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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코스트너 연대기 [1]
김도훈 2005-11-02

케빈 코스트너는 어떻게 서부극 <오픈 레인지>로 재기에 성공했나

철지난 유행가처럼 누구도 부르지 않던 이름, 케빈 코스트너가 돌아왔다. 미국 개봉으로부터 2년 만에 한국을 찾은 케빈 코스트너의 <오픈 레인지>(이번호 55쪽 프리뷰 참조)는 광활한 풍광을 말보로 광고처럼 두르고서 선과 악의 대결을 담아내는 구식의 서부영화이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새로운 관객의 주목을 단호히 요하는 작가의 서부영화다. <워터월드>와 <포스트맨>으로 침몰했던 케빈 코스트너는 어떻게 다시 <늑대와 춤을>과 <와이어트 어프>의 세계로 돌아와 숨을 찾았을까. 스쳐지나간 마차를 좇는 수색자의 심정으로 훑어본 케빈 코스트너의 지난한 연대기.

초라한, 이 남자를 보라

“저는 목표가 옳다고 생각하는 한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틴 컵>의 주인공은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본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설령 지더라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지고 싶어했던 겁니다. 제가 사는 방식이 바로 그런 식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늑대와 춤을>

“당신처럼 지각있는 남자가 어떻게 오스카 시즌이 다가오는 것을 견디고 사는지 모르겠군요.” 2002년 <버라이어티>의 편집장 피터 바트는 케빈 코스트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만약 <늑대와 춤을>이 내 경력 최고의 영화로 남는다 해도 그 그늘에서 달아나지는 않겠다”는 코스트너의 수상소감을 ‘불길한 예언’이었다 회상한 그는, 케빈 코스트너의 잘못된 선택들을 준엄하게 꾸짖은 뒤 “오스카 연단에서의 소상소감은 두 번째가 더 즐거울 것”이라며 비꼬듯 격려하듯 편지를 닫았다. 케빈 코스트너는 가시돋힌 서한에 반박문을 낼 의욕도 없을 만큼 초라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포스트맨>(1997) 이후로 그의 경력은 정신없이 내리막길을 뛰어달렸고, <3000마일>(2001)과 <드래곤플라이>(2002)는 한물간 스타의 피를 빨아 내동댕이칠 작정으로 만들어진 작품 같았다.

“배우가 영화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고 할 때, 그들은 오직 자신의 운명만을 끝장낼 뿐이다. 코스트너는 재난이 되었다. 누구도 그를 원하지 않는다. 배급업자도, 감독도, 관객도, 나도.” <머나먼 사랑>(Beyond Borders)의 제작 중에 코스트너를 퇴출시켰던 만달레이 영화사 대표의 씁쓸한 회고처럼, 누구도 케빈 코스트너라는 배우를 원치 않았다. 샘 레이미의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1999)의 러닝타임을 두고 유니버설과 신경전을 벌였던 일화는 케빈 코스트너를 메이저 영화사의 기피대상으로 낙인찍은 지 오래였다. “나도 그들과 영화를 다시 만들 생각은 없다. 나의 모든 것을 바친 연기였고, 그들이 한 짓을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을 것이다.” 조로한 수사자의 포효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0, 90년대의 가장 빛나는 별

“저는 명성이 문화적인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연기자에게는 그들만의 자리가 있는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유명세가 업적이라고요? 저는 지금껏 그 어떤 스타들보다도 저를 적극적으로 노출해왔습니다. 하지만 <늑대와의 춤을>을 만들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이야기하자면, 이제 그런 유명세는 누릴 만큼 누렸습니다.” /1989년

<판당고>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케빈 코스트너는 할리우드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1974년산 에로영화 <말리부의 뜨거운 여름>(Malibu Hot Summer)으로 데뷔한 그는 몇편의 저예산영화들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케빈 레이놀즈의 <판당고>(1985)로 주목받은 뒤 로렌스 캐스단의 서부영화 <실버라도>(1985)에서의 천방지축 총잡이 역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80년대 스타들의 과도한 남성적 매력에 질려 있던 관객에게 코스트너는 완벽한 대체물이었다. <언터쳐블>(1987)에서의 그는 법전을 뒤로하고 완력을 휘두르는 람보가 아니라, 고집있게 법전을 들고 돌진하는 지적인 남자였고, 스릴러영화 <노 웨이 아웃>의 그는 스테로이드 주사자국 없이 성마른 가슴의 섹스 심벌이었다. 두편의 야구영화 <19번째 남자>(1988)와 <꿈의 구장>(1989)이 성공을 거두자 마운드의 꿈을 이야기하는 코스트너는 중산층 미국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게리 쿠퍼였고 제임스 스튜어트였다. 그리고 <늑대와 춤을>(1990)이 도착했다.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을 따서 ‘케빈의 문’이라 비웃던 사람들은 <늑대와 춤을>(1990)의 거대한 성공 앞에서 코스트너를 오슨 웰스에 비교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고독하게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하는 미국인 남자의 자화상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로빈 후드>(1991), <보디 가드>(1992) 같은 상업영화와 <JFK>(1991), <퍼펙트 월드>(1993) 같은 작가영화 사이에서 벌인 준수한 곡예는 코스트너에 대한 관객과 할리우드의 신뢰를 더했다. 마흔의 나이로 할리우드 명성의 바벨탑, 그 아슬아슬한 정상에 오른 코스트너는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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