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 15분 전. 안성기가 온유한 바람처럼 문을 흔들며 들어선다. 본분을 잊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산한 카페가 비로소 눈을 비비며 깨어나 카페다워진다. 안성기는 기자와 마주앉고도 들고온 종이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한국·중국·일본·홍콩 4개국 합작영화 <묵공>의 중국어 대사였다. “잠도 푹 잤는데 내가 왜 피곤한가 곰곰 생각해보니 이게 내내 머리 한구석에 달라붙어 있어 그랬나봐요.” 일찍 오길 잘했다고 안도했던 기자는 훼방꾼이 된 듯 미안해진다. <형사 Duelist>를 마치고 이제 홍콩 배우 유덕화와 공연할 <묵공>에 부쩍 마음을 쏟고 있는 안성기는, 53년 전 스크린에 데뷔했다. 그리고 13살에서 25살까지를 제외하면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도합 40년간 줄곧 영화배우였으며, 오직 영화배우였다.
그 세월을 도보로 통과한 안성기의 입 양끝에는 주름이 그린 넉넉한 괄호가 걸려 있다. 통상 사물의 이면을 지적할 때 쓰이는 괄호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라는 식의 자세를 대변하는데, 이는 안성기라는 배우/영화인/남자의 색깔을 가장 적절히 표기하는 부호이기도 하다. 얼마 전 매니지먼트와 제작사의 입장이 부딪혔을 때 그는 어느 토론회에 초청됐다. 그리고 “제작사는 표준 규약을 제시하고 매니지먼트사의 아이디어도 종합해서 공약수를 이끌어내자”는 진심어린 절충안을 제안했다. 그처럼, 안성기는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내치는 손짓이 아니라 쓸어담는 손길로 해결하려는 본능을 지닌 사람이다. 돌아보면, 안성기를 내세워 싸웠던 1980년대 사회비판적 영화들도 그를 투사로 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선량한 밑바탕에 그려진 밀려나고 짓눌린 인간의 표정. 안성기의 얼굴은 다만 그것을 영화의 무기로 쥐어주었다. 커피가 나왔다. 이 완전무결한 신사는 처음 찻잔 받침에서 잔을 들어올린 뒤 인터뷰 내내 그것을 나무 테이블에 직접 내려놓았다. 도기 잔과 받침이 부딪는 소리가 행여 기자의 녹음기에 들어갈까 염려한 배려임을 둔한 기자가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기자에겐, 만나면 즐겁지만 책상에 돌아와 기사를 쓰려면 난감한 대상이 있고, 반대로 인터뷰는 괴로웠는데 쓸 것이 많은 대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뵙는 동안 편안하지만 워낙 반듯한 말씀만 들려주셔서, 기자들한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알고 계시죠? (웃음)
=하하. 그렇다고 억지로 만들 수도 없고, 참. 파격은 작품을 통해서 하고, 일상은 착실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하니까 좋게 얘기하면 한결같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아유 지루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난 이 생활이 지루한 듯해도 지나고 나면 참 짧다고 느낄 것 같아요.
-성함을 검색어로 치면 다른 사람 기사가 절반입니다. 하도 많은 사람이 존경한다고 언급해서 그런 거죠. 주연상도 스무번 가까이 받으셨지만, 온갖 상이나 투표에서 상복이 많으십니다. 심지어 자랑스런 ROTC상, 배낭여행 같이 가고픈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15대 대선 때는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가 공히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꼽았는데 그게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차이’를 무화하는 이미지를 지녔다는 뜻이니까요.
=(나를 거명하면) 적어도 책잡힐 일이 없어서죠. 내가 안티가 거의 없다는데, 요즘이 하향평준화랄까, ‘안티가 없다’가 곧 ‘좋다’로 통하는 세상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현상을 보는 내 기분은 글쎄,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까 짧게 지나가는 세월이라고 얘기했듯이 그냥 그게 내 몫인 거 같아. 내가 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아, 저기 내 다른 모습이 있는데”라고 한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본인도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 있는 사람인데, 세상은 자신을 모든 것을 용해하는 물 같은 존재로 본다는 사실에 뜨악한 적은 없었나요?
