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면서 의아했던 대목이 있다. 에니스는 왜 가난한 걸까, 라는 의문. 60년대부터 20년에 걸친 이야기 내내 에니스는 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위자료와 양육비를 마련하느라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혼 전에 잘살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잭이 로데오에 집착하는 이유도 금방 짐작하기 힘든 것이었다. 카우보이의 삶에서 로데오가 어떤 의미인지를 체감하지 못한 탓이다. 존 알퍼트의 다큐멘터리 <라스트 카우보이>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유용한 작품이다. 7월10일부터 열리는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의 존 알퍼트 회고전에서 소개될 이 영화는 사우스 다코타주 포큐파인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베른이라는 카우보이의 삶을 그리고 있다. 감독 존 알퍼트는 1980년부터 2003년까지 23년간 간헐적으로 베른의 목장을 찾아갔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인 와이오밍이 아니라 사우스 다코타이긴 하지만 <라스트 카우보이>가 그리고 있는 베른의 모습엔 잭과 에니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동성애자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미국인의 전통적 생활태도와 구식 가치관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컨추리 가수 윌리 넬슨의 노래로 시작한다. “엄마, 아이를 카우보이로 기르지 마세요. 그들은 결코 집에 머물지 않고 또 그들은 늘 외톨이랍니다.” <라스트 카우보이>에서 노래는 장면을 이어주는 기능뿐 아니라 효과적인 내레이션 기능을 한다. 주인공 베른은 수백 마리의 소를 기르는 카우보이다. 1980년 중년의 베른은 소를 돌보느라 쉴 틈이 없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해마다 은행 빚에 시달린다. 목장에 드는 비용은 올라가는데 소값은 떨어지는 악순환에 처해 있기 때문. 부채에 쪼들리는 한국의 농가와 같은 처지이다. 10년, 20년 세월이 흘러도 경제적 여건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베른은 목장을 떠날 수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온 일이 소를 기르는 일이었던 남자는 꿈도 소가 나오는 꿈을 꾼다. 베른의 아들 마크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잭처럼 로데오에 미쳐 있다. 70달러 출전비를 내고 먼 길을 달려가 400달러의 상금을 받으면 그게 인생의 낙이다. 서부 사나이의 꿈은 날뛰는 말 위에서 가장 오래 버틴 남자가 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담담히 2003년까지 베른 일가의 변화를 따라간다. 2002년 베른도 목장일을 그만둘 것인가 말 것인가, 결심할 상황에 처한다. 주위 목장 대부분을 억만장자 테드 터너가 사들이는 상황에서 베른의 아내는 목장을 팔고 시내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목장일을 안 하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베른은 아내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 그는 도시로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도시의 불빛은 나 같은 늙은이의 눈을 아프게 해.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빛은 내 침실 창문에서 볼 수 있는 빛뿐이야.” 다시 한번 윌리 넬슨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엄마, 아이를 카이보이로 기르지 마세요. 그들은 늘 혼자이고 언제나 떠돌아 다닌답니다.”
<라스트 카우보이>는 미국에서 사라지고 있는 어떤 정신을 담은 작품이다. 시대착오적 삶을 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지만 심금을 울린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아마 그건 한 다큐멘터리 작가가 20년을 투자해 만든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확실히 다큐멘터리가 주는 감동은 사건과 인물을 얼마나 자세히 집요하게 들여다보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엔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지만 노력에 비해 대가는 초라하다. 방송에서도, 영화에서도 다큐멘터리는 인기를 끄는 장르가 아니다(EBS의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그래도 다큐멘터리 제작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이 가끔은 신기하다. 특별한 신념이나 사명감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온 세상이 월드컵에 들떠 있는 동안에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근심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월드컵 뉴스에 가려진 곳곳에서 우리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들을 만나 우리가 잊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이번호 특집기사를 통해 우리에겐 월드컵 말고도 할 얘기가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