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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코스트너 연대기 [2]
김도훈 2005-11-02

<워터월드> 참패로 경력이 끝나다

“저는 <워터월드>가 위대한 현대 동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좋아하는 마음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가 좋았다며 열렬한 감상문을 보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영화를 흥행수입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995년

<워터 월드>

코스트너는 에고와 야먕의 값을 비싸게 치렀다. 당시 영화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였던 <워터월드>(1995)를 시작으로, 케빈 코스트너의 경력은 갑자기 끝이 났다. 그 자신이 “해양버전의 <블레이드 러너>”라고 대담하게 자신했던 영화는 흥행, 비평의 양면에서 재앙이었고, 해외시장에서의 성공으로 겨우 수지를 맞추었다. 현명한 배우라면 이쯤에서 할리우드 프랜차이즈로 돌아가 총을 잡았어야 온당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워터월드>의 실패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1억달러짜리 애국주의 묵시록 <포스트맨>(1997)에 뛰어들었다. <타이타닉> 바로 다음주에 개봉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손해를 영화사에 끼친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코스트너가 낯뜨거운 영웅으로 스스로를 숭앙한 이 영화는 농담거리가 되었고, <LA 컨피덴셜>로 그해 오스카를 받았던 <포스트맨>의 각본가 브라이언 헬겔런드는, 코스트너가 자신의 버전에서 “풍자를 덜어내고 쓸모없는 영웅주의로 치장된 1시간을 더했다”고 격렬하게 항의하며 간사하게 발을 뺐다.

일찌감치 캐스팅되었던 <진주만>에서도 퇴출된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타란티노가 <킬 빌>의 ‘빌’ 역을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코스트너는 아연실색한 결정을 내렸다. <포스트맨>을 위해 <에어포스 원>을 해리슨 포드에게 양보하고, <늑대와 춤을>을 위해 <붉은 10월>을 고사했듯이, 그는 타란티노의 청을 거절했다. 대신 그는 지나치게 고집스러워 보는 이의 가슴을 쥐어뜯는 길을 선택했다. 평원을 떠도는 자유방목자(Open ranger)들이 타락한 농장주에 맞서 싸운다는 내용의 2시간짜리 서부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코스트너는 사비를 더한 2천만달러를 주머니에 넣고서 하늘과 땅이 소실점을 향해 치닫는 캐나다의 평원으로 향했다. “누구도 한여름에 한물간 스타가 등장하는 2시간짜리 서부영화를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말리는 제작자의 손사래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여름용 블록버스터는 절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십년 뒤에 이 영화를 떠올리며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서부영화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진정한 서부영화를 보지 못한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는, 진정한 서부영화다.”

아무도 예상 못한 <오픈 레인지>의 성공

“솔직히 말해볼까요. 저는 한물갔습니다. 할리우드의 중심부에는 더이상 저를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건 제가 원치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괜찮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오픈 레인지>는 한여름에 개봉할 다른 영화들이 뿌려댈 광고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영화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영화를 믿습니다. 진솔한 이야기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2003년

누구도 실패를 의심치 않던 <오픈 레인지>는 케빈 코스트너를 구원했다. 첫 주말에만 제작비의 절반을 넘게 벌어들인 이 작품은 6주 연속 전미 박스오피스 10위권에 머무르며 6천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두었다. 비평가들은 전형적이지만 제대로 세공된 서부영화를 따스하게 다독거렸다. 로저 에버트는 “불완전하지만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아름다운 서부영화”라고 했고, <버라이어티>는 “코스트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후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 영화감독처럼 보인다”는 이례적인 찬사를 보냈다. 물론 케빈 코스트너는 하워드 혹스나 존 포드, 혹은 조지 스티븐스가 아니다. 하지만 <오픈 레인지>는 느리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고전적인 서부영화의 기운을 온전히 살려낸다. 열린 공간을 사랑하는 코스트너는 이야기와 캐릭터가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도록 하고, 그럼으로 이야기는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대신 수많은 서브 텍스트를 가지치며 관객의 호흡을 넉넉하게 허한다. 이를테면 <오픈 레인지>는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끝없는 병풍화다. “나는 언제나 긴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들을 좋아해왔고, 그런 영화들만을 만들어왔다. 이건 자신의 영화와 사랑에 빠진 어느 감독의 덧없는 허영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자기가 읽은 책의 처음 100페이지를 정말 싫어했다고, 하지만 점점 빠져들어 책을 끝내고 나서는 처음 100페이지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고. 나는 첫 번째 100페이지를 정말 좋아한다. 관객에게 결말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들 말이다. 그런 영화들은 보는이를 느긋하게 풀어주는 힘이 있다.”