=뭐 내가 지금 와서 입장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고(웃음), 즐거움의 종류를 선택하는 거죠. 우리 시절로 치면 고고장이나 디스코장처럼 다 잊고 몰입해서 노는 곳도 있고 YMCA 레크리에이션 클럽에 가서 놀 수도 있어요. 물론 전자가 훨씬 쉬운 것이고 YMCA 가서 수건돌리기 하고 있으면 답답할 거야. 그러나 디스코장은 쉬운 반면 뒷맛은 그리 좋지 않아요. 반면 수건돌리기 하다보면(웃음) 나도 모르게 순수해지고, 오래 지속되는 즐거움이 나오거든. 나는 그처럼 좀 힘이 들어도 끝없이 샘솟는 낙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
-주변에 후배도 영화인도 많이 모입니다. 그러다보면 그중에서 서로 더 친하고 덜 친한 그룹도 있고 상반된 이야기도 할 텐데요. 제가 접한 분들이 선생님에 대해 들려준 공통된 인상은, ‘배려와 조율의 달인’입니다. 어쩌다 갈등이 생겨 분위기가 흐려지면, 모두의 입장을 살려주면서 평소 멀리하던 술이나 노래까지 불사하면서 분위기를 다시 부드럽게 돌려놓으신다고요.
=아닌 건 아니라고 따끔하게 말해야 하는데, 내 화법은 단점을 지적하는 쪽이 아니라 ‘그보다는 너는 이게 더 좋아’라고 장점에 집중하는 식으로 나가요.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부딪칠 때 확 붙고 망가지고 이런 모습을 좀 보여야 저 사람도 나랑 똑같구나 할 텐데, 항상 반듯하고 지치지도 않으니까.
-댁에 전화 두대를 놓고 한대는 자동응답기로 어떤 용건이든 접수하셨다가 반드시 답변을 주시는 걸로 유명합니다. 시나리오를 거절하더라도 꼭 직접 만나서 하시고요. 말이 쉽지 만만한 일이 아닐 텐데요.
=그런데, 그건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그 자체가 살아가는 핵심인 거죠. 그걸 왜 자꾸 놓치는지 모르겠어요. (안타까운 투로 강조한다) 그게 예의고 살아가는 일이지, 나는 여기서 따로 살고 저쪽은 내 일이 아니고 그게 아니죠. 그런데 ‘자기 일’을 간과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는 경우가 요즘에는 많은 것 같아요.
-‘내 일’의 범주를 넓게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런 생각은 어디에서 기인할까요? 아역 시절에는 몹시 개구쟁이였다고 들었는데, 인생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고 남의 일 중 많은 부분이 내 일에 속한다고 여기는 어른이 언제 어떻게 생겨난 걸까요?
=성격이 변한 건 아닌 것 같아. 심성을 말하자면, 우리 어머니가 남을 자기보다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거든요. 평생 주부로 사신 평범한 분인데 늘 남부터 배려했어요. 아버지는 영화 일을 하셨는데(현진영화사 대표를 지낸 안화영씨) 일 끝나면 곧장 집이었어요. 그렇게 언제나 가정을 지키고 계신 두분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우리 형님은 또 안 그래요. 일 끝나면 술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 좋아해.
-시끄러운 분쟁을 무척 꺼리시죠?
=언제나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드니까 화도 잘 못 내죠. 화라는 것이 당시에 바짝 나야지 싸움이 나고 그러는 건데, 나는 늘 지나고 나서야 ‘아하, 이거 화나는 일이었구먼’, 그래요. 그래봤자 상황은 벌써 다 끝난 거고, 하하. 어쩌다 화를 내면 사람들이 엄청 놀라. 그러면 보는 내가 어찌나 미안한지, ‘난 이러면 안 되는구나’ 생각하죠. 내가 속으로 화나면, 우리 박중훈씨가 아주 잘 알아. 자리에서 점점 말수가 적어지면‘야, 이건 굉장히 화난 거다’라고 알아차리죠. (웃음)
-각종 경조사, 영화계 행사 초청을 거절 못하는 성품이라 자주 응하시다보니 이제 오히려 안 가면 ‘왜 우리만 미워하냐’고 서운해하는 지경이 됐다던데요.
=어쩌다가 이렇게 헤어나오지 못하게 됐는지 참, 큰 업보라는 생각이…. (좌중 폭소)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내게 어떤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와주면 너무 반갑고 좋아요.
