죄자가 되어야 하지”) 그것이 소니가 아니라 이사벨라의 눈물로 나타날 때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완전히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소니가 이사벨라를 이용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하자 혼란에 빠져드는 것은 소니의 마이애미 수사팀이 아니라 반대로 일종의 도미노처럼 이사벨라를 시작으로 연쇄적으로 마약 조직 전체가 감정의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더 이상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이사벨라의 눈물에 대한 대답은 소니가 아니라 호세 예로가 한다. 호세 예로? 이 거대한 마약 밀매조직의 딜러이며, 보스 헤수스의 마약을 배달하는 중간 보스가?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미친 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냉혹하고 잔인한 인간. 그는 트루디의 유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폭탄으로 트랙터 전체를 날려버린다. 그런데 그는 이사벨라가 자신의 디스코 클럽에서 소니와 키스하면서 춤추는 모습을 모니터로 훔쳐보면서 이상하게도 마치 감상에 빠진 것처럼 눈물을 글썽인다. 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일까? 넘볼 수 없는 보스의 여자 이사벨라를 흠모해왔다면 이번이야말로 그녀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이 순간에 왜 그는 눈가를 적시는 것일까? 더 이상한 점. 호세의 디스코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 호세가 훔쳐볼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사벨라는 왜 보란 듯이 여기서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일까? 이 모니터 화면에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사실 소니이다. 혹은 이 속고 속이는 수사대와 마약 밀매조직 사이에서 소니는 그 미션을 속이는 데 성공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도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언더 커버의 이야기가 하나의 무대라면 (리코의 말, “우리는 무대에서 이제 내려와야 해”) 그 무대 위에서 이야기는 상투적인 수사극 액션 장르를 진행하면서 그 이야기에 얼룩진 감정이 일으키는 연쇄 고리의 도미노가 함께 진행된다. 호세 예로는 이 화면의 녹화를 보스 헤수스에게 보여주고 전리품으로 그녀를 얻는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헤수스의 모습은 모니터 화면을 보는 그의 등 뒤에 선 카메라다. 이사벨라가 소니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헤수스의 표정을 보여주는 리액션 숏은 없다. 이제 불안은 일종의 연쇄효과를 일으키면서 이야기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 시작한다. 균형이 무너지자 동요하기 시작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혼란의 절정은 마지막 총격전이다. 여기서 호세 예로는 난처한 장면을 연출한다. 그가 만일 이사벨라를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 마지막 거래의 장소에 그녀를 데리고 나타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호세는 이사벨라를 소니 앞에 내보이면서 그에게 자랑하고,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한다. 마치 이사벨라를 취한 그의 음모가 그녀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소니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할 때 호세의 ‘진짜’ 눈물이 가진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 자신이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하는 그녀를 소니가 빼앗아갔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사벨라가 헤수스의 정부였을 때 왜 호세는 단 한번도 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때 나는 다시 한번 호세와 소니가 처음 만났던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거래를 위해 국경지대의 도시 치우다 델 에스테에서 만나 거래를 협상한다. 거래를 진행하던 호세가 리코에게 말한다. “너만 와, 왜냐하면 저놈(소니)은 쌍통이 싫거든.” 그러자 소니가 의미심장한 대사를 한다. “원하는 게 섹스 파트너야, 사업 파트너야?” 만일 이 말의 반대가 진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호세가 진정 원한 건 이사벨라가 아니라 소니라면, 그래서 이 이야기의 두 남자의 핵심이 소니와 리코가 아니라 소니와 호세라면 우리는 너무 위험한 가정을 하는 것일까? 그걸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호세는 거래를 하면서 내내 소니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를테면 첫 거래가 끝난 다음 보스 헤수스에게 보고한다. “놈들이 수상해요.” 그러자 보스 헤수스가 묻는다. “뒷조사를 해보지 않았나? 특별한 게 없잖아.” 그러나 호세는 중얼거리듯 대답한다. “일을 너무 잘해요.” 이 이상한 대답. 여기서 환기하고 싶은 것은 마이클 만에게 두 남자가 등장했을 때 그 두 사람은 항상 반대편에 서서 서로에게 매혹된 두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히트>와 <콜래트럴>. 그러므로 나는 호세를 그 커다란 총으로 쏴죽이는 사람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질투에 찬) 리코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이사벨라가 단지 이 이야기의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녀의 가족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다음 오히려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중국인 쿠바 여자 이사벨라가 그저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얼룩에 불과하다면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던져진 그녀 자신을 위한 불안의 징후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분리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소외의 체현으로서의 눈물.
