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다하르>(2001)를 만들고 난 다음에도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라는 문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란 땅에 넘어온 아프간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다큐멘터리 <아프간 알파벳> 을 이듬해에 만든 그는 이후로는 아예 이 다큐멘터리가 다룬 문제 속으로 직접 발벗고 뛰어드는 활동을 하며 몇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얼마 동안 그의 필모그래피는 누적의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그는 아프간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이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나은 일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이 뜨거운 심장을 가진 행동주의자 마흐말바프가 3년 만에 신작을 내놨으니 그것이 바로 <섹스와 철학>이다. 그런데 유별난 제목에서도 이미 그 분위기를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듯이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마흐말바프의 최근 행보와 합치하는 유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철학>은 마치 그가 그간의 참여적 달음박질을 멈추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면서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흐말바프는, 사회적 고통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피폐함이란 문제에 유희할 줄도 아는 성찰의 시선을 가져가는 자이다.
영화는 죠언이란 중년 남자를 성찰의 대리인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마흔 번째 생일을 맞게 된 날에 그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벌이는 혁명”이라 부르는 행위에 과감히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네명의 여성과 사랑의 감정을 나눠 갖고 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무용학교에 네 연인을 한데 모이게 만든다. 그리고는 그들과의 ‘사랑의 연대기’를 하나씩 떠올려보고 결국에 사랑이란 그 종말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사건임을 밝혀낸다. 연인들은 모두 죠언의 곁을 떠나고 그는 고독의 그림자 속에 잠겨들고 만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사랑의 문제를 탐구하는 <섹스와 철학>은 마흐말바프 스스로도 이야기했듯이 (국내에서도 2년 전쯤에 개봉되었던) 그의 90년작인 <사랑의 시간>과 일종의 듀엣을 이루는 영화다. 두 영화는 다루는 주제에서도 물론 유사성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루기 위해 구조를 활용하는 감독의 창의적인 태도에서도 닮은 데가 있다. <사랑의 시간>에서 마흐말바프는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 사랑과 관련해 인간이 보여주는 행태를 탐사하기 위해 하나의 ‘기본 상황’을 상정해놓고 에피소드들마다 인물들의 변화된 위치에 따라 이것을 세번 변주하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구사했다. 반복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는 많이 느슨한 형태이긴 하지만 여하튼 <섹스와 철학>에서도 마흐말바프는 속내는 서로 다르지만 결국에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야 마는 세개의 러브스토리를 늘어놓는, 변주의 화법을 활용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마흐말바프는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를 비추는 구성 장치를 덧댐으로써 구조를 좀더 복잡한 것이 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더 나아가 좀더 미세한 수위에서의 구성상의 패턴 혹은 리듬을 가시화하려 이런저런 잔손질을 하는 것도 마다지 않는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왕복하는가 하면 춤의 퍼포먼스와 진행되는 이야기를 겹쳐놓기도 하고, 모티브의 반복을 통해, <가베>(1996)에서처럼 색으로, 또 <고요>(1998)에서처럼 소리로, 눈부신 시청각적 리듬을 빚어내려고 한다.
확실히 강력한 구성에의 의지는 <섹스와 철학>의 세계를 <사랑의 시간>(을 포함한 다른 마흐말바프의 영화들)과 견주어 복잡하고 화려하며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한다면 아마 마흐말바프로서는 자신의 의도가 반 정도만 이해되었다고 이야기할 게 틀림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을 통한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에의 의지가 영화의 중요한 추진력일 테니까 말이다. 주인공인 죠언은 무엇보다도 그 성찰을 수행하기 위해, 또는 체현하기 위해, 상징과 리듬으로 가득한 영화의 복잡한 구조를 통과하는 인물이다. 그의 캐릭터라는 것은 아마도 사랑에 빠져 행복한 순간에 스톱워치를 작동함으로써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재는 행위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발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사랑이란 순간과 영원의 일치”라는 말을 믿고 사랑의 경험이란 시간을 잃어버리고 시간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예컨대 마리암 같은 여자와는 2시간2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의 행복을 경험했을 뿐이라며 자기 삶의 조건을 한탄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렇게 잠깐 동안의 행복을 경험하게 해주는 사랑이란 것도 근원적으로는 영원의 힘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기에 비극의 감정은 두터워진다. 마리암과의 사랑, 파르조나와의 사랑, 타흐미네와의 사랑, 말로하와의 사랑, 그것들의 빛깔은 조금씩 상이할지 몰라도 결국엔 동일한 행로를 알려줄 뿐이다(스톱워치의 주고받음, 우산의 주고받음, 반복되는 차 안에서의 통화 같은 모티브들을 가지고 영화는 죠언의 네 연인이 실은 동일 인물의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사랑이란 항상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해서 서글픈 고독으로 끝나는 공허하고 쓰라린 행로일 뿐인 것이다.
<섹스와 철학>은 죠언이 던지는 그처럼 아픈 존재론적 메시지와 감응하는 영화다. 거기에 모종의 진실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영화가 그 메시지를 보는 이에게 뼛속 깊은 감화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섹스와 철학>의 전개 과정은 죠언의 입을 빌려 이야기되는 언설들이 점점 누적되고 세를 얻는 것으로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달리 말해 형식화에의 의지와 성찰에의 의지가 치열하게 맞물린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흐말바프의 원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시간이 갈수록 영화 속 형식화에의 의지는 처음 가졌던 흥미로움을 잃을 뿐만 아니라 성찰에의 의지와 결별하려 한다. 그런 상태에서 마지막에 들리는 위험에 처한 진실한 사랑에 대한 언설은 무미하게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다. 어차피 이 영화에서 ‘섹스’를 기대할 순 없을 터이니 그것이 누락된 것은 별 상관없다 할지라도 ‘철학’마저 색이 많이 바랜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