-그런데 이제는 하객을 넘어서 주최 입장이 되셨습니다. 아시아나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직에다 부산영화제 수석부집행위원장으로도 위촉되셨죠.
=아시아나단편영화제에서 내가 위원장이라 기대하는 것은 개막, 폐막 때 후배 배우들이 몇명 와서 자리를 빛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내가 말 안 해도 와준다면 너무나 고맙겠지. 부산은 ‘부’위원장이니 해보겠다고 했어요. 물론 명예롭고 우리 영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난 현장에서 내가 얼마까지 갈 수 있는가에 인생을 걸고 있거든요. 후배들한테 많이 이야기해요. ‘열심히 할 테니, 내가 어디까지 가나 한번 유심히 보고 있어라. 그리고 적어도 너도 거기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라’라고.
-본인이 간 곳까지 다니는 길이 만들어지는 자리네요.
=선배님들 중에도 멀리 가신 분들이 계신데, 한국영화에 단절이 있다보니 연속감을 못 갖는 거죠. 그런데 나는 후배들과 죽 같이 활동하며 길을 가고 있으니 나중에 후배들이 호흡을 길게 갖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싶어요.
“가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거슬러올라갈까요. 대학 시절 베트남어 전공을 살려 현지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베트남이 패망해 좌절된 뒤 성인배우로 복귀하신 걸로 압니다. 아역배우 일을 접고 성인배우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 그러니까 배우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동안은 어떤 인생을 그리셨는지 궁금한데요.
=좀 막연했어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 요량이었지. 그러나 자유를 좋아하고 제압받기를 싫어해서, ROTC였지만 군인 될 생각은 없었어요. 베트남에 가서 큰 기업에 취직하면 홍보부처럼 재미난 부서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 아무튼 창작하는 쪽 일에 끌렸어요. 예전에 한 1년 그림을 그려봤어요. 실물을 모사하는 것 말고 오일 파스텔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렸는데 아주 재밌어서 영화 안 했으면 그림을 그렸지 않을까 싶었어. 아들 다빈이도 중학교 때 미술은 교내에서 제일로 인정받았고 고등학교 가서도 그쪽 일은 도맡고 있어요. 막내도 비슷한 걸 보면 아이들이 엄마(조각 전공)도 닮았지만 내게도 그런 소질이 있는 듯해요.
-<씨네21> 추석호 한국영화 마케팅사 특집에 따르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 ‘완전 성기 노출’이라는 카피로 홍보했다가 추궁받자 성인이 된 안성기를 완전히 노출했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더군요. 이것은 성인배우로 스크린 복귀한 당시에도 과거 아역으로서 지명도가 여전했다는 의미인가요?
=보통 사람은 거의 몰랐고, 젊은이들은 신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른들이나 ‘아역 하던 애가 영화하나 보네?’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영화를 보러갈 정도는 아니고. 대신 젊은 관객은 선입관 없이 나를 성인배우로 받아들였어요.
-<안개마을>(1982)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깨철은 대사가 거의 없는데, 마치 구석에 부려놓은 곡식자루처럼 구겨져 있다가 땅을 기는 뱀처럼 몸을 움직이지요. 그것을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은, 선생님은 민첩한 근육질 배우인데도 외향적인 자세나 움직임보다 몸을 작게 만들고 느리게 움직일 때가 훨씬 인상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느리게 동작하는 것이 한결 편해요. 빠르게 움직이는 연기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봐야죠. 지금 말투도 그렇지만, 제가 상당히 굼떠요. 그래서 임권택 감독님과 나란히 거론되기도 하지만서도…. (웃음) 녹화된 내 모습을 보면 나도 답답하니 보는 사람은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말이죠, 작은 움직임이 울림이 큰 것은, 모든 배우가 마찬가지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가 몽땅 터뜨린 상태보다 훨씬 큰 힘을 갖거든요. 다 보여준다는 건 그만큼 재미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배우가 그걸 보여주고 싶다 해서 영화가 뜻대로 가지는 않아요. 거기에 비극이 좀 있죠. (웃음) 그것만 하겠다고 무조건 기다리면 영화를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니까.
-<안개마을>과 <깊고 푸른 밤>(1985)의 배역은 성적 매력이 강한 남자였습니다. 그것도 치명적일 정도로, 운명을 바꿔놓을 만큼. 널리 알려진 대로 언젠가부터 에로틱한 신이 포함된 멜로드라마를 배제해오셨는데, 저는 그런 선생님의 선택이 공인되면서 에로틱한 멜로드라마뿐 아니라 훨씬 넓은 범주의 시나리오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지 않을까 가끔 걱정이 됩니다.