이사벨라의 눈물 같은 소니의 어두운 밤의 시간
나는 같은 이야기를 소니의 자리에 가서 반복해볼 생각이다. 앞의 이야기가 이사벨라의 판본이라면 이번에는 소니의 판본이다.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를 하드보일드 디지털 액션영화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이클 만이 왜 돈 존슨이 나온 198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를 지금 다시 영화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못하게 된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옛날 시리즈를 다시 볼 필요는 전혀 없다. 이를테면 영화에는 티나 터너의 노래도 나오지 않고, 얀 해머의 테마도 나오지 않으며, 필 콜린스의 음악도 들을 수 없다. 여기에는 어떤 추억도 없다. 게다가 마이애미의 멋진 풍광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건 <콜래트럴>과도 다르다. 거의 왕가위의 홍콩을 연상케 하는 <콜래트럴>의 LA 밤풍경 같은 장면은 여기서 볼 수 없다. 마이애미는 대부분 실내에서 찍혔거나 아니면 시내 외곽이거나 혹은 부둣가뿐이다. 오히려 황홀한 풍경은 쿠바의 아바나나 파라과이의 정글 혹은 비행기가 날고 있는 하늘이나 바닷가 한가운데에서 시속 150km로 달리는 쾌속정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도대체 왜 <마이애미 바이스>를 리메이크한 거야, 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둘 사이가 완전히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이클 만은 <마이애미 바이스>의 기본 설정을 그대로 다시 가져온다. 여전히 언더 커버에 관한 이야기이며, 소니와 리코는 한짝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마이클 만은 그 시리즈를 영화로 만들면서 미학적 재해석의 핵심을 HD 바이퍼 카메라에 기대고 있다. 그는 이 텔레비전 시리즈를 텔레비전 뉴스처럼 찍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묻는다(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래서 멋진 총격전 대신 여기서 전개되는 것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핸드헬드의 뉴스 라이브 중계에 가까운 촬영이다. 하지만 마이클 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그는 <마이애미 바이스>를 뉴스처럼 찍은 다음 거기서 뉴스 안의 언더 커버로 매일 총격전과 임무 속에 살아가는 남자들의 세계를 다시 장르 안으로 끌어들인다. 마이클 만의 반문. 그런데 그들이 임무 속에서 어떤 감정도 갖지 않는단 말이야? 뉴스에 빠져 있는 감정의 세계. 말하자면 마이클 만은 여기서 ‘뉴스 안의 시네마’를 찾는다. 그가 여기서 하는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하고 있는 것의 정확히 반대이다. 혹은 그것이 필름과 디지털이 오늘날 시네마에서 하고 있는 서로의 역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이애미 바이스>를 <히트>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이걸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두명의 마이클 만이 있다. 그 경계는 물론 <콜래트럴>이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마이클 만과 디지털 마이클 만. 그건 단지 그 이전 영화가 필름으로 작업하고, <콜래트럴> ‘이후’ HD 카메라를 쓴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히트>와 <마이애미 바이스>에는 거의 유사한 공간을 다룬 장면이 있다. <히트>에서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방에서 닐 맥컬리(로버트 드 니로)와 크리스(발 킬머)가 서로 대화하는 장면은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마찬가지로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방에서 소니와 리코가 그의 팀과 함께 마약중개상 니콜라스를 만나는 장면과 같은 방에 가서 찍은 것 같은 거의 동일한 방이다. 방 안에 인물들이 있고, 바깥에 바다가 보인다. 그때 전면에 보이는 전체가 유리이기 때문에 바다는 그들의 풍경이 된다. <히트>는 이 장면을 텔레포트 망원렌즈로 찍었다. 그래서 멀리 보이는 바다와 거기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거의 붙어 보인다. 그러면서 그들을 무심코 바라본다. 그때 그들은 저 바다가 밀어내는 파도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지금 막 모래사장 끝의 이 건물에 닿은 그들은 세상에서 파도처럼 그렇게 일순간의 어느 시간에 사라질 운명이다. <히트>는 어딘지 에드워드 호퍼와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유리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니콜라스의 방을 <마이애미 바이스>는 재빨리 HD 바이퍼 카메라로 쫓아가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대신 인물 사이를 숏으로 나눈다. 이때 이 장면의 핵심은 단지 공간과 인물의 분리가 아니다. 혹은 인물과 인물 사이의 분리가 아니다. 이 장면에서 마이클 만은 바다에 관심이 없다. 이 신의 결정적인 얼룩은 팀 전체가 니콜라스에게 마약 밀거래 중간 위장 접선을 위한 소개를 협박하고 있는 동안 소니가 그냥 그 대화에 관심없다는 듯이 무심코 하늘을 볼 때의 인서트 숏이다. 이 인서트는 거의 느닷없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 응시는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숏은 대화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때 이 인서트로 보는 하늘은 매직 아워의 시간이다. 이제 막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곧 밀려들 어둠의 순간. 이때 이 신은 저물어가는 시간의 순간을 향해 진행된다. 