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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쇼 비즈니스인가, 앨런 파커의 <벅시 말론>
홍성남(평론가) 2000-01-11

지금에 와서 평가할 때, 1980년대가 영국영화의 르네상스였는지는 논쟁이 될 만한 이슈이지만, 여하튼 영국영화가 활력을 되찾고 있다는 식의 낙관론이 당시에 팽배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리들리 스콧, <로컬 히어로>(1983)의 빌 포사이스, <불의 전차>(1981)의 휴 허드슨, <킬링 필드>(1984)의 롤랑 조페 등이 새로운 영국영화를 일구어나가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던 기린아들이었다. 한편 이들이 일으킨 ‘돌풍’의 근저에는 또다른 주역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작자인 데이비드 퍼트냄이다. 그의 예민한 눈과 여타 감독들의 번득이는 재기가 온전하게 결합된 영화들은, 대체로 사회·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비평적으로 호평도 얻고 그 여파로 세계시장에서 실리도 챙기는, 중급(中級) 규모의 작품들이었다. 앨런 파커가 감독한 <벅시 말론>은 이런 식의 ‘퍼트냄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시발점쯤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멜로디>(1972)에서 제작자-시나리오 작가로 만났던 이 두 광고계 동료가 이번엔 제작 총지휘-감독으로 짝을 이뤄 차후에 이뤄낼 성공의 전주곡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벅시 말론>은 앨런 파커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대부>를 보던 도중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영화답게 장르는 갱스터이며, 배경은 1929년의 뉴욕이다. 팻 샘이 운영하고 있는 ‘스피크이지’(Speakeasy: 무허가 술집)에 몰려든 댄디 댄의 패거리들은 이곳을 쑥밭으로 만들어놓고 달아난다. 팻 샘은 계속 당하기만 하는데, 이유인즉슨 댄디 댄 패가 ‘공갈총’(Splurge Gun)이라는 최신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 팻 샘은 이 새로운 무기를 훔쳐올 계획을 세우고, 그 임무는 외로운 ‘도시의 늑대’ 벅시 말론이 맡게 된다. 연인 블라우시를 할리우드에 데리고 가기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할 양으로 팻 샘 편에 가담한 벅시. 이제 남은 것은 팻 샘과 댄디 댄 사이의 피할 수 없는 한판전쟁뿐이다.

이처럼 지극히 상투적인 스토리라인을 가진 <벅시 말론>에는 갱스터 영화의 전형적인 요소들과 아이콘들로 가득 차 있다. 20년대를 다룬 여느 갱스터 영화들에서나 볼 수 있는 고풍스런 배경 속에서 마치 험프리 보가트를 연상케 하는 도시의 터프 가이가 대활약을 거두는가 하면, <길다>에서의 리타 헤이워스 같은 팜므파탈(어린 조디 포스터가 연기하는 탈룰라)이 그에게 고혹적인 시선을 던진다. 게다가 <카튼 클럽>에 나옴직한 탭댄서와 코러스걸들이 흥겨운 노래와 춤을 선사하기도 한다. <벅시 말론>이 신선한 것은 이 모든 인물들을 평균 나이 12살의 어린이들이 연기했다는 점. 이들의 연령 수준에 맞추어 기관총을 닮은 무기에서는 크림이 발사되고(따라서 <대부>에서라면 벌집이 됐을 정도로 무차별 공격을 받은 자도 여기선 기껏해야 크림 세례를 받을 뿐이다), 자동차는 페달을 밟아야 움직이는 비교적 큰 장난감일 뿐이다. 이처럼 아이들의 놀이가 영화를 닮는다는 점에 착안함으로써 <벅시 말론>은 그 자체가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놀이’가 된다. 영화의 유희성이 최대로 발휘되는 것은 ‘공포의 파티’가 벌어지는 마지막 장면. 크림과 파이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일대 난장판 끝에 팻 샘과 댄디 댄 두패는 거짓말처럼 진정한 친구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화해한다. 얼굴 가득 크림을 뒤집어쓴 탈룰라가 내뱉는 말처럼 정말 “이것도 쇼 비즈니스인가?”

감독 앨런 파커

선정적 주제, 과열된 스타일

앨런 파커(1944∼)는 흔히 리들리 스콧, 토니 스콧, 에이드리언 라인, 휴 허드슨과 같은 계열에 놓이며 이야기되는 영화감독이다. 쉽게 말해 광고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확실히 파커 영화들은 대단히 광고적이다. 리얼리즘과 거리를 두고 환상적인 효과에 더 매달리는 이 ‘우수한 테크니션’의 영화들은 스타일로 내용을 압도하며, 플롯 논리나 캐릭터 등은 제쳐두고서라도 감정적 효과를 거두는 것을 선호한다. 다소 논쟁적이고 선정적인 주제들을 ‘과열된’ 스타일로 그린다는 점도 파커의 영화들을 특징짓는 주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그런 점으로 인해 영화팬들 사이에서 한때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던 그는 똑같은 이유로 최근 들어 그간 과대평가된 감독들 목록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파트너인 앨런 마셜과 함께 광고 제작사를 설립한 것이 파커가 내딛은 경력의 첫 발걸음. 500편이 넘는 TV광고물을 만들며 주요 상을 휩쓸던 그는 <BBC>에서 방송할 TV용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초등학생들의 사랑을 다룬 <멜로디>의 각본을 집필한 후 자신의 감독 데뷔작으로 내놓은 영화가 <벅시 말론>. 마약 밀수를 하다가 체포되어 터키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겪은 한 미국인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가 호평을 받으면서 영화감독으로서 파커의 명성은 굳건해졌다. 이후로도 그는 <페임>(1980), <핑크 플로이드의 벽>(1982), <버디>(1984), <미시시피 버닝>(1988), <커미트먼트>(1991) 등 꽤 많은 히트작들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그는 실제로 다수의 영화에 작곡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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