=내가 1978년에 다시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70년대 영화계는 여성영화, 새마을영화, 반공영화가 주도했어요. 당시 영화인들은 존경이나 동경은커녕 멸시까지 받았어요. 촬영하고 있으면 행인들의 ‘아이구, 한심한 인간들’ 하는 시선이 느껴졌죠.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앞서 성인으로서 조연을 한 두편도 그 범주에 해당됐죠. 그 느낌이 너무 싫었고 뼈에 사무쳤어요. 내가 일생을 걸고 하는 일인데 눈총을 받으면서 하긴 싫었지. 그러다보니 영화가 건드리지 않은 소재를 다룬 작품을 선택했고, 좀 벗고 하면 사람 몇만 더 온다는 말이 속상해서 더욱 안 했어요.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면 내성적인 영민이 마침내 신혼여행 가서 샤워하고 다시 양복입고 나와서 <주말의 영화> 보잖아요. 그런 표현이, 신혼여행이니까 당연히 침대로 가는 설정보다 훨씬 재미있었어요.
-이젠 한국영화가 흥행과 벗는 것이 동일시되는 상황이 아니고, 쉬운 예로 김기덕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처럼 인간의 더 큰 조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섹스를 포함하는 작품들도 많지 않습니까?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를 받을 경우, 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물론 해야 할 이야기에 필요하다면 극복할 수 있어요. 다만, 내가 그런 연기를 요구하는 시나리오 자체가 드문 나이에 들어선 거 같아요. 김기덕 감독 경우는, 예전에 <사마리아>를 같이 하자는 말이 오갔어요. 그런데 내가 본 시나리오는 아빠가 딸을 죽이는 거였어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못하겠다고 했어요. 지금도 나는 기회가 있으면 함께 작품하고 싶은 마음이 많은데 김기덕 감독이 삐친 것 같아. (웃음)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후속작이 예전만한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때로는 안성기 선생님이 80년대 영화와 현재 영화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중간 위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막바로 고참 선배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박탈감은 없나요?
=선배는 고사하고 바로 밑 후배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박중훈씨랑 가끔 일찍 죽은 임성민씨 얘기를 해요. ‘성민이가 있으면 지금 형님, 하면서 잘 지낼 텐데’라고. 굉장히 멋진 친구였어요. 지금 활동하는 배우는 많지만, 아주 젊었을 때부터 예전 어른들과 어울려 일해온 사람이 없거든요. 가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죠.
-이장호 감독님 영화에서 성인배우로 복귀했고 배창호 감독님과는 콤비로 성공작을 양산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께는 영화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신 바 있고요. <형사…>까지 4편을 함께한 이명세 감독님까지, 각각의 연출자가 안성기라는 배우에게 무엇을 요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장호 감독의 경우는, <바람 불어 좋은 날> 이외에는 배우 입장에서 꼭 집어 나를 위한 영화는 없었어요. 그러나 섭섭한 적은 없어요. <천재선언> 할 때는 좀 힘들었죠. 제발 집에서 콘티 좀 그려 오십사 당부하기도 했는데 하하, 바빠야만 생각이 떠오른대요. 배우로서 나를 좀더 이용해도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은 있죠. 임 감독님은 당신께서 흔들림 없으시듯 내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뽑아내려고 하신 것 같아요. 배창호 감독은 차라리 둘이서 같은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기분이어서 어떤 인물이건 다른 배우를 찾느니 나랑 한다는 입장에 가까웠죠.
-시대극이 불편한 이유를 대사가 많아서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방금 동작도 말도 느린 게 편하다고도 하셨고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명세 감독은 더 빠른 말과 액션을 안성기라는 배우에게 강제해서, 영화적 속도의 변칙을 강조하는 느낌도 듭니다. <남자는 괴로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에서 보듯 인형 다루듯 움직이기도 하고요.
