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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의 <생활의 발견>, <커피와 담배>
이종도 2006-07-25

담배예찬론자인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파이프는 철학자의 입술보다도 지혜를 만들어낸다’는 영국 소설가 대커리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고, 오스카 와일드는 ‘완벽한 기쁨의 완벽한 형태’라고 담배를 찬미했으며, 장 콕토는 담배를 꺼내어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의식과 연기가 주는 마력에 대해 과장했다. 그런데 그건 말보로맨 웨인 맥라렌이 1992년 폐암으로 죽기 전 얘기이며, 미국의 메이저 담배회사들이 흡연피해자에게 수백억원에 이르는 소송에 줄줄이 패하기 전의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그러니 왜 새삼 커피와 담배인가. 웰빙을 권하는 시대에 카페인과 니코틴을 권한다니 웬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시류를 거꾸로 흘러가는 짐 자무시 영화는 11개 단편의 묶음 속에서 커피와 담배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라는 통찰을 던진다. 별 의미도 이유도 없이 만나는 사람들을 맺어주는 게 커피와 담배다. 영화 속에 출몰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담배와 커피를 함께하며 허무개그와 잡담을 나눌 뿐 어떤 진지하고 생산적인 대사도 나누지 않는다. 영화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말한다. 그런데 그 속에서 은근하게 담배와 커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유머가 흐른다. 그러니 <커피와 담배>는 짐 자무시의 <생활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첫 단편 <자네 여기 웬일인가?>에서 로베르토 베니니(배우들 모두가 실명을 쓴다)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를 커피와 담배로 이겨내려 한다. <담배는 해로워>에서 담배를 끊어라, 담배를 안 끊겠다 티격태격하는 조 리가노와 비니 벨라의 대화는 해로한 부부의 애정 고백처럼 들린다. 담배는 그저 유해한 기호품이 아니라, 서로의 오래 묵은 애정을 확인하는 매체인 것이다. 니코틴 중독자 비니는 담배를 끊으라고 성화를 부리는 커피 중독자 조에게 ‘나쁜 마누라 같다’고 투덜댄다. 혹시 담배 덕분에 애정을 돌려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아닐까.

마지막 단편 <샴페인>에서 테일러 미드와 빌 라이스는 세상과의 마지막 유대를 커피와 담배에서 느낀다. 테일러는 커피를 신의 음료라면서 샴페인이라고 부르고 이 삶을 축복하자고 한다. 담배와 커피는 사소한 삶의 순간들을 축하하는 작은 축제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세기말적인 가곡 <나는 세상과 끈을 놓쳐버렸네>가 흐를 때, 커피와 담배는 두 친구를 세상과 연결시키는 마지막 끈이라는 걸 알게 된다.

주인공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담배와 커피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중독자들이 위안을 느낄 것이다. 톰 웨이츠처럼 수십년간 니코틴과 카페인으로 잘 숙성시킨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주인공으로 나오는가 하면, 커피 중독으로 정신착란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커피를 단지째 들이켜는 빌 머레이가 나와 커피와 담배에서 위안을 찾는 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영화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돈, 직장, 주식투자 따위의 세상의 속도와 거리를 둔 채 커피와 담배 자체의 여유를 즐긴다. 세련된 취향으로 고급 커피를 마신다거나 특정 브랜드의 담배를 찾는 속물 취향은 없다. ‘톱밥 같은 담배, 진흙 같은 커피’도 괜찮다. 영화는 여유롭게 짐 자무시적인 썰렁하면서도 가슴 아픈 농담을 즐기는 작은 카페라고 할 수 있다. 만든 때와 장소, 촬영을 비롯한 스탭과 배우가 저마다 다르고 분위기가 다른데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하나의 영화라는 느낌을 준다.

처음 만난 사람의 치과 약속을 대신 가주는 엉뚱한 친절, 담배를 끊었으니까 한대 정도는 괜찮다고 우기는 궤변, 주크박스에 서로의 노래가 없다며 신경전을 벌이는 톰 웨이츠와 이기 팝의 미묘한 긴장 같은 게 즐겁다. 아마 가장 즐거운 반전을 선사할 에피소드는 <사촌 맞아?>일 것이다. 앨프리드 몰리나가 스티브 쿠건을 조른 끝에 만나서 얼마나 자기가 스티브 쿠건의 광팬인지를 말하는 에피소드다. 요즘 유행하는 굴욕 시리즈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좋은데, 앨프리드 몰리나가 이상한 행동이 혹시 담배를 안 피워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천국보다 낯선>부터 <브로큰 플라워>까지 이어지는 짐 자무시적인 농담의 압권은 음악과 관련된 것인데, 톰 웨이츠나 힙합그룹 우탕 클랜의 멤버 RZA가 음악과 의학에 대해 풀어놓는 장광설, 스티브 부세미가 털어놓는 엘비스 프레슬리 쌍둥이 설은 이 영화의 시종일관 썰렁하고 쿨한 태도와 잘 맞는다. 톰 웨이츠는 4중 추돌사고에서 부상당한 이를 볼펜으로 절개수술해 살렸다고 하고, RZA는 자기가 DJ를 오랫동안 해서 그런지 전기드릴로 수술을 하는 데도 재능이 있다고 말한다. 음악과 의술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그들의 돌팔이 이론은 믿을 만하지는 않지만 즐길 만은 하다. 커피와 담배에 열광하면서도 안 그런 척, 은근히 건강을 걱정하는 척, 담배를 끊은 척, 카페인이 든 커피를 끊었더니 집중이 더 잘되는 척하는 시치미 떼는 태도가 웃음을 자아낸다.

1986년부터 17년간 틈날 때마다 만든 단편들은, 카메라가 움직일 수도 없는 단조로운 카페의 대화신으로만 만든 것들이다. 커피를 마시는 손님과 웨이터가 등장인물의 전부다. 로베르토 베니니, 이기 팝, 빌 머레이, 톰 웨이츠 같은 괴짜들, 그리고 단편마다 흐르는 짐 자무시적인 음악 덕에 지루하지는 않다. 음악은 따로 들어도 좋을 만큼 익살스러움부터 숭고함까지를 오가며 영화의 주제 속에 스며드는데, 마치 커피와 담배의 환상적인 궁합을 보는 듯하다. 물론 가장 아쉬운 것은 정작 영화를 보며 커피와 담배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이고, 가장 황당한 모순은 짐 자무시가 담배예찬론을 펴는 동안 미국의 카페들이 재떨이를 하나둘 치우기 시작해 이제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실 곳이 거의 다 사라졌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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