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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9] - 이만희

밤의 시인, 이만희 회고전

전설에서 깨어나 영화로 부활하라

<휴일>

이만희는 전설적인 감독이다. 30년 전 그가 편집실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4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을 때 이미 그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세상은 그의 남아 있는 작품보다는 사라진 작품을, 그리고 그의 삶보다는 그의 죽음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고, 영화를 할 수 없는 절망으로 죽어간 이만희는 이 땅에서 영화하는 이의 영감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영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사실 누가 감히 전설을, 그의 처절한 삶과 안타까운 죽음 앞에 쉽게 그의 작품세계를 논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을는지 모른다. 이만희의 영화들이다. 세상은 이만희를 한국 영화언어의 신기원을 세운 <만추>로, 그가 마지막 숨결을 쏟았던 <삼포가는 길>을 만든 예술적이며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로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그가 만든 50편의 영화에서 4분의 3을 차지하는 전쟁영화와 스릴러라는 장르영화를 열외로 놓는, 혹은 당시 영화계의 상황에 맞추어 “어쩔 수 없이 만들었던 작품”이라고 변명하는 억지와 <귀로>를 그저 <만추>의 연장선에서 읽어내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의 전설에 압도되어 그의 실체를 보지 못해왔던 것인지 모른다. 이 점에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회고전 “밤의 시인 이만희, 영화에 살다”는 이만희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다른 해보다 많은 10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 어떤 누구의 증언보다도 이만희의 영화가 가장 충실히 그의 영화 세계와 작가관을 설명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만희는 밤의 시인이다. 그가 유난히 밤장면을 선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어둡고 우울하며 고독한, 그러나 새벽을 향한 절망적인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밤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절묘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래서 종종 밤에 갇히고 새벽을 갈망하며 죽어간다. <검은 머리>의 조직 보스 장동휘가 그렇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간 최전방 초소에서 사투를 벌이던 <04:00-1950>의 병사들이 그렇다. 밤을 간신히 버텨낸 <귀로>의 여주인공은 아침이 약속하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쓰러져갔고, <휴일>의 남자는 모든 것을 잃고 밤 속으로 침잠해간다. <군번 없는 용사>에서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아버지를 총살한 동생과 동생을 응징한 형은 밤의 포화 속에 사라져가고, 신분상승을 위해 연인을 살해한 <마의 계단>의 주인공은 밤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이만희의 주인공들은 밤에 묻혀가지만 그의 영화들이 한없이 절망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도도함 때문이다. 이만희는 자신의 인물들을 한계상황에 몰아넣는다. 전쟁과 범죄조직은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적절한 배경이 된다.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고, 도덕적인 잣대가 불분명하지만, 절대적인 게임의 규칙이 엄연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타의에 의한 것일 수 있지만 상황에 맞서는 그들의 태도는 언제나 선택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숙명적으로 절망의 길을 걷지만 도도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군번 없는 용사>

<검은 머리>

그래서 이만희의 영화는 세련되고 아름답다. 서정민, 이석기, 김덕진 촬영감독과의 협연으로 이어지는 이만희의 영상세계는 밀실처럼 밀폐된 그러나 한 가닥 빛으로 인해 정교하게 어우러지는 빛과 그림자의 조화로 숨막히게 아름다운 이미지로 채워진다. 하늘보다는 땅을, 대로보다는 골목길을, 여백보다는 채워짐을 선호했던 이만희의 비전은 한국 영화사를 대표하는 이들 감독에 의해 구체화된다.

이번 회고전의 최대 수확은 30여년간 미개봉 상태에 있던 <휴일>의 발견이다. 그러나 좀더 큰 수확은 이만희의 발견일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전설 속에 박제되어 있던 이만희를 세상으로 불러내어 한국 영화사에 차지하는 그의 자리를 온전하게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의 시인 이만희는 영화 속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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