=그러게, 나를 모르모트로 생각하나봐. 하하. 이명세 감독은 엉뚱한 데가 있어서 내 생각이 자꾸 빗나가는데, 그 빗나감이 새로운 재미로 이어지는 맛으로 찍어요. <형사…>에서는 제 생각엔 좀더 멋있게 나오려니 했는데 멋있는 건 우리 강동원씨가 다 하고, 내 몫은 재미있는 역이었지. 그걸 비애라고 생각하면… 하하, 슬프겠죠? 그게 나의 몫이고 영화가 같이 어우러진다면 좋은 거죠.
-<형사…>의 첫 인상은, 다른 장르의 연기들이 시치미 떼고 섞여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병판은 정극 연기, 슬픈눈은 순정만화 같은 연기, 남순과 안 포교는 마당놀이의 말뚝이 같은 연기로 보였는데요.
=처음부터 안 포교는 크게 얽매이지 않고 뭐든 가능한 사람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영화의 인물구도가 꽉 짜여 있는데, 안 포교처럼 뭘 해도 괜찮은 인물이 하나 있음으로써 쉬어갈 수도 있고 많은 걸 풀어갈 수 있었죠. 초반의 빠른 대사는 랩처럼 하라고 주문받았어요. 차만 타면 어마어마하게 외워댄 덕분에 (짧은 시범) 기나긴 대사가 거의 한번에 오케이가 나서 스탭들이 ‘우와’ 했지. 하하.
“얼굴이 빤빤하면 표정이 확실히 적지”
-어떤 배우나 제약이 있고 특기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웃음도 많지만 그보다 안면근육을 활발히 써서 주름이 많아진 듯합니다. TV 인터뷰를 보면 딱 한 구절 말하는 동안도 표정 가짓수가 아주 많습니다. 지금도요. 연기에서 표정은 어떤 비중입니까?
=나 안면근육 잘 움직여요. 별거별거 다해. (갑자기 화려한 시범) 많이 남아돌아가서 잘 구겨지는 거 같아. 얼굴이 빤빤하면 표정이 확실히 적지. 그러니까 성형수술은 배우로서는 참 안 좋은 거지. 늘 내가 말하지만, 영화에서는 연기를 잘하는 게 예쁘지, 얼굴이 예쁘다고 예쁘다곤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예뻐지려고 하지 말고 연기를 열심히 하라 그러지. 표정은 내게 연기의 구상과 준비에서 대단히 중요해요. 표정만으로 잘 표현될 수 있으면 대사는 많이 줄여도 된다고 봐요.
-또 한 가지는 음색입니다. 굉장히 독특한데 비음이랄까 성우 배한성씨와도 색깔이 약간 비슷하고요. 쩌렁쩌렁 울리는 최민식씨 경우와 반대로, 음역이 좁고 안쪽으로 소리가 울리는 느낌입니다. 어찌보면 연륜이 깊어지면서 갑갑함이 있을 듯한데요.
=80년대에는 고민이 많았어요. 배창호 감독, 이명세 감독이 아쉬움을 표했죠. 힘이 실리고 내뱉을 때는 시원하게 확 터뜨려야 하는데 뭔가 답답하게 막혀 있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신경을 굉장히 썼고 계속 연습도 하고 리딩하고 소리를 냈어요. 덕분에 예전보다 지금은 대사를 많이 밖으로 던지게 됐죠.
-얼마 전부터 로드 매니저를 두고 계시지만 줄곧 혼자 일하셨습니다. 그 이유 하나가 일이 많아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적정한 선을 찾아 무리없이 사는 방식이 맞다고 판단하신 건가요?
=연기 초년부터, 집이 있어도 집에서 못 자고 가족이 있어도 가족과 못 사는 선배들의 힘든 세월을 보면서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실했어요. 지금이야 겹치기 안 하는 것이 얘깃거리도 아니지만 당시 내가 한편씩 한다고 선언했을 때는 굉장한 결정이었어요. 조금 잘된다고 막살면 안 된다는 입장인 거지. 배우는 언제나 ‘아아, 촬영하고 싶어’ 하는 상태에 있는 게 아주 중요해요. 평소 생활로 그 상태를 만들어놓아야지. 근데 요즘 다들 그게 좀 안 되죠? 지금 나도 <한반도>랑 <묵공>이 겹쳐서 부담스러운데 둘 중 하나만 있다면 아주 행복하겠죠.
-스케줄에 쫓겨 밴에 실려 바쁘게 다니는 후배들 보면 안타깝겠네요.
