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두 여인의 위험한 유혹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그녀가 찾아오기 전까지는…전근 발령을 받는 바람에 프랑스 남부의 낯선 도시로 이사를 온 알랭(로랑 뤼카스)과 베네딕트(샬롯 갱스부르). 결혼 3년차인 그들은 서로에게 무척이나 헌신적인 커플이다. 어느 날 알랭 부부는 상사인 리차드와 그의 부인 알리스(샬롯 램플링)를 집으로 초대하게 되는데,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 알리스는 남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의 언행으로 저녁식사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만다.
견고한 일상을 깨뜨리는 첫 번째 징후
그날 밤 알랭은 부엌의 배수관에서 죽어있는 레밍(스칸디나비아 북부에서 서식하는 쥐류, 집단이동 중 자살한다는 설이 있다)을 발견하고, 이 때부터 완벽하게 보였던 이들 부부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다. 각 인물들의 숨겨진 욕망이 위험스러운 판타지로 발전하고, 알리스가 알랭을 유혹하면서 상황은 점점 더 위태로워지는데…
동영상 (1)
- 제작 노트
-
네 명의 배우가 빚어내는 매력적인 4중주more
<레밍>의 해외 개봉 당시 평단은 크게 두 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2000년 칸영화제 경쟁작으로 상영되어 비평가와 관객의 열렬한 찬사와 지지를 받은 <당신의 영원한 친구, 해리>의 도미니크 몰 감독이 3년 동안 공들여 완성한 또 한 편의 신랄하고 독창적인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영화 속 네 배우가 빚어내는 완벽한 사중주였다.
깨어지기 쉬운 ‘관계의 허약함’과 무너지기 쉬운 ‘인간의 연약함’을 표현한 네 배우
오묘한 매력과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을 지닌 <스위밍 풀>의 샬롯 램플링은 마치 배수관에 낀 레밍처럼 위태롭고 애처로우면서도 소름끼치는 알리스를 그녀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내 “이제 그녀의 연기에서는 숭고함마저 느껴진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당신의 영원한 친구 해리>에 이어 감독과 두 번째로 함께 작업한 로랑 뤼카스는 자신만만하고 말쑥한 모습에서 삶의 그 어떤 것도 통제하지 못하고 대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엔지니어 알랭 역할을 빈틈없이 연기해냈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제인 에어>와 <21 그램> 등에서 절제되고 섬세한 연기로 주목 받은 샬롯 갱스부르는 강인함과 연약함이 공존하는 베네딕트로, 세자르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에 빛나는 프랑스의 국민배우 앙드레 뒤솔리에는 비열하면서도 매력적인 사업가 리차드로 분해 영화의 주축을 이뤘다.
<레밍>은 오로지 두 커플, 네 명의 배우가 129분간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그들의 화학작용과 호흡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완벽한 4중주는 영화 자체의 내용만큼이나 숨막히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정밀한 연출, 세밀한 사운드 디자인
DIRECTION
통제된 현실은 언제나 깨어질 듯 위태롭게 느껴지는 법. 기하학적으로 너무나 정밀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오히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초현실주의 화가 키리코의 작품이 주는 느낌을 영화에 적용하기로 한 감독은 빛과 어둠의 대비(알랭과 베네딕트가 사는 전원주택의 하얀 벽에 일조가 비출 때의 그 날카로운 느낌과 혼란에 빠진 알랭을 엄습하는 어둠), <로스트 하이웨이>를 떠올리게 할만큼 폐쇄적인 주택 내외부의 지극히 정돈된 미장센, 모든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계산한 후 네 명의 배우를 진두지휘한 명료한 연출을 통해 상상과 무의식에 근거한 비논리적인 플롯이 주는 혼란을 상쇄했다.
SOUND & MUSIC
감독은 사운드 트랙을 의도적으로 비워 알리스와 베네딕트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눌 때 주방의 커피 머신에서 나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관객에게 들릴 수 있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 사운드트랙에 여백이 있었기 때문에 악몽 같은 강조점을 둘 수 있었던 것. 다른 예로, 주방을 점거한 수천 마리의 레밍들이 날카로운 소리로 울부짖을 때처럼 소리의 밀도가 강한 씬에서, 음악은 잠시 그 자리를 내주는 식이다. 그와 함께 “푸른 다뉴브강”과 같은 고전적인 클래식 선율을 사용함으로써 전원적 시대에 대한 감회에 젖게 함과 동시에 극의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는 등 감독의 초정밀 사운드 디자인은 영화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한편, 도미니크 몰은 영화 전체를 부유하는 불확실성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연약하면서도 불안한, 거의 멜로디가 없는 음을 주조로 삼았고 <당신의 영원한 친구, 해리>에 이어 함께 작업한 음악 감독 데이빗 휘태커의 오케스트레이션은 굉장히 장엄한 분위기로 영화에 특별한 향취를 불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