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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과 의뢰인이 같은 기이한 추리소설, <이터널 선샤인>

짐 캐리의 출연작을 중심으로 살펴본 <이터널 선샤인>의 특징

배우 짐 캐리가 일련의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다듬어온 고유의 페르소나는 영화라고 하는 픽션 속에 구축된 또 다른 픽션과의 관계를 통해 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편의상 여기서 전자의 것을 일차적 픽션, 후자의 것을 이차적 픽션이라고 해두자. 결론을 앞서 말해두자면 자신의 영화 속에서 짐 캐리는 많은 경우 ‘이차적 픽션의 수인(囚人)’으로 등장한다. 상업적인 코미디물인 <에이스 벤츄라> 같은 작품이건 좀더 진지하고 반성적 자의식이 두드러진 <맨 온 더 문> 같은 작품이건 마찬가지다. 물론 미셸 공드리-찰리 카우프만의 필모그래피 내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살펴보고 위치짓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짐 캐리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가로질러가며 그의 페르소나를 꼼꼼히 살펴보다보면 <이터널 선샤인>이 왜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영리한’ 영화라 불릴 수 있는 작품인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차적 픽션=현실적 픽션의 경우

짐 캐리의 영화들은 각각의 작품에서 구축된 이차적 픽션의 성격에 따라 크게 두개의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픽션 속에 구축된 또 다른 픽션이라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짐 캐리 주연의 영화는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은 텔레비전 생방송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위한 거대한 세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주인공 트루먼은 분명 영화라는 픽션 속의 또 다른 픽션, 즉 이차적 픽션에 사로잡힌 수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1990년대 할리우드에서 쏟아져나온 일련의 영화들- 즉 <토탈 리콜> <사랑의 블랙홀> <12 몽키즈> <다크 시티> <13층> 그리고 <매트릭스> 등등- 이 다양한 이차적 픽션의 수인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트루먼 쇼>가 이들 영화와의 관련하에 논의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기서 해묵은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이상 세계에 저항할 수 없을 때 세계 자체를 픽션화하고 그 세계-픽션으로부터 도주를 꿈꾸는 자를 영웅화하는 픽션은, 내가 보기엔 참으로 미심쩍은 이데올로기의 발현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만 덧붙여둔다.

여하간 <트루먼 쇼>에서는 이차적 픽션이 일종의 가상현실 혹은 ‘현실적 픽션’(realistic fiction)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짐 캐리 작품군의 첫 번째 범주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적 픽션이 거대한 속임수, 반드시 빠져나와야만 하는 기만적 픽션으로서만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블랙리스트에 오른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피터가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빠져 한 마을 공동체의 실종된 청년 루크로 오인되는 과정이 묘사되는 <마제스틱>을 떠올려보라. 한편으로 <마제스틱>은 현실적 픽션으로서의 이차적 픽션이 소망충족적 판타지의 무대로 기능하는 사례이며 그런 까닭에 짐 캐리 작품군의 두 번째 범주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이차적 픽션=과도한 픽션의 경우

짐 캐리 필모그래피의 중추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차적 픽션이 극중 인물의 소망충족적 판타지가 실현되는 대안적인 현실인 동시에 ‘과도한 픽션’(ultra-fiction)으로서 나타나는 경우이다. <마스크> <브루스 올마이티> 그리고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 같은 영화들은 이의 가장 뚜렷한 예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딱히 새로울 것 없는 변신의 모티브를 끌어들이고 있는 이들 작품에서 짐 캐리는 비의지적인 무의식적 욕망의 분출을 ‘과도한 이차적 픽션’(초인이 되거나 아예 신의 자리를 떠맡음)의 도움을 빌려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짐 캐리가 스스로의 욕망이 아니라 아들의 소망이 실현되는 이차적 픽션의 수인으로 등장하는 <라이어 라이어> 같은 영화는 사소하지만 제법 눈에 띄는 변형의 사례다. 하지만 이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 가운데 좀더 흥미로운 것은 현실의 공간을 거의 강박적이라 할 만큼 적극적으로 픽션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려 시도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들로서, <에이스 벤츄라> <케이블 가이> <맨 온 더 문>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달리 초자연적 기적! 의 존재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이들 영화들은 두 번째 범주 내에서 일종의 하위 범주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앞서 짐 캐리가 이차적 픽션의 수인에 제격인 배우임을 간파한 톰 섀디악이 <에이스 벤츄라> 이후 <라이어 라이어>나 <브루스 올마이티> 같은 영화로 지루한 제자리걸음을 했을 뿐인 반면, 벤 스틸러와 밀로스 포먼은 과도한 픽션으로서의 이차적 픽션을 바로 그 과도함을 통해 내부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영화에서 짐 캐리는 스스로가 강박적으로 창조해낸 픽션의 수인인 것처럼 묘사된다. 즉 여기서의 짐 캐리는 현실적 픽션이나 초자연적인 과도한 픽션으로서 이차적 픽션이 묘사되는 영화들에서와 달리 바로 그 자신이 픽션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맨 온 더 문>에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가 무대 위에서 쉼없이 만들어내는 픽션의 희생자들이자 수혜자가 된다. 세계에 예술을 선사하는 대신 세계 자체를 예술적 픽션으로 뒤덮어버리려 했던 그는, 스스로가 동방의 사기 치료술이라는 또 하나의 픽션에 기만당했음을 깨닫고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죽어간다.

