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감정에 매료됐고, 그 감정 때문에 힘들었다”
세 번째 만남.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히든>에서는 오랜만에 줄리엣 비노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중산층 부부가 자기 집 앞이 찍혀 있는 이상한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는다. 그 일이 계속되자 부부는 공포에 빠지고,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일종의 윤리적 혼란에까지 이른다. <히든>은 과격한 게임의 방식으로 윤리를 묻는 영화인데, 줄리엣 비노쉬는 여기에서 공포와 피곤에 찌든 중산층 주부 역할을 훌륭히 연기했다.
줄리엣 비노쉬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흔히 스크린에서 보던 참하고 귀여운 여인은 더이상 아니다. 차라리, 그녀는 쓰레기라도 버리려고 집 밖에 나온 평범한 차림의 프랑스 주부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성격은 불같아 보이고, 말에는 힘이 있다. <히든>에서는 겁에 질리고 창백한 연기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비노쉬는 웃어도 크게 웃는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어떻게 이번 작업에 참여하게 됐나. =<히든>과 비슷한 영화에서 미카엘 하네케와 일한 적이 있다. 그의 영화적 비전과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당신이 맡은 역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진실을 알아내는 과정 속에 놓인 분노의 감정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일상생활에서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웃음)
-연기할 때 어려웠던 점은. =나쁜 감정들을 많이 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영화를 할 때는 빨리 끝내고 싶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들다.
-촬영 중 의견을 많이 피력하는 편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을 하고 그 자리에 갔을 때는 이미 어떤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찍으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거다. 하느님도 사람들이 있어야 하느님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웃음)
-이번에는 착한 역할만은 아니다. =좋은 역과 나쁜 역이 따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그런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인물은 화도 잘 내고, 생활에 찌들어 지쳐 있는 인물이다. 사실 <블루>에서도 착한 역할은 아니었다. 쥐도 막 죽이고 그랬으니까. (웃음)
-센 감독하고 작품을 많이 한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게 내게는 맞다. 나 역시 성격이 강해서 미지근한 건 싫어한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언제나 둘 중 하나다.
-당신은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가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나중에는 처리할 방법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회에서 문제가 생겼을때, 그 문제가 생긴 과정을 말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간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것으로 흐르는 지금 사회 속에서 결국 인간 각자가 알아서 그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줄리엣 비노쉬와의 마지막 인사는 농담으로 끝났다. 거의 언제나 착하고 똑똑한 역할만 하던 당신이 비겁한 중산층이나 바보 역할(그녀는 최근작 <시차>에서 바보스러운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겠다고 하자,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춥지만 여유있는 프랑스 영화계
11월에서 12월로 넘어가는 그 사이, 수십년 만에 찾아왔다는 이른 추위에 파리는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루브르 박물관은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건재했고, 튈레리 공원과 센 강변에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과 개가 여유롭게 산책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 자리잡은 모리스 호텔에서 이 세 사람을 만난 것인데, 그들의 표정 역시 추위에 버티고 서 있는 그들 풍경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의 프랑스영화가 과거의 명성에 비해 다소 얼어붙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에는 한기를 떨쳐낼 만한 근성적인 여유가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타임 투 리브>는 영화적인 세공력이 뛰어난 감독이 그 세공술을 뒤로하고 만든 삶의 거울 같은 영화다. 거기에는 삶에 대한 순수한 지향이 있다. <레밍>은 통제 불가능한 인간의 삶의 한 측면을 불가사의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영화다. 앞서 만든 두편의 영화에서 몰이 선보였던 현실과 환상의 경주가 어디쯤 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 <히든>은 프랑스 역사의 한 자락에 기원을 둔 공포스러운 윤리 게임이다. 거기에서 비노쉬는 한편으로는 가해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피해자로서 이중의 위치에 서 있는 어색함을 연기하고 있다. 이 세편의 영화가 내년에 우리를 찾을 것인데, 그때쯤 이들의 여유가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 판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