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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망종>과 <용서받지 못한 자>

영화제에선 좋은 영화만한 피로회복제가 없다. 하루 몇편씩 영화를 보는 일정을 계속하다보면 상당한 체력이 소진되는데 이럴 때 정말 눈이 번쩍 떠지는 영화 한편이 간절해진다. 맛난 음식이나 포근한 잠자리로 충족시킬 수 없는 갈증, 거창하게 말하면 이런 걸 ‘영혼의 허기’라고 하던가. 이번주 전영객잔에 정성일씨가 “진짜 재미는 그 영화들을 보기 위해 시간표를 짜는 순간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쓴 것도 영혼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시간표에서 이미 결정나기 때문일 것이다. 각설하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준 영화는 <쓰리 타임즈> <부운> <연연풍진> <용서받지 못한 자> <망종>이었다. 이중 ‘발견’에 해당하는 영화만 꼽자면 <망종>과 <용서받지 못한 자>이다.

<망종>

<용서받지 못한 자>

<망종>이 어떤 영화인지는 이번주 특집기사에 실려 있다. 이영진 기자는 <망종>에 대해 “희망을 심기위해 절망을 베어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그것은 절망에 맞서는 어느 조선족 여인의 초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일러주는 표현이다. 사실 나는 장률 감독의 전작을 보지 못했기에 <망종>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있진 않았다. 진지한 영화라는 예상과 더불어 다소 지루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순식간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배우들의 화사한 외모나 격정적인 감정표현이나 우아하고 세련된 장식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거꾸로 이 영화는 너무나 황량한 풍경 속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거의 대부분 장면에서 등장인물은 많아야 네다섯명을 넘지 않고 거리에선 자동차조차 보기 힘들며 기찻길 옆 오막살이엔 변변한 가구 하나 없다. <망종>은 마치 사막에서 찍은 영화처럼 고독하고 쓸쓸하다. 여기 비하면 지아장커의 영화조차 화사해 보일 지경이다. 역설적이지만 <망종>에선 바로 이 텅 빈 공간이 스펙터클이다. 인물 내면의 풍경이 그들의 표정이 아니라 그들의 공간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얼핏 <망종>은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혹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을 연상시키지만 누군가의 아류로 보이지 않는 독창성을,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장률은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윤종빈 감독이 대학 졸업작품으로 만든 장편영화다. 이 영화는 지난해 <마이 제너레이션>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장편영화가 한국영화의 새로운 출구를 마련해줄 것이란 믿음을 갖게 한다. 군대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남성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린 <용서받지 못한 자>는 남성성의 실체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우스꽝스러운지를 똑바로 응시한다. 영화를 보면서 군대에서 비슷한 일을 겪어봤던 나는 왜 그 시절을 잊고 지냈을까 궁금해졌다. 아마 그만큼 잊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용서받지 못한 자>가 놀라운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덮어두고 싶어 할 정신적 상처에서 고통만이 아니라 웃음까지 건져올린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추어라고 믿기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런 연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마이 제너레이션>이나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영화에서 비전문배우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연기야말로 디지털 장편영화에서 발견하는 새로움이 아닌가 싶다. 스타시스템이 상당한 부작용을 낳고 있는 지금 영화계가 돌아봐야 할 지점인 것이다.

이번호엔 여기저기 부산국제영화제와 관련된 기사가 많다. 언급된 많은 영화들을 영화제가 아니라 일반 극장에서 하루빨리 만날 수 있기를. 그때가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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