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 영화미학의 상이한 측면들을 대변하는 세명의 감독이 모여 만든 <티켓>은 참여한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직접 작품에 대면하기에 앞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포스트 네오리얼리즘 미학의 진수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는 <우든 크로그>(1977) 정도를 제외하곤 안타깝게도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바가 없었던 이탈리아 영화감독 에르마노 올미, <ABC 아프리카>(2001)에서 <키아로스타미의 길>(2005)에 이르는 실험적 디지털 작업 이후 오랜만에 35mm영화로 복귀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리고 고집스레 영화를 통한 사회적 발언을 계속해온 켄 로치가 공동으로 참여한 <티켓>은 분명 각각의 이름에 합당한 주목과 정당한 평가를 요구하는 영화다.
키아로스타미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원래 3부작짜리 장편다큐멘터리로 기획되었다(참여할 감독으로 올미와 로치를 추천한 이도 바로 키아로스타미다). 하지만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을 무대로 삼은 영화에 대한 올미의 아이디어가 다른 두 감독의 호기심을 끌었고 애초의 기획은 세명이 공동으로 한편의 픽션을 연출하는 쪽으로 수정되었다. 결국 <티켓>은 옴니버스영화의 꼴을 갖추고 있되 각각의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결합된 한편의 장편영화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물론 연출스타일의 차이와 미학적 편차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한정된 공간으로서의 기차, 세개의 에피소드 모두에 등장하는 알바니아인 가족의 존재 덕에 적절한 영화적 구심력이 마련된 것도 사실이다. 이때 숏의 자유로운 운용을 제약하는 공간 내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알바니아인 가족에 얼마만큼 영화적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세개의 에피소드가 확연히 갈린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몽상과 플래시백을 통해 종종 기차 공간을 벗어나는 올미는 그 가족을 가끔 흘깃 쳐다보며, 간결한 숏의 운용을 통해 대사와 상황의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키아로스타미- 그가 ‘자동차(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로 가득한) 영화’의 대가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는 그 가족을 지나치고, 공간 자체보다는 인물에 집중하면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로치는 그 가족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올미의 에피소드는 쇼팽의 전주곡을 따라 펼쳐지기 시작한 노인의 은밀한 몽상이 씁쓸한 현실의 울림에 조용히 자리를 내주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업무차 오스트리아에 왔다가 손자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행 기차에 오른 노년의 약학자는 자신을 배웅 나왔던 여인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감사편지를 쓰고자 한다. 같은 칸에 탄 한 음악가의 CD플레이어에서 살짝 흘러나온 쇼팽의 곡은 그에게 유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이는 다시 여인에 대한 몽상과 교차된다. 그런데 조사 나온 군인들의 위압적인 분위기와 기차 연결통로에 앉아 있는 알바니아인 가족으로 인해 그의 몽상은 종종 중단된다. 즉 심리적 불편함과 죄의식을 유발하는 타인의 존재는 노인의 로맨틱한 몽상을 일깨우는 현실인 셈이다. 군인의 발길에 차여 아기의 우유가 엎질러질 때, 그 순백의 얼룩은 그의 일그러진 몽상과 양심을 동시에 명료하게 외면화한다. 올미 영화세계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분명 아니지만 후기 비스콘티를 연상케 하는 아련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인물의 내면적 감정을 따라 높낮이가 조율되는 사운드의 심리적 활용에서는 작가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디지털 작업에 집중하면서 주로 직접 카메라를 잡았던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에피소드를 연출하면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1999)의 촬영감독 마흐무드 칼러리를 다시 불러들였다. 공간적 제약을 고려한다면 <바람이…>에서의 황홀한 풍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빼어나게 포착한 숏은 찬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특히 블라인드가 코팅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특실을 느린 트래킹 숏으로 잡은 부분- 블라인드에 반사된 외부 풍경과 유리벽 너머의 인물들이 동시에 포착된다- 은 키아로스타미의 간결하고도 효과적인 미장센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신경질적인 군장성의 미망인과 그녀를 수행하는 사회봉사원인데 결국 다툼 끝에 봉사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미망인 홀로 플랫폼에 남게 된다. 올미나 로치의 에피소드에 비해 메시지에 대한 강조가 약하고 다소 모호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티켓>이 비단 알바니아인 가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역설하는 작품에 그치지 않고 불편함을 유발하는 타인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보편적 사색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덕이기 때문이다. ‘쳐다봄’(올미)과 ‘다가감’(로치)에 대비되는 키아로스타미의 ‘지나침’에는 이유가 있다.
‘티켓’이 불러일으킨 소동에 관한 떠들썩한 코미디인 로치의 에피소드는 세 에피소드 중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일 것이다. <칼라 송>(1996) 이후 로치와 함께 작업해온 폴 래버티가 각본을 썼고 로치의 <달콤한 열여섯>(2002)으로 데뷔했던 세 소년들이 셀틱 풋볼 클럽의 열혈 팬들로 출연하고 있다. 여기서 로치는 에둘러 말하기보다는 세 소년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윤리적 선택의 문제를 제기한다. 알바니아 소년이 훔쳐간 열차표를 다시 되찾고 축구경기를 볼 것이냐, 아니면 축구경기를 포기하고 수감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알바니아 소년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냐, 하는. 로치는 냉혹해지기보다는 잠시나마 판타지에 몸을 맡긴다. 즉 선택에는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법칙을 등장인물들 모두가 피해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 시의적절하게도(?) 그건 축구를 향한 열정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