현실적 픽션+과도한 픽션=<이터널 선샤인>

이상의 논의를 참고로 할 때,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이차적 픽션은 현실적 픽션과 과도한 픽션이 한데 얽힌 복합체임이 드러난다. 여기서의 이차적 픽션-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남김없이 삭제되는 주인공 조엘의 연애의 기억- 은 그것이 분명 실제의 체험에 뿌리를 둔 기억이라는 점에선 현실적 픽션이지만 그 기억이 첨단장비의 도움을 빌려 다시 체험될 수 있다는 설정에서는 과도한 픽션의 성격을 띤다. 또한 여기서 초자연적인 힘을 대체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힘이며 이는 과도한 픽션의 두 가지 하위 범주의 절묘한 혹은 영리한 결합의 사례에 다름 아니다.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기억의 여행은 좀더 행복했던 시절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억, 게다가 곧 삭제될 기억이라는 점에서 결코 소망충족적 판타지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 기억의 여행은 삭제작업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또 한번의 연애에 일찌감치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기도 하며 이는 영화의 서사적 구조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짐 캐리 역시 그 자신이 픽션의 창조자이자 수인이기도 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조엘은 조물주와 피조물이 일치하는 세계, 즉 꿈의 세계, 기억의 세계에 붙들린 인물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탐정과 의뢰인이 일치하는 기이한 추리소설의 주인공이다. 사실 기억삭제 전문가들은 기억의 탐색과 제거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돕기 위한 대리인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도주를 가로막는 자, 나의 뒤를 집요하게 뒤쫓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일 때 그러한 상황에서의 도주가 도무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이렇게 보면 <이터널 선샤인>이 어쩐지 짐 캐리의 이전 영화들에 대한 일종의 ‘메타픽션’(meta-fiction)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이차적 픽션은 한명의 저자가 아닌 여럿에 의해 씌어지는 픽션, 상호작용적 ‘하이퍼픽션’(hyper-fiction)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서의 이차적 픽션은 카우프만-공드리의 입장에서라면 메타픽션일 수 있겠지만 주인공 조엘의 입장에서는 ‘과도한 동시에 현실적인 하이퍼픽션’이 되는 것이다. 클레멘타인과의 연애에 얽힌 조엘의 기억을 소재로 삼은 이 하이퍼픽션의 저자에는 비단 조엘뿐만이 아니라 기억 삭제 시술을 행하는 전문가들도 포함된다. 시간을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역순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이 픽션은 한동안은 전문가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유틸리티 프로그램에 의해 지배당하지만 조엘이 어느 순간 기억의 삭제에 저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좀더 흥미진진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발한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기억의 망각에 저항하기 위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기억과 전혀 다른 종류의 기억으로 도피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미리 마련된 기억의 지도를 벗어나는 조엘의 정신적 여정, 자신의 기억 안에서 바로 그 기억에 대해 덧붙이는 조엘 자신의 논평, 그를 다시 원래의 지도 안으로 불러들이는 전문가들의 작업으로 인해 이 픽션은 좌충우돌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 픽션은 <트루먼 쇼>의 (하이퍼-)리얼한 픽션이나 <마제스틱>의 현실적 픽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임이 드러난다. 결국은 빠져나와야 할 아름다운 세계. 다만 그 세계 바깥엔 오직 망각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하이퍼텍스트란 이미 전통적 텍스트(읽기)에 의해 식민화된 것’일지 모른다는 혹자의 지적을 떠올려본다면, <이터널 선샤인>의 하이퍼픽션은 이미 짐 캐리의 이전 출연작들에 나타난 이차적 픽션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게다가 기억 삭제 작업 이전의 고백이 담긴 녹취 테이프를 ‘희생자’(?)들에게 애써 되돌려주는 메리의 존재는 <이터널 선샤인>을 감동적일진 모르나 좀 이상한 결론으로 몰고 간다. 백지 위에 다시 씌어질 수도 있었을 신선한 사랑은 이제 백지 위에 남은 흔적과 자국을 애타게 찾아 헤맬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그들의 사랑이 처음 시작되었던 바다로 가는 건 그 때문이다. 이때 파도와 모래는 불길한 암시일까 사랑의 찬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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