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삭발, 특수분장, 고행의 연기수업, <가발>의 채민서
사진 오계옥오정연 2005-08-12

아쉬움이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가져가야 할 짐인가 보다. 인터뷰 전날 진행된 <가발>의 기자 시사회장에서도, 인터뷰를 위해 기자와 마주한 자리에서도 채민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3년 전 그는, 300:1의 경쟁률을 뚫고 (곽경택 감독의 말에 따르면) “튀지 않는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챔피언>의 유일한 사랑으로 낙점됐다. 신인이 감당할 수 없었던 악의섞인 소문, 시청률에 의해 중요한 설정까지 좌지우지되던 드라마(<진주목걸이>), 평단의 악평이 유난히 신랄했던 코미디영화(<돈텔파파>), 근거없는 정보 때문에 우익영화로 먼저 알려졌던 일본영화(<망국의 이지스>)를 거쳐 그가 선택한 영화, <가발>. 억울한 영혼의 저주가 깃든 가발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주연배우의 고생이 훤했다.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하기보다는 눈빛과 분위기로 감정을 전달하려는 공포영화, 삭발에 특수분장, 게다가 1인2역까지. 그렇게 그는 오랜 투병으로 머리카락이 빠져버린 수현과 수현이 쓰게 된 가발에 머리카락을 제공한 희주를 동시에 품에 안았다.

“어제 처음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 찍고 싶은 장면도 많고, 감독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도 많았어요. 수현에서 희주로 변하는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분명히 찍었는데, 그것만 있었으면 관객의 이해도 훨씬 빨랐을 텐데 왜 편집과정에서 빼셨는지. 설명을 듣고 납득할 수 있다면 미련이 없을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다. 단순히 “언니, 밥먹었어”처럼 일상적인 대사 속에도 두 인물의 성정을 넣으려 고민했다. “‘언니’는 수현이고, ‘밥먹었어’는 희주라고 설정할 정도였어요. 말투며 행동, 동선까지 짧은 대사 속에서 변화를 주는 거죠.” 최고 14시간까지 소요됐던 특수분장은 또 어떤가. “문수오빠랑 키스신을 찍을 땐 막 화를 냈다니까요. 제발 코 좀 건드리지 말라고. 분장이 떨어지면 다시 붙이는 데만 두세 시간이 걸리거든요.” 수현이 자신의 맨머리를 긁어 피를 흘리는 장면에선 분장을 마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징그럽고 속상해서 끝내 울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인물이던 수현은 언제나 흐느끼거나, 병세가 심해져 몸부림치거나, 가발을 잃지 않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였다. “병실에서 수현이 시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정적인 장면에서도 정말 제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유선언니랑 같이 나올 때는 OK 사인이 나도 둘이 붙잡고 계속 울었고요. 가발 때문에 언니와 몸싸움을 벌일 땐 한쪽 팔이 완전히 부어오르는 것도 몰랐고….”

사실 채민서의 고행(?)은 <가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지난해 가을, 최근 일본에서 개봉하여 연일 관객몰이에 성공하고 있는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블록버스터 <망국의 이지스>에 작은 배역을 맡아 촬영중이던 그는, ‘일본 극우영화에 북한 테러리스트로 출연했다’는 괴담에 시달려야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감독과 제작진은 <망국의 이지스>는 반전영화이며, 채민서가 연기한 스파이는 국적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해명 보도자료를 돌릴 정도였다. “액션영화인 탓에 쇠파이프에 찍혀가면서 촬영하던 중에 그런 소문이 나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그 기간에 서울로 5일 동안 휴가를 받아서 들어왔다가 하루 만에 일본으로 돌아갈 정도였죠.” 외로움과 억울함이 물씬 묻어난다. 그러나 많은 고비를 넘긴 20대 중반의 젊은 배우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젓한 미소를 짓는다. “아는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작품도 별로 없으면서 남들이 10년 동안 날 소문에 몇번이나 휩싸이는 거냐고. 이젠 그렇게 생각해요. 잘 되려고 그러나보다.” 분명 그것은 그저 위로가 아니다. 그는 <가발> 촬영 중 2편, 요 며칠 사이 3편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사이코, 광녀, 로맨틱코미디의 주인공…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돌이켜보니, 평범한 배우의 평범한 멘트처럼 들릴 수 있는 그 말이 그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발> 이전에는 커트머리도 해본 적이 없다는 채민서. 파리한 맨머리가 안쓰럽긴 해도 영화를 보는 내내 가시지 않던 생각은, 그의 두상이 참 예쁘다는 것. 기자의 말에 그가 씽긋 웃으며 속삭인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두달 전부터 기른 머리카락이, 직접 면도하면서 유지하던 맨머리를 까맣게 덮었다. 그는 이제 소년 같은 커트머리를 매만지며 “머리카락이 귀 뒤로 넘어가서 너무 좋다”며 환하게 웃는다. “여지껏 제 모습을 다 깬 것 같아요. 감정을 몰입하는 게 어떤 건지도 배웠고, 배우라는 직업이 어떤 건지 이젠 좀 알 것 같아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아쉬움 속에 감춰져 있던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성취감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남다른 각오와 그에 어울리는 노력이 없었다면 아쉬움도 없었을 테고, 아쉬움이 없었다면 고민과 배움도 없었을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스타일리스트 박난경·메이크업 양이화·장소협찬 고가령 몰리에·의상협찬 에고이스트, MINE, 제시뉴욕, 가부끼, HEELS