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묘한’ 제목의 영화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법 오래된 일이다. 지난해 청룡영화제 시나리오 부문에서 수상하고부터 “시나리오가 좋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니 일년 정도 유명세를 치른 셈이다. 이정향 감독은 그 사이에 펜대를 놓고 메가폰을 잡았다. 올초 약관 23세의 이서군이 데뷔하긴 했으나, 충무로 현장 출신 여성감독은 이미례 감독 이후 이정향 감독이 처음. 십년 넘도록 충무로와 대학로를 넘나들며 필력과 연출력을 다진 이 감독은 진부해지기 십상인 멜로드라마를 독특한 짜임새로 솜씨있게 요리했다.
영화의 주요무대인 미술관과 동물원은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공간은 제목 그 자체이기도 하며, 사건이 일어나는 주요 무대이기도 하고, 두 주인공의 취향과 성격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활기차고 본능에 솔직한 동물원의 철수와 정적이고 내향적인 미술관의 춘희. 이들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면서 시나리오 속의 인공과 다혜도, 동물원 수의사와 미술관 안내원으로, 좀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만남을 갖는다. 철수가 춘희의 분신인 미술관 다혜의 등을 떠밀며 좀더 적극적이길 주문할 때, 춘희는 철수의 분신인 동물원 인공에게 자상하고 세심한 배려를 요구한다. “풍덩 빠져드는 게 아니라, 서서히 물드는 사랑도 있다”는 걸 깨달은 춘희는 동물원을, 귀대를 앞둔 철수는 미술관을 찾아간다. 이렇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침범당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기로 하고 서로에 대한 좀더 깊은 탐색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공간에 생기를 더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청결 불감증에 걸린 중성적인 사진사 춘희 역의 심은하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고 생기있다. TV에서 인기몰이하고 영화에 첫 출연한 이성재도 외강내유의 철수 캐릭터에 꼭 들어맞는 연기를 펼쳤다. 이들이 끝없이 티격태격 치고받는 대화는 간혹 감정의 과잉과 문어체의 대사 때문에 연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두사람이 연민과 동지애에서 사랑으로 도수를 높인 계기, 이정표 앞에서 시나리오의 해피엔딩처럼 두사람이 입을 맞추는 결말도 조금 난데없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그러나 유쾌하다. 캐릭터에 대한 진한 애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따뜻하다. 탄력있게 치고받는 대사들, 능청스레 곳곳에 포진한 잔잔한 유머는 이 영화가 가진 또다른 미덕이다. 바랜듯한 화면, 간결한 미장센, 과장된 대사 등 영화 속 영화 대목은 몽환적이다. 특히 다혜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은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 분위기를 닮아 있다. 늦가을의 풍광도 현실과 영화를 넘나들며 분위기를 돋우는 데 일조한다.
“춘희는 나를 모델로 했다”
이정향 감독
이정향 감독은 64년생으로, 서강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를 수료하고 다큐멘터리 <이브의 설자리> 연출, <오늘 여자> 연출부·<비처럼 음악처럼> <천재선언> 조연출을 했으며, 연극 <학교 안간 날> 각본, 연출을 하기도 했다.
-미술관과 동물원이라는 배경 설정이 독특하다.
=나란히 있으면서 서로 다른 것들이다. 과천에 나란히 서 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공원의 대비가 재밌다고 생각해서 모티브로 삼게 됐다. 미술관과 동물원처럼, 철수와 춘희, 인공과 다혜,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조화를 이루게 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캐릭터가 정감있고 생생하다. 어떻게 만들어냈나.
=춘희는 나를 모델로 했다(웃음). 그래서 풀어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철수는 춘희와 정반대지만 밉지 않은 그런 인물로 만들어봤고. 두사람이 현실에서 다하지 못한 것들을 이뤄가는, 그 기대치의 인물들이 영화 속 영화의 인공과 다혜다.
-캐스팅엔 만족하나. 춘희 역에 심은하는 좀 의외인 듯한데.
=제작사에서 처음부터 춘희는 스타급으로 가자고 해서 심은하씨로 결정이 됐는데, 춘희 이미지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나름대로 소화했고 연기를 잘해줬다. 만족스럽다. 이성재씨는 <거짓말>을 보면서 점찍어뒀다. 연기가 안정돼 보였고, 물처럼 생겼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평범한 듯 매력있고, 모범적인 듯 이기적인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철수와 아주 가까웠다.
-엔딩을 시나리오와 다르게 갔다. 철수와 춘희의 사랑을 예감하는 해피엔딩을 특별히 강조하기로 한 것은 혹시 상업적 고려 탓인가.
=관객이 누구를 더 보고 싶어할지 생각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인공과 다혜가 이야기를 마무리지어야 하지만, 두사람의 관계는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무관할 것 같았다. 관객은 철수와 춘희를 궁금해할 것 같았고, 아울러 동물원과 미술관의 이정표도 다시 보여주고 싶었다.
-액자, 모니터, 창틀 등 영화 속에 수많은 프레임이 등장하고, 그 속으로 인물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춘희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다. 액자 그림을 좋아하고 창 밖의 풍경을 좋아하고 손으로 프레임 만들어 보기를 좋아하는, 단순히 그런 취미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철수의 지적처럼 그 속에 자신을 가두고 얽매이기도 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갇힌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
-직접 쓴 시나리오로 찍었는데, 처음 구상과 근접한가.
=처음 촬영 나가기 싫었던 게 아무리 잘 찍어내도 머릿속에 그린 그림만큼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근사치라고 생각되는 건 인공과 다혜가 밤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 춘희가 머릿속에 그리는 인공의 모습과 노트에 쓴 인공의 이름이 교차되는 장면 정도다. 심은하씨가 연기한 춘희도 좋았다. 시나리오 끝내고 덮을 때는 최소 서울 30만이라고 자신했는데, 직접 만들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처음 생각보다 영화가 많이 커졌다고 했는데.
=처음엔 독립프로덕션에서 소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춘희 방 하나만 있으면 나머지는 그냥 길에서 찍을 수 있고, 여러모로 돈 안 드는 IMF형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큰 제작사 만나면서 예산이 커지고 스타를 기용하면서 흥행에 대한 의무감도 생겼다. 그게 딜레마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