<오픈 레인지> 촬영현장

<오픈 레인지>를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장르 자체를 사유하는 수정주의 서부영화의 걸작으로 치켜세우는 것에 못내 겸연쩍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망설임도 온당하다. 케빈 코스트너의 문제는 메가폰을 잡은 진솔한 감독으로서의 자신이 카메라 앞에 선 자신을 영웅화시키고 싶은 욕망과 끊임없이 투쟁한다는 점이다. <늑대와 춤을>에서 언뜻 드러났고, <포스트맨>에서 절정에 올랐던 코스트너의 영웅주의는 <오픈 레인지>에서도 완벽하게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게리 쿠퍼와 존 웨인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코스트너의 영웅은 예민하고 약해서 부스러질 것 같은, 어두운 과거를 지닌 남자다. 멜 깁슨의 영웅과는 달리, 코스트너가 연기하는 영웅은 거창한 믿음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매의 시선이 아니라, 여린 진심을 잃지 않고 군중 속에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는 늙은 수탉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진짜 영웅들은 추락하고 실패하고 결점이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결국엔 이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상과 믿음과 책임과 의무에 언제나 진실되기 때문이다.”

실패가 그를 살해하지는 못했다

“실패가 당신을 살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실패는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 욕망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죠. 저는 여전히 꿈을 추앙하는, 꿈의 팬입니다. 불행하게도 꿈은 우리 삶의 첫 번째 희생물이 되지요. 사람들은 꿈을 인생의 어떤것보다 빨리 포기하거든요.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을 위해서 말입니다.” /2002년

고집스러운 케빈 코스트너에게는 꿋꿋이 지켜온 원칙이 몇 가지 있다. 그는 결코 후속편을 만들지 않는다. “요즘 시대에, 대중적인 인기도는 무슨 문화적인 업적이나 공로와 동격이 되어버렸다. 당신이 인기있는 배우라면 인기 하나로 밥벌어먹으며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 방식이 아니다. 만약 다른 배우들이었다면 이쯤에서 <19번째 남자2> <틴 컵2> <늑대와 춤을2> <보디가드2> 등을 만들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복제하며 돈을 버는 게 좋은 방식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오래된 친구들과의 작업을 즐긴다. 그는 로랜스 캐스단과 두편의 영화(<실버라도> <와이어트 어프>)를 만들었고, 로저 도널드슨과 두편(<노 웨이 아웃> <D-13>), 론 셸턴과도 두편(<19번째 남자> <틴 컵>), 케빈 레이놀즈와는 세편의 영화(<판당고> <로빈 후드> <워터월드>)를 함께 만들었다. 그는 거장들의 뒤를 좇는 대신, 오래고 익숙한 친우와의 작업을 선택하는 버릇이 있다. 야심있는 할리우드 배우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철지난 가족애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오픈 레인지>

케빈 코스트너는 구식이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세계는 언제나 같은 인생과 야망이 반복되는 꿈의 구장이며 꿈의 서부다. 미국의 영원한 영웅 JFK에 관한 두편의 영화(<JFK> <D-13>)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아련한 추억의 시간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을 되돌리려 하는 무모한 로맨티스트. 그러므로, 주름살이 늘고나니 그의 진심이 보인다, 라는 식의 찬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워런 비티를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 이런 문장은 케빈 코스트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코스트너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는 <늑대와 춤을>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심정으로 <워터월드>와 <포스트맨>을 만들었고, 두 영화를 만드는 것과 같은 마음을 담아 <오픈 레인지>를 감독했다. 그래서 <오픈 레인지>는 케빈 코스트너를 재발견한 영화라기보다는 코스트너의 진심이 우리를 재발견한 영화이며, 진심을 담아 코스트너의 지난 괘적을 다시 훑어보라 여쭙는 등잔불 같은 영화다.

케빈 코스트너의 앞에는 이제 몇편의 작은 코미디영화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픈 레인지>(2003)와 <업사이드 오브 앵거>(2005)로 회생한 그는, 당분간 숨을 돌리며 <로빈 후드>의 영국 로케이션 이후로 팬이 돼버린 아스날(ARSENAL)의 홈구장으로 날아가 훌리건의 시간을 보낼 참이다. 하지만 그는 곧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고집과 야심으로 또 다른 거대한 프로젝트에 뛰어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참패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손 웰스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되는 것이 영영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빈 코스트너는 괴이할 정도의 진심을 간직한 채 서부로, 마운드로, 미국의 과거로 향할 것이다. 그의 진심은 느리게 느리게, 서부의 시간으로 전진한다.

“항상 저는 제 자신에게 충고를 던집니다. 누구도 서부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그것들은 더이상 팔리지도 않아. 그리고, 케빈. 이 친구야. 자네는 더이상 인기있는 배우도 아니야.” (웃음) /2003년 <오픈 레인지> 개봉 전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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