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세상을 향해, 지독하게 혹은 나직하게
미묘한 페이스에 담긴 정서, <낫시리아> 이유림/ digi-beta/ 27분/ 2006년
늘 교정지와 씨름해야 하는 이혼녀 윤희는, 묵직하고 말없는 그 모습이 포클레인과 똑 닮은 포클레인 기사로부터 이라크의 낫시리아로 함께 떠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한여름엔 50도가 넘고, 온통 사막뿐이라는 그곳. 그러나 윤희에게는 엄마의 관심에 목마른 아들이 있고, 그런 아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며 채근하는 전남편도 신경 쓰인다. 추상적 의미를 다루는 여자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남자가 왠지 끌리지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윤희는 오랫동안 매달렸던 회사 일에서 가깝던 후배의 배신을 맛보고, 남자의 마지막 전화를 끝내 놓치며, 심지어 아들을 잃어버릴 뻔한다. 아들은 돌아오고, 일상은 시작되지만 하늘을 향해 뻗는 포클레인의 팔처럼 한껏 고개를 쳐드는 것은 쉽지 않다. 사뭇 밝아 보이는 윤희의 마지막 표정 뒤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사막에 가보았습니다. 당신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미소임을, 영화는 아프게 환기시킨다. 극적인 사건없이 윤희의 무너져내리는 심리를 관객에게 묵직하게 전달하면서, 끝내 설명할 길 없는 정서를 미묘한 페이스 안에 담아내는 내공이 인상적이다.
삶과 죽음을 엮어내는 아이러니, <임성옥 자살기> 류훈/ 35mm/ 17분/ 2005년
세 종류에 달하는 암덩어리를 몸에 달고서 “드디어 3관왕”이라고 말하는 여자는, 진통제보다 효과적인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고통 속에서 되묻는다. “이런 것도 삶일까?” 아무리 봐도 그녀는 죽어 마땅하고, 그래도 힘내라는 말은 무책임하게 여겨진다. 동맥을 끊고, 목을 매고, 수면제를 먹고, 찻길로 뛰어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모든 자살기도가 옆집 남자에 의해 매번 좌절되니 그야말로 죽을 노릇. 그러나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다물고 덤덤하고 냉소적인 내레이션으로 일관하는 그녀는 복화술을 쓰는 중이다. 실은 계속해서 절실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는 그녀의 고백이 들려오는 순간, 그토록 뻔한 반어법은 세상없는 슬픈 농담으로 돌변한다. 지독하게 심드렁한 유머로 삶을 향한 집요함을 이야기하는 화법의 아이러니가 돋보인다. 류훈 감독은 친구의 죽음을 막으려 애쓰면서도 죽음을 원하게 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 <죽어라지마>를 만든 바 있다. 부조리 모노드라마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한 배우는 <살인의 추억> <연애의 목적> 등에서 인상적인 조연이었고, <흡연모녀>를 비롯한 다수의 단편으로 익숙한 서영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과 나직하고 공허한 목소리가 그만이다.
소녀가 선사하는 눈물의 마법, <착한 아이> 강혜연/ 35mm/ 21분/ 2006년
미국 영화과 학생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학생아카데미상(Student Academy Award) 본선에 오른 작품. 아직도 엄마가 머리를 빗겨주는 것이 어울리는 10살 소녀 기정은 내로라하는 부촌과 맞닿은 판자촌에 살고 있다. 엄마는 “우리 기정이, 착한 아이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남기고 사라졌고, 남동생은 여전히 철이 없다.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알코올중독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것도 서러운데, 엄마에 대한 기억은 어찌나 생생한지. 동생과 함께 한강물에 종이배를 띄우려니, 엄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동생에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물을 훔쳐야 한다. 도시락은 물론 율동 의상도 챙기지 못하고 운동회에 참가한 소녀는 억지로 출전한 종목에서, 엄마와 함께 달리라는 말이 적힌 쪽지를 발견한다. 더이상은 어쩔 도리없이, 뻔뻔할 정도로 지독한 신파. 그러나 울고 싶으면 울되, 울면서 뛰는 것이 엄마의 주문을 따르는 것임을 소녀가 깨닫는 순간, 관객은 진심을 다해 소녀의 행복을 빌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가장 솔직하되 절대로 쉽지만은 않은 영화의 마법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아역배우들의 연기. 이번 영화제 연기상의 강력한 후보라 할 만하다.
