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날의 오후. 월 스트리트의 은행에 무장 강도들이 들이닥친다. 직원과 손님들은 순식간에 강도들에게 제압당하고, 은행 문을 걸어 잠근 강도들은 금고로 향한다. 이르게 언급하자면 <인사이드 맨>은 하이스트영화(Heist Moive: 도둑질영화)다. 그러나 뉴욕 한가운데에서 태연히 은행을 점령하는 강도들의 이야기는 좋은 하이스트영화감이 아니다. 강도들의 무모한 시도는 경찰력에 의해 쉽사리 제압당할 것이고, 그때까지 남은 것은 지루한 협상과 인질극의 가능성이다. 자연히 로저 애버리의 <킬링 조이>(1994)나 시드니 루멧의 <개같은 날의 오후>(1975)가 중첩된다. 게다가 이것은 스파이크 리의 영화다. 은행을 점거한 사람과 점거당한 사람들 사이의 인종적인 역학관계에 대한 삽화로 빠져나갈 가능성을 지레짐작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맨>은 결코 하이스트영화의 기본기를 잃는 일이 없다. 곧 공금 유용의 혐의를 받고있는 협상가 키스 프레이저(덴젤 워싱턴)가 투입되고, 강도들의 우두머리인 달튼 러셀(클라이브 오언)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한다. 문제는 강도들의 행태가 참으로 괴이하다는 점이다. 러셀은 인질들에게 자신들과 똑같은 마스크와 옷을 입힌다. 인질들조차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경찰들은 범인과 인질범을 구분하지 못한다. 러셀 일당은 도망갈 점보 여객기를 경찰에 요구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은 이쯤에서 자명해진다. 거기에 더해 은행의 소유주인 아서 케이스(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비밀 로비스트 매들린 화이트(조디 포스터)를 고용, 은행 금고에서 자신의 은밀한 비밀이 숨겨진 박스를 빼오라고 지시한다. <인사이드 맨>은 꿍꿍이가 다른 인물들이 서로의 ‘인사이드’를 캐내려는 이야기다.
세상의 많은 하이스트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인사이드 맨> 역시 배배 꼬인 이야기 사이사이에 논리적 구멍들을 지니고 있다. 신인작가 러셀 게위르츠가 영화적 재미를 위해 몇 가지 세부요소들을 희생시킨 탓이다. 논리적인 게임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왜 아서는 자신의 비밀을 숨긴 문건을 없애버리지 않고 60여년 동안이나 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을까. 시장도 무시 못할 만큼의 영향력을 지닌 매들린은 대체 진짜 직업과 역할이 무엇인가. 그리고 스포일러 때문에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질문과 질문과 질문들. 영화는 관객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없이 수많은 구멍과 맥거핀을 묵묵히 끌어안고 간다.
하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각본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맨>은 여전히 양질의 하이스트영화로서 소임을 다한다. 논리적인 허영에도 불구하고 이를 상쇄시킬 두 가지 커다란 장점, 믿음직한 출연진과 능숙하게 영화를 다룰 줄 아는 감독이 있는 덕이다. 클라이브 오언과 조디 포스터는 도식적인 캐릭터들을 군살없이 도식적으로 연기해내고, 윌렘 데포나 크리스토퍼 플러머(<사운드 오브 뮤직>), 치웨텔 에지오포(<러브 액츄얼리>) 같은 조연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화음도 절묘하다. 이 작품이 스파이크 리와의 다섯 번째 작업인 덴젤 워싱턴은 여전히 믿음직하다. 특유의 건전한 흑인 가장 이미지와 <트레이닝 데이>의 이미지를 옅은 농도로 혼합해놓은 듯한 협상가 키스는 삐딱하게 쓴 파나마 모자 덕에 근사한 필름누아르의 내음을 풍긴다.
<인사이드 맨>은 일급 배우들로 장식한 일급의 상업/장르영화인 동시에 감독인 스파이크 리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굳이 <크래쉬>에 대한 뉴욕의 대답이라는 식으로 과잉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맨>이 뉴욕에 대한 또 다른 스파이크 리의 삽화라고 말하는 것은 쉽고도 유효한 지적이다. 스파이크 리는 작가적 자유를 누릴 틈이 없어 보이는 각본에 9·11 이후 뉴욕의 기운을 암시하는 작은 각인들을 조용히 새겨두었다. 이를테면, 복면을 쓴 강도들이 인질을 처단하는 비디오테이프는 알 카에다의 납치 비디오를 닮아 있고, 뉴욕 한가운데 있는 오피스 빌딩에서 새어나오는 연기는 두번에 걸친 무역센터 테러의 자그마한 재현처럼 보인다. 가장 재미있는 각인들은 지금 뉴욕의 인종적 긴장을 보여주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이다. 경찰에 의해 “아랍놈 새끼”로 오해되자 공포에 질린 얼굴로 “저는 시크교도예요!”라고 부르짖는 남자는 민족적 자긍심을 벗듯이 (무기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를) 터번을 경찰의 강압에 의해 풀어헤쳐야만 한다. 프레이저가 은행 내부에서 도청한 테이프를 듣는 장면 또한 비슷한 각인이다. 그는 테이프에 담긴 언어를 알아듣는 남자에게 묻는다. “그거 알바니아어야?” “아니 아르메니아어야.” “대체 뭐가 다른데?” 스파이크 리는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에 한해 뉴욕의 불안과 근심을 담아낸다. 수천개의 민족이 섞여 살지만 지식와 관용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거대한 도시의 불안.
사실 디테일을 통해 미국의 사회적 불안을 짚어내는 것은 스파이크 리의 오랜 장기다. 하나 최근의 리는 영화적 디테일을 방만하게 확장시키다 영화를 무너뜨린다는 혹독한 평가들을 받아왔다. 2002년작 <썸머 오브 샘>에서 리는 70년대 뉴욕 브롱크스를 감도는 시대적 긴장을 촘촘히 건져올리지만 에피소드와 인물들은 느슨하게 파편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짐 호버먼의 말을 빌려 “디테일은 물샐틈 없는데 구조는 기우뚱거리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뒷감당이 안 되기로는 할리우드에서 따를 자 없는 감독”이라고 그를 칭하는 것에 굳이 반기를 들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리는 <인사이드 맨>에서 결코 최근작들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인사이드 맨>은 리가 거의 처음으로 스튜디오 고용감독으로서 만들어낸 장르영화인 것이다. 그는 스튜디오의 혜택과 상업적인 감각이 번득이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좋은 상업영화를 만드는 데 주력했고, 작가적인 각인을 부유하는 공기처럼 띄워놓는 정도로 만족한다. 일종의 절충이지만,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절충을 거쳐 더 말쑥한 결과물을 낳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구멍이 있지만 영리하게 쓰여진 각본, 도식적인 캐릭터에 힘을 불어넣는 일급 배우들, 그리고 뉴욕이라는 장소를 이용해 현대 미국의 현재적 공기를 잡아낼 줄 아는 스파이크 리의 감각. 이중 어느 하나만 빠졌더라도 <인사이드 맨>은 풍성한 장르적 결과물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사이드 맨>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완성체를 만들어낸, 어긋나는 화음도 일종의 매력으로 들리는 오케스트라의 협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