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룸>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함께 캐나다의 대표적인 감독인 아톰 에고이얀의 작품이다. 에고이얀이 자신의 두 번째 작품인 <패밀리 뷰잉>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선보였을 때, 그 영화를 본 빔 벤더스는 자신에게 주어질 상금을 양보하려 했을 만큼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스피킹 파츠> <엑조티카> <달콤한 내세> 등으로 이어지는 에고이얀의 영화는 빔 벤더스의 감식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아라라트>에서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던 영화적 경향에서 벗어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영화 속 영화’의 형태로 재현하며 과거로 시선을 돌렸던 에고이얀은 다시 한번 과거의 시간을 배경으로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그늘진 이면을 들춰내고자 한다.
<스위트룸>은 1950년대 최고의 코미디언 콤비였던 래니(케빈 베이컨)와 빈스(콜린 퍼스)가 소아마비 환자들의 치료 기금을 모금하는 텔레톤 공연의 무대에 오르기 전 서로를 마주 보는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치 결별하기 이전의 제리 루이스(Jerry Lewis)와 딘 마틴(Dean Matin) 콤비처럼, 로큰롤 분위기의 악동인 래니와 클래식에 어울리는 위트있는 신사인 빈스는 상보적으로 완벽한 콤비를 이루면서 1950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최고 스타로 군림했다. 이 도입장면에서 에고이얀 영화의 음악을 도맡다시피 하는 마이클 대너의 영화음악이 분위기를 마술적으로 전환시키면(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클래식과 팝, 펑크록과 재즈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영화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텔레톤 공연 장면을 담던 카메라는 한 호텔의 스위트룸 욕조에 죽어 있는 한 여인을 향해 다가간다. TV를 통해 보여지는 화려한 쇼와 그 등가물인 듯한 스위트룸, 하지만 그 욕조에 발가벗은 채로 싸늘히 식어 있는 모린(레이첼 블랜차드)이라는 젊은 여성. <스위트룸>은 이 대조적인 도입부를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생산한 스타의 겉으로 드러나는 삶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적나라한 실체 사이의 간극을 암시하는 것이다. <스위트룸>의 원제가 <진실이 있는 곳에>(Where the truth lies)임을 감안한다면, 에고이얀이 보여주려는 치명적인 진실은 표면과 이면의 어느 한쪽이 아니라, 이 둘이 조화에 실패함으로써 벌려놓은 그 간극에 놓여 있는 셈이다.
래니와 결별한 뒤 내리막길을 걷던 빈스는 자신의 전기를 출간하기로 결정하고, 그 저술 작업은 그들의 마지막 텔레톤 쇼에 출연했던 소녀이자 이제는 야심만만한 젊은 작가로 성장한 카렌(앨리스 로먼)에게 돌아간다. 카렌은 빈스와 래니의 삶에 놓여진 수수께끼인 모린의 죽음을 캐내려 하지만, 이는 결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영화 말미에 저널리스트를 꿈꾸지만 진실을 수단화하려 했던 모린의 얼굴이 카렌과 겹쳐지는 장면이 암시하듯이, 그녀에게 그 사건은 야심찬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미끼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카렌은 <달콤한 내세>의 변호사와 유사하다. 그가 스쿨버스 사고로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고 그 사건에 얽힌 진실을 밝히려 하지만, 이는 변호사로서의 의무감이나 정의감이 아닌 마약에 찌든 딸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카렌은 모린의 죽음에 얽힌 사건의 실체를 조금씩 확인해가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래니와 빈스에게 품었던 환상이 그 이면의 마약과 사물화된 섹스에 잠식당한 추악한 삶과 충돌하며 발생하는 혼란 속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스위트룸>은 미스터리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진실의 폭로 지점을 향해 숨가쁘게 질주하는 일반적인 장르의 공식보다는 현재(1972년)와 과거(1957년)를 오가면서 그 사건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표면과 이면의 삶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는다. 그것이 일반적인 스릴러영화에 비해 속도감이 더딘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시공간을 다층적으로 구성하여 파편화된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나 다소 느린 듯한 속도감의 사건 전개는 에고이얀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스위트룸>이 영화제에서나 간간이 만날 수 있는 에고이얀 영화의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스위트룸>은 진실을 대하는 에고이얀의 태도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달콤한 내세>와 <아라라트> 등에서 드러난 바 있듯이, 에고이얀은 어떠한 진실이 영화와 각종 미디어 그리고 심지어는 사법 제도와 만났을 때, 그 자체로 소통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심의 눈길을 던지곤 한다. <스위트룸>에서도 진실을 상업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출판시장(혹은 저널리스트의 욕망)을 향해 곳곳에서 비판적 시선을 던지는 에고이얀은 진실이 매력적인 교환의 대상인 이상 그만큼 변질되기도 쉽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이러한 에고이얀의 진실에 대한 입장이 <스위트룸>의 엔딩에서는 진실이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이라면 폭로보다는 유예(<달콤한 내세>는 은닉에 가깝다)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에고이얀은 약이지만 또한 독(질병)이기도 한 파르마콘과 같은 이중적 성격의 진실에 대해 약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독의 위험을 피해 움츠려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그것이 <스위트룸>을 보면서 그의 최고작인 <달콤한 내세>를 떠올렸던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