심사위원의 말/ 송해성 감독
“진지한 문제를 은유적으로 푸는 작품이 많아졌으면 한다”
올해로 세 번째 심사다. 처음엔 바빠서 망설였는데, 하다보면 재밌다. 단편 감독이 결국 나에겐 적이나 마찬가진데, 적들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를 볼 수도 있고. (웃음) 사회드라마는 두 번째인데, 사실 단편에서 장르를 따진다는 게 애매하다. 멜로든 스릴러든 결국 드라마 아닌가. 애매한 영화는 다 이 부문으로 오고, 출품작 수도 가장 많다. ‘사회’드라마라는 구분 때문인지 요새는 영화들이 너무 삭막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구질구질하고 쉬운 영화를 좋아하는데(웃음), 사회가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영화들이 특히 심각하다. 진지한 문제를 은유적이고 우화적으로 푸는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앞으로 상업영화를 잘 찍을 감독의 영화를 뽑기보다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다음 영화를 찍을 기회를 주고 싶다. 함께 심사할 정지우 감독과는 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정 감독은 칼 같고, 난 좀더 감정적이다. (웃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멜로드라마 장르 단편영화 본선 진출작사랑의 얼굴, 뜨겁고 또 차가운
좀비남자와의 발칙한 로맨스, <My Zombie Boy> 이유빈/ DV 6mm/ 29분/ 2005년
10년지기 친구가 선물처럼 맡기고 간 것은 좀비남자. 겁을 내는 여자에게 친구는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며 간곡히 부탁한다. 여자는 시커멓게 상한 얼굴에 냄새마저 고약한 그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네가 좀비가 된 건 처음부터 주인공이 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그녀는 상대를 깎아내리며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애완동물처럼 길들인 그에게 도리어 길들여지고 만다. 그 뒤 사랑에 빠진 그녀는 그가 좀비라는 것이 일종의 ‘결점’일 뿐이라며 발칙하게 도발한다. 대신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취향이다. 좀비남자는 그녀가 10년 만에 만난 음악 취향이 같은 사람. 그녀는 그런 그를 놓칠 수 없다. B급 감수성과 톡톡 튀는 대사, 재치있는 인물 묘사로 무장한 이 영화는 호러나 코미디에서나 맛볼 수 있을 법한 재미도 전해준다. 좀비남자의 신용카드를 무단으로 사용하며 “집세라고 생각”하라는 장면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친구가 홀로 도망치는 장면, UFO 모임의 회원들이 나오는 장면 등에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물론, 로맨틱코미디답게 결말에서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쁨 역시 누릴 수 있다.
노인과 여자가 빚어내는 우정, <Tea Date> 박미나/ beta/ 21분/ 2005년
홀로 살아가는 미스터 에드에게 일상은 지겹고 외로운 나날의 연속이다. 어느 날, 그는 아침부터 찻잔을 꺼내고 쿠키를 굽는 등 야단법석이다. 그 사이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문 앞에 선 사람은 선희. 손녀뻘은 될 어린 동양 여자다. 여기서 ‘티 데이트’의 전모가 드러난다. 미스터 에드는 선희의 영어 선생님. 그녀는 작문 수업을 듣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다. 미스터 에드에게 선희는 그녀가 좋아하는 캐모마일 티처럼, 과거를 잠시 잊고 현실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소중한 사람이다. 늙은 서양 남자와 어린 동양 여자가 우정을 나눈다는 설정은 다소 관습적이지만, 이 영화는 그들이 서로에게 미소를 건네는 순간을 실감나게 포착해낸다. 노인과 여자의 우정은, 이국에서 생일을 맞는 여자를 위해 쿠키를 굽는 노인의 따뜻함과 맛없는 쿠키를 맛있게 먹으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생일 케이크”라 말하는 여자의 천진함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미스터 에드 역의 노배우가 선보이는 개구쟁이 같은 웃음과 몸짓 역시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다. 선희 역으로는 배두나가 출연, 특유의 발랄하고 엉뚱한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
이별을 향해가는 사랑의 잔인함, <Fragile: Handle With Care> 윤영빈/ DV 6mm/ 19분/ 2006년
사랑을 택배로 부친다면 ‘취급주의’라는 표시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부서지기 쉬운 사랑의 표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찰나를 그리고 있다. 늦은 밤 이별을 고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물어보자, 왜 너랑 사귄 남자는 하나같이 개새끼 취급을 받는지. 그게 내 잘못인지 네 잘못인지.” 다음 장면은 어느 부부의 아침. 아내는 배려심이 깊은 남편을 자랑스러워하고, 남편은 순종적이고 따스한 성품의 아내가 사랑스럽다. 영화는 첫 장면에 나온 여자가 남편의 전 여자친구라는 과거형의 우연을 지나, 모든 사랑은 결국 이별을 향해 돌진해가며 이 부부 역시 그럴 것이라는 미래형의 필연에 이른다. 그 과정은 또 어쩔 수 없이 잔인한 상처를 수반한다. 특히, 왜 자신과 헤어졌냐고 묻는 여자에게 지금은 결혼한 전 남자친구가 “너, 사람 숨막히게 한다”며 “그런 너와 헤어지고 아내를 만났으니 한편으론 참 고맙다”는 말을 신랄하게 내뱉을 때, 헤어진 사랑의 날카로움이 스크린 밖의 관객까지 베어버릴 듯 차갑게 다가온다. 여자의 예민함과 남자의 무심함, 그로 인해 미묘하게 변해버린 일상의 공기를 실감나게 전달하는 작품이다.
심사위원의 말/ 박흥식 감독
“진심을 전하는 것이 좋은 작품이다”
올해 처음으로 미쟝센영화제 심사위원이 됐다. 그간 몇몇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잘 만들어진 단편영화를 보면 스스로 자극을 받게 돼 좋다. 내 작품보다 뛰어난 것들을 보게 될 때면 신기하기도 했다. 멜로를 자청한 건 아니고,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 등 내 전작 때문인지, 그쪽에서 멜로를 심사하라고 그러더라. 예전 단편영화를 보면 테크닉적인 면에서 어색한 점들이 눈에 띄었는데, 이번에는 장편영화로 만들거나 일반 관객을 상대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웰메이드한 영화가 많았다. 반면 장준환 감독이 만든 단편멜로 <2001 이매진>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이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가치관이나 정서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 이 점을 심사에 반영할 계획이다. 가식적인 것은 금방 들통나지만 진심을 전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울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