영화에서 한신 내에서 롱 테이크는커녕 대화를 따라 숏을 나눠가면서 시간의 흐름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영화라는 메커니즘의 경제학에서 일종의 자살행위이다. 그런데 마이클 만은 이 순간을 보여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때 이 신에서 이 짧은 인서트, 매직 아워를 보는 소니의 응시를 놓치면 안 된다. 그런 다음 영화는 소니의 어두운 밤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 자신은 그의 내면에 저물어가는 어둠의 이 매직 아워를 알지 못한다. 그걸 알고 있는 것은 소니 자신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걸 보여주는 무심한 하늘처럼 보인다. 마이클 만의 영화는 그 모든 운명을 알고 그것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어떤 예지(deus ex machina)로 항상 넘쳐난다. 이 짧은 인서트는 이사벨라의 눈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혹은 눈물과 매직 아워는 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호명이다. 누구의? 그들이 떨어진 허구로 가득 찬 속임수의 세계라는 밤의 호명. 이 호명을 거절하고 용기를 내는 것은 이사벨라다. 이사벨라가 총격전의 와중에 경찰 배지를 단 소니를 향해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무시하고 걸어오면서 “당신, 누구야?”라고 반복해서 물을 때 이상하게도 거기에 시적인 울림이 있는 것은 그것이 장르의 매직을 깨트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이 긴 밤이 끝나지 않았다.
상상적 인연을 모두 끊은 영화의 엔딩
그들이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오른 속임수의 무대라는 세계의 밤을 끝내는 우주의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이제 그들 각자의 연기는 모두 끝이 났고, 호세는 죽었으며, 헤수스가 그의 은거지에서 사라졌을 때,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때 소니와 이사벨라는 작별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작별은 다시 한번 매직 아워에서 이루어진다. 다만 소니가 그때 자기도 모르게 언뜻 본 인서트와의 차이점은 이것이 이제 막 낮이 시작되려는 새벽의 매직 아워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사벨라는 말한다. “인생이 너무 짧다는 말을 했죠?” 소니는 대답한다. “행운은 우리 몫이 아니었소.” 그러니까 <마이애미 바이스>는 저녁에 시작해서 아침에 끝나는 영화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어둠 속의 무대. 속임수로 가득 찬 밤의 장르. 곧 뜨게 될 태양.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 트루디가 납치되었을 때 텔레비전 일기예보에선 태풍 어네스토가 곧 마이애미를 들이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밤은 달콤했지만,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낮은 가혹할 것이다. 가면을 벗었을 때 그들은 더이상 서로 다른 가문의 싸움에 말려든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다. 그들은 밤으로부터 재빨리 퇴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적 인연을 모두 끊는 것이다. 하지만 장르영화에서 그 인연을 끊었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어쩔 수 없는 추신이 따른다. 혹은 마지막 이상한 엔딩. <마이애미 바이스>를 보고 난 다음 이 영화의 마지막의 맨 마지막 엔딩 숏이 무엇이었는지를 놓고 내기를 벌이고 싶은 충동을 이기기 어렵다. 이 블록버스터는 엉뚱한 엔딩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이사벨라는 떠나간다. 그걸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소니는 그 장소를 떠나간다. 그런 다음 그걸 바라보는 이사벨라의 빅 클로즈업이 있다. 나는 어쩌자고 소니를 떠나보내는지 어리둥절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엔딩 숏이 이사벨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영화는 갑자기 주인공을 뒤바꿔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숏은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병원에 들어가는 소니의 너무나도 평범한, 그게 정말 너무나도 평범해서 영화 사상 가장 시시한 엔딩 숏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평범한 소니의 뒷모습의 롱 숏이 마지막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리고 나면 영화 제목 <마이애미 바이스>가 뜨고 거의 세곡을 연달아 들려주는 기나긴 엔딩 크레딧이 기다리고 있다. 마이클 만은 이 엔딩에서 무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끝나지 않았다면 그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장르영화에서 상상적 인연을 끊었을 때 기다리는 것은 속편의 유혹이다. 자, 여기서 두 번째 내기를 걸어도 좋다. 이 엔딩은 마이클 만이 이미 예정된 <마이애미 바이스2>에 대한 불편한 심기일지도 모른다(물론 아직 이 영화가 시리즈가 된다는 기사는 읽은 적이 없다). 어쩌면 <마이애미 바이스>는 21세기의 <리쎌 웨폰>이 될지도 모른다. 혹은 지나치게 하이테크한 <미션 임파서블>에 대항하는 라이브 액션의 시리즈를 자처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는 이 연작에서 <미션 임파서블>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가 차지했던 그 자리를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제 더 할 어떤 일이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