=하여튼 일들이 무척 많은 것 같아. 짧은 호흡으로 살다보면 나의 시간 자체가 짧아져요. 현장 가는 일이 반드시 즐거워야 해요. 배우 입장에서 보면 관객과 만나는 실질적 지점인 현장을 등한시하거나 게을리하거나 준비가 불충분하면 용서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자기도 모르는 새 간과하고 다른 데서 중요한 것을 찾으려고들 하는 것 같아요.
-뮤지컬영화 <미스터 레이디>는 캐스팅이 되어 촬영이 진척되다가 중단됐습니다. 자신이 캐스팅됐는데 투자가 안 된다거나 하는 경우 배우들이 무척 참담해하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미스터 레이디>는 1/3 찍다가 중지됐어요.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일 수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나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요. 아직 우리 영화시장이 뮤지컬 장르를 낯설어하는구나 하죠. 아이들 앵벌이시키는 왕초 역이었어요. 내 장면은 옥상에서 꼬마들이랑 막 노래하고, 몸으로 때우는 쪽이라(웃음) 제작비가 별로 안 들어서 거의 다 찍었는데 아깝죠. 그 필름은 잘 놔뒀으면 좋겠어. 막 질러대니까 뱃속 소리도 나오고 내가 노래를 이렇게 잘하나 싶어 신났어요.
-공적인 활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니세프 구호활동처럼 누구나 정서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이슈를 벗어나는 문제에 이르면 어떨까요? 예컨대 부의 분배나 성적 소수자의 권리처럼 국민적으로 딱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이슈들이 있을 때 얼마나 명백한 입장을 표명하실 수 있을까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자연인으로서는 얼마든지 견해를 가질 수 있는데 배우라는 공인 입장에서 보면 어떤 확실한 위치나 생각을 갖게 되면, 거기에 대한 선입견이 굉장히 커지는 것이 우리 사회예요.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영화이고 나는 영화를 해야 돼요. 영화를 떠나서 어떤 다른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거지요. 선입견 없이 어떤 역이든 잘 흡수될 수 있도록. 그게 배우의 역할이고 영화를 통해서 발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외람되지만 선생님은 다소 위험한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실미도>에서 “김일성 목을 따와라”할 때나 “그럼 차라리 베트남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할 때, 그 말들이 가리키는 역사적 상황을 돌아보기보다, 그 자리에 안성기라는 특수한 배우가 있음으로 해서 모든 것이 사나이의 의리문제로 아름답게 뭉뚱그려지는 효과를 느끼거든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예민한 얘기라 어떻게 표현할까…. 한 입장이 있으면 반대 입장이 늘 있거든요? 한사코 한 입장으로만 간다면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제가 인물이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다 했단 말이에요. 어떤 입장이 됐을 때 거기 충실해야 하는 것이 배우인 거죠? 그 영화의 시각이 나랑 정 안 맞으면 안 해야 하고, 기왕 하기로 하면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실미도>는 무엇보다 그간 감춰졌던 역사를 들춰내는 데 본질이 있었으니, 더 큰 것을 위해 내가 한 역은 충분히 감수할 만했던 것이죠.
-만약 선생님이 공적으로 싸움에 나선다면 영화계가 바깥 세계로부터 위협당하거나 창작의 자유를 위협당할 때뿐이겠군요.
=스크린쿼터도 그것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싸워나가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벌써 그만두었겠죠.
-<묵공>에 기대가 크실 것 같습니다.
=중국말 대사를 보니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괴로운데(웃음), 원작 만화는 아주 재미있어요. 만화가 10권이라면 영화는 4권 분량쯤? 유덕화가 약자를 돕는 묵가 사상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나는 적수인 조나라 장군이죠. 다른 나라를 치러가는 길목의 작은 성이 비켜주지 않아 부득이 치는데, 유덕화가 약자를 도우러 와요. 세계관의 충돌? 그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하는 것도 둘째고, 이 장군은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면 너무 기뻐하고 겨뤄보고 싶어 못 참는 인물이에요. 캐릭터가 재미있어 응했어요. 전쟁이지만 액션보다 연기가 많을 거예요.
=두 영화 모두 여름쯤 극장에 나올 것 같아요. 또 다른 프로젝트? 박중훈씨한테 혹시 못 들었어요? (엷은 미소) 나랑 중훈씨랑 하는 영화를 어디선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