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스포트라이트
예전에 미처 몰랐던 남자, <이터널 선샤인>의 짐 캐리
박은영 2005-11-14

“글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찰리 카우프만은 자신의 시나리오 <이터널 선샤인>을 구해 읽고,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다고 연락해온 짐 캐리에게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제까지 그가 알아온 짐 캐리가, ‘실연에 우는 남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대면한 짐 캐리는 <에이스 벤츄라> <마스크> <덤 앤 더머>에서 보아온 그 남자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조용하고 부드러운, ‘생활인’의 모습이었고, 역할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감독 미셸 공드리는 <이터널 선샤인>의 짐 캐리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까칠한 얼굴, 낮게 깔리는 목소리,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실연남 조엘이, 세상에서 가장 탄력적인 안면 근육을 가졌고, 엉덩이로 말을 할 줄 아는 코미디언 짐 캐리의 ‘본색’이라니. <이터널 선샤인>에 과연 몇 퍼센트의 짐 캐리 ‘원액’이 함유돼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의 모습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긴, 짐 캐리라는 배우를 언제 진득이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의 눈동자가 초록이 감도는 갈색이고,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라는 것도, 은근히 소심하고 우울한 인상이라는 것도, 로맨틱한 연인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것도, 예전엔 알지 못했다.

짐 캐리가 코미디뿐 아니라 정극 연기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들추는 건 새삼스럽다. <트루먼 쇼>가 나왔을 때 이미 짐 캐리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트루먼 쇼>의 짐 캐리가 TV쇼의 우주를 탈출하던 엔딩은, 코미디 스타로 남길 바라는 관객의 요구와 기대, 그 감옥에서 벗어나고픈 그 자신의 열망이 반영된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는 그 뒤로 부쩍 자유로운 행보를 보였다. 원하는 작품이 있으면, 그것이 코미디든 드라마든, 블록버스터든 인디영화든, 목돈이든 푼돈이든, 가리지 않았다. 늘 결과가 좋았던 건 아니다. 괴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의 일생을 그린 <맨 온 더 문>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외면을 샀고, 기억상실로 남의 정체성을 안고 사는 남자 이야기인 <마제스틱>은 재난에 가까운 실패를 떠안았다. 관객은 여전히 그가 특수분장을 하고 과장된 표정연기를 선보이거나(<그린치>),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소동을 일으키는 편(<브루스 올마이티>)을 더 즐거워했지만, 짐 캐리는 그런 일들을 코미디로 ‘귀환’해야 할 신호라고 받아들이진 않았다. “나에겐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흥행의 성패는 작품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린 문제였지, 코미디 이외의 내 연기에 대한 관객의 편견에 좌우된 건 아니었다.”

<이터널 선샤인>으로 달려간 것도 비슷한 자신감과 소신 때문이었지만, 짐 캐리는 조금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던지는 몰입의 경지가 달랐던 것인데, 후유증이 길었던 <맨 온 더 문>보다 더 ‘내밀한’ 여행이었다. “상처에 앉은 딱지를 뜯어내고, 맞아, 이렇게 다친 거였지, 하고 기억해야 했다. 그 흉터들에 얽힌 분노와 후회를 모두 쏟아부으려 했고, 그래서 이 영화는 내가 사랑한 이들에게 바치는 연애편지가 되었다.” 눈앞에서 폴짝대며 정신을 쏙 빼놓던 그가 어둑한 화면 뒤로 물러나 앉은 모습이 낯설면서도, 그 그늘진 마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는 건, ‘관객이 먼저 다가오게 만들기’를 부담스러워했던 짐 캐리가 그 해묵은 과제를 제대로 풀어냈다는 뜻이리라.

<이터널 선샤인>으로 웃음기를 거둔 연기로도 어필할 수 있음을 보여줬지만, 짐 캐리는 코미디를 그만 둘 생각이 없다고 전한다. (국내개봉 순서는 바뀌었지만) <이터널 선샤인>을 찍고 나서, 곧장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의 독특한 악역 울라프 백작으로 웃음을 선사했던 것이 그 증거다. 짐 캐리는 “그저 연기하는 것이 좋고, 그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 운신의 폭을 넓혀두려는 것”이지, 코미디와 정극에 다른 가치를 매기거나, 코믹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강박이나 야심에 몸이 단 건 아니다. “무엇이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건 좋은 일이다. 코미디에 급을 매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방귀 유머에 웃는다고, 당신이 바보가 되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가 웃기려 들든 울리려 들든, 속절없이 당할 일만 남은 것 같